제28화
#28.
“뒤에 있는 마차 때문에 위험을 자처한 것인가?”
무심함 안에 한심함도 살짝 담긴 솔라시우스의 물음.
“!!”
미하일과 병사들이 뒤늦게 흠칫했다. 반면 유리아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일 뿐이다.
“우와! 장난 아니다! 살면서 이렇게 다양한 비단은 처음 봐!”
마차 안에서는 언제 들어간 것인지 모를 루나시르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녀는 목에 비단을 감고서 마차 안에서 나왔다. 트롤의 피로 범벅됐던 소녀 마녀는 마법 덕분인지 깨끗한 상태였다.
“……!”
“이, 이런!”
“마차에 보안 마법이 걸려 있었을 텐데! 어떻게?!”
미하일과 병사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보안 마법? 그거 건 마법사 해고하든가 해. 파훼하기 엄청 쉽더만.”
낭패 서린 그들의 표정을 보는 루나의 얼굴은 해맑았다.
“…….”
유리아는 체념한 듯 솔라와 루나가 하는 행동을 그러려니 했다.
“리나,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라.”
여동생의 버릇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오빠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오라버니가 목숨도 구해 줬는데, 이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감? 이 비단 좀 봐, 오라버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챙겼어!”
“우리는 도적이나 용병이 아니다.”
“하지만 난 오라버니처럼 기사도 아닌데……!”
“나는 기사다. 비록 방랑 기사지만.”
“오라버니! 요즘 같은 세상에 너무 착하면 오히려 안 좋아! 호구 취급받는다니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진다고!”
“판단은 내가 할 테니 그 비단 두고 와.”
“치이, 적어도 오라버니 몫은 챙기지…….”
그런 오라비의 꾸중에 루나가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알았어.”
그러다가 솔라의 엄한 눈빛이 이어지자, 얼마 안 가 목에 두른 비단을 내려놨다. 눈가에는 아까움과 미련이 한가득이다.
마녀들은 늘 마법 연구를 해야 하고 사령술사처럼 음지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은 더더욱 돈에 쪼들린다. 루나가 저렇게 돈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로안 경,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하지만 저건 제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값을 치러도 되겠습니까?”
그때, 유리아가 솔라에게 다가가 정중히 말했다. 솔라를 향한 그녀의 말투는 어느새 존대에 가까워졌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유리아의 말에 솔라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볼카로 갈 예정이다. 그곳에는 지금 문라이트 후작이 있다고 했지. 가서 이번 일을 얘기하면 호의 정도는 베풀 것이다.
“혹시…… 저기 있는 비단 중에 원하는 게 있다면…… 몇 개 가져가셔도 됩니다. 제가 아버님과 가신들에게 잘 말해 보겠습니다.”
유리아는 솔라와 루나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작게 덧붙였다.
“아가씨! 안 됩니다! 이것들은!”
“!!”
그러자, 미하일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뒤에 있던 병사들도 눈을 크게 뜬다.
“미하일! 기사가 되어 어찌 도움을 받고 답례하지 않는단 말인가!”
유리아는 오히려 그런 미하일에게 단호히 말했다.
‘그놈의 기사도는 얼어죽을…….’
미하일은 속으로 분홍 머리의 여기사를 흉봤다. 그러든 말든 솔라는 마차를 훑어보곤 무심히 물었다.
“저기 있는 거로 뭘 할 생각이오?”
“변경백의 재산입니다. 팔아서 군량미를 조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탐내선 안 되겠지. 리나, 마차에서 나와.”
“……!”
그런 솔라시우스의 태도에 유리아는 다시 한번 놀란 눈을 했다.
우우웅.
솔라의 허리춤에 있던 푸른색 마검이 유리아를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우웅거렸다.
“여기서 같이 노숙을 하도록 하지. 나는 볼카로 가는 중이오. 그쪽은?”
“저희도 궁극적인 목적지는 볼카입니다. 일단 남쪽에 세바스라는 도시에서 군량미를 구한 뒤, 그곳에 있는 보급 부대와 함께 볼카로 갈 예정입니다.”
“그럼 세바스까지 함께 가지?”
“……예?”
“호위해 주겠다는 뜻이오.”
“예?!”
보물에 손을 대기는커녕 도시까지 호위해 준다고 하자, 유리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충분히 우리를 죽이고 보물만 먹을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방랑 기사잖아?!’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당장 정규 기사인 미하일 경도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망명 황족 출신이라서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가?’
정식 기사도 아닌 방랑 기사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살다 살다 방랑 기사에게서 기사도를 보게 될 줄이야…….’
문득 지금쯤 볼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실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
세상에서 오직 아버지만이 행하던 기사도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 느낌이다. 기사보단 마녀와 마법사의 위세가 높은 루한에서 제대로 된 기사도를 지닌 기사는 착한 흑마법사만큼이나 드무니까.
그렇게 유리아가 멍하니 로안이라는 방랑 기사를 보고 있는데, 대놓고 삐진 리나라는 어린 마녀가 기사 로안 옆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둘이 남매라고 하지만 머리 색도, 성격도 전혀 안 닮은 것 같았다. 이목구비는 언뜻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왕도에 가면 비단을 사 주마.”
잔뜩 침울해진 동생을 망명 황족 출신 방랑 기사가 자상한 목소리로 다독인다. 아까의 엄한 목소리와 전혀 다른 어조.
“오라버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자 침울했던 어린 마녀도 다소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왕도로 가면 보상을 받을 거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도 제법 있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리스트를 만들어 놔, 왕도에 가서 다 사 줄 테니까.”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는 어린 마녀의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고.
“알았어……. 각오 단단히 해.”
이쯤 되니까 어린 마녀는 토라진 기분이 다 풀어진 듯 굴었다.
“…….”
유리아는 이상하게 저 동생이라는 마녀가 부럽게 느껴졌다.
우우웅.
로안 경의 허리춤에 있던 푸른색 마검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해서 진동했다.
[로안, 그렇게 오냐 오냐 하면 버릇 나빠진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었는지 푸른색 마석을 빛내며 말까지 했다.
“일어났구나, 루시.”
[그래. 잠깐 사이에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딱히 별거 없었어.”
[여하튼 저 버릇 없는 마녀의 성질을 내가 고쳐 주겠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 버릇을 네가 뭔데 신경 써? 웃겨, 정말!”
마녀는 마검의 말에 잔뜩 풀어졌던 표정을 찡그리며 받아쳤다.
[봐라, 이미 버릇이 나쁜데 여기서 더 잘해 줬다간 신세를 망치게 된다. 저런 애한텐 회초리가 답이다. 나를, 나를 회초리로 써라. 기꺼이 사랑의 매가 되어 주겠다!]
마검의 목소리는 감정 없는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어조와 달리 말하는 내용은 의외로 사람 같았다. 딱 봐도 마녀와 마검의 사이는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고.
“역시 마검이었어!”
“에고까지 있는 마검이야!”
“어쩌면 저 기사님의 능력이?!”
그런 마검을 보는 유리아 일행의 눈이 커졌다.
“…….”
특히 마검을 보는 미하일의 눈빛에 은근한 탐욕이 서렸다.
* * *
밤에 접속했을 때 루시는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없는 사이 전속력으로 질주했는지 장소는 어느덧 외곽의 경계로 이동해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뭐지? 이 트롤 사체들은?’
그런데 저기 트롤 사체들은 당혹스러웠다.
트롤의 피를 온몸에 묻히고 채집에 정신없는 리나의 모습은 덤이다.
‘사령술사 아니랄까 능숙한 거 봐.’
그나저나 이렇게 무리지어 다니는 트롤이라니.
루시는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몬스터 사육을 이때부터 하고 있었구나.’
짐작 가는 게 있긴 했다. 제국은 자신의 설원의 가호를 농장처럼 이용했었지. 루한의 마녀와 마법사 들을 꼬드겨서.
그녀가 당장 마탑과 마녀회를 활용할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루 빨리 마탑이라도 장악해 주셔야 할 텐데.’
솔라가 원하는 정보도 마탑이나 마녀회를 장악해야만 제대로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여왕이라도 마법사들은 워낙 폐쇄적이라서 자신들의 자료를 잘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시는 솔라시우스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나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 대충 봐도 부상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늘 그렇듯 빛나는 것 같은…… 아니, 실제로 은은한 광휘가 흐르는 이 남자는 지금도 말끔하고 냄새도 좋았다.
저 앞에 트롤의 피로 범벅된 버릇없는 마녀가 있었지만, 시선조차 가지 않았다.
아우우우우.
그렇게 아직 잠든 척 조용히 몰래 솔라시우스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숲속 깊은 곳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늑대야! 엄청 많아!”
트롤의 피 채집을 막 끝내고 옷과 몸에 묻은 오물을 마법으로 닦던 루나가 말했다.
“100마리는 거뜬히 넘는군.”
솔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까 듣기론 숲 곳곳에 몬스터와 병사들 시체가 널려 있다고 했다. 짐승과 몬스터가 몰려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솔라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
루나가 그런 오라버니의 뒤를 부랴부랴 쫓았다.
이후의 일은 루시푸르네가 본 대로였다.
‘엘프어를 직접 하는 건 처음 봐!’
루시는 여기서 다시 한번 솔라시우스의 매력에 빠졌다. 역시 내 남자!
‘요정의 숲에서 자라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했지.’
은은한 광휘를 흘리며 요정어로 노래하듯 짐승들을 타이르는 남자의 모습은 숲의 은자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루시의 놀람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마차 안 가득한 보물을 보고도 어떠한 물욕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보물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포기하고 오히려 호위까지 해 주겠다고 한다.
‘역시 천성이 타고난 남자야.’
회귀 전에도 본 것이지만 참으로 좋은 남자이자 기사다. 그런 그의 진심을 모르고 그토록 의심하고 못살게 굴었으니 과거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
하지만 계속해서 감탄만 할 순 없었다. 리나라는 얄미운 마녀에 이어 또 다른 여자가 솔라와 만났기 때문이다.
‘유, 유리아?! 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가까이서 그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루시는 속으로 절규했다.
‘아악! 결국 만나고 말았어! 어떻게 이렇게 만나지? 무슨 운명이라도 되는 건가?’
분홍 머리, 분홍 눈동자를 한 미모의 여기사. 문라이트 변경백에서 저런 모습의 여성은 한 명뿐이다.
‘유리아를 이렇게 만나다니……! 볼카에 없다고 해서 안심했었는데!’
회귀 전, 솔라시우스와 가까웠던 여인 중 한 명. 어떻게 보면 현재 루시의 라이벌이자, 연적이 될 수도 있는 여인.
변경백의 여기사 유리아 폰 문라이트가 솔라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쏘았다. (적어도 루시는 그렇게 느꼈다.)
* * *
작게 밝힌 모닥불 주위에 일곱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잠을 자기엔 애매한 시각. 교대로 잠을 청해도 되지만 누구도 잠을 자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적막한 공기 속에서 유리아가 문득 솔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노래하듯 짐승을 쫓은 그건 요정어입니까?”
불그스름한 모닥불에 비친 유리아의 얼굴은 유난히 홍조를 띠었다.
“그렇소.”
“몇몇 황족들이 ‘서약 엘프’들과 교류한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요정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생각보다 수다스러웠다. 기사라는 직위 때문에 애써 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편이오.”
“한번 보고 싶습니다. 드워프는 몇 번 봤지만 엘프는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유리아는 후작가 영애임에도 솔라에게 존대했고, 솔라는 하대에 가깝게 대화에 임했다. 다들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몰락했지만 어찌 되었든 황족은 황족이니.
“별거 없소. 걔들도 사람이랑 똑같소. 그저 좀 더 오래 살고 아름다울 뿐이지.”
요정의 숲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솔라시우스의 기억을 떠올리며 답해 줬다.
“저 그런데…….”
솔라가 의외로 질문에 응해 주자, 유리아는 용기를 좀 더 내기로 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왜 보물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입을 여는 유리아의 얼굴은 아까 요정에 대해 물었을 때보다 훨씬 진지해 보였다.
“로안 경의 실력이면 우리 모두를 죽이고 보물을 가져도 됐을 겁니다. 지금 상황에선 목격자도 없을뿐더러 여기 있는 짐은 전부 비자금이라 변경백의 표식이 없는 재물입니다. 하물며 저희를 호위까지 해 주시겠다니…….”
그녀는 솔라를 향해 아까부터 품었던 의문을 풀고 싶었다.
유리아뿐만 아니라 미하일과 병사 셋도 궁금한 눈치다. 마찬가지로 솔라의 동생 루나와 마검으로 동기화된 루시도 솔라의 입에 집중했다.
“왜 내가 그대들을 제압하고 그대들의 것을 취해야 하오? 그대들은 내게 잘못한 것도 없으며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약자인데.”
이에, 솔라시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답했고.
여기사의 눈동자가 갑자기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몽롱해졌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