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29.
유리아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눈빛으로 솔라를 보면서 외쳤다.
“역시 기사도였군요!”
유리아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기사 중에 가장 기사도가 훌륭한 기사인 겁니다!”
여기사의 입에서 정말 뜬금없이 기사도라는 말이 나오자, 솔라시우스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기사도?”
“예! 기사도!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만 실제론 거의 행해지지 않는, 아주 고귀하고 고결한 정의입니다.”
“그런 걸 의식하면서 살진 않아서…….”
“!!”
그 말에 유리아는 더욱 신선함을 느꼈다.
“그렇군요. 로안 경 덕분에 이렇게 새로운 깨달음을 하나 얻고 갑니다.”
그녀는 솔라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를 본 모두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작 영애께서 그렇게까지 감사할 필요는 없소.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답례도 받을 생각이고.”
오직 솔라만이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렇게 호위까지 해 주시는데…… 물론 나중에 답례를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변경백은 늘 가난합니다. 답례를 해도 모자랄 게 분명합니다. 그걸 아시면서도 선의를 행하는 것은 기사도 그 자체입니다.”
보통 이런 행동을 하면 스스로 기사도를 행했다는 생각이 강할 텐데, 얼마나 올곧은 행동이 습관처럼 뱄으면 그럴까.
유리아는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그래, 진정한 기사도는 의식하는 것이 아닌 숨 쉬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는 여왕 폐하의 명을 받고 볼카로 가는 중이오. 지금 이 비자금으로 군량미를 보급해야지만 내가 수행할 임무도 수월해지겠지.”
그런 유리아의 반응이 부담스러워진 솔라는 자신의 행동을 애써 흐렸다.
“로안 경은 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약소국인 루한을 돕는다는 것 자체가 기사도의 표본입니다.”
하지만 솔라가 어떻게 말하든 유리아는 이미 정답을 정한 모양이다.
“편한 대로 생각하시오. 대화는 이 정도로 하지. 피곤해서 말이야.”
유리아의 물음에 금발, 금안의 방랑기사는 피식 웃으며 눈을 붙였다. 계속 대화해 봤자 쳇바퀴만 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벌써 잠드는 것이냐!]
솔라가 눈을 감으려 하자, 마검 루시가 투덜거렸다.
“이제야 잠드는 거야.”
[아, 그렇군. 내 실수다. 미안하다.]
“뭐 그런 거 가지고.”
대신 그는 루시를 손으로 쓰다듬어 줬다.
[그,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지. 푹 자거라, 나의 그…… 주……주인이여. 내가 지켜 주겠다.]
“그래.”
솔라는 마검에게 불침번 기능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잠을 청했다.
[응, 내가 지켜 주겠다.]
루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솔라와 루시, 서로가 생각한 지켜 주겠다는 의미는 많이 달랐다. 그녀에겐 불침번의 의미보단 연적을 경계하는 의미가 더 짙었으니.
쿵, 쿵, 쿵, 쿵.
모닥불 너머에서 대놓고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 소리의 주인은 분홍 머리 여기사. 분명 나쁜 여자는 아니다. 오히려 늘 충성스럽고 고마운 변경백의 여식이다.
눈을 붙인 방랑 기사를 보는 유리아의 분홍색 눈동자가 몽롱하게 빛난다.
[…….]
이를 지켜보는 여왕의 속은 답답해져만 갔다.
‘유리아 폰 문라이트…….’
회귀 전에도 활약했던 여기사다.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마지막까지 왕실과의 의리를 지키다 멸문했다.
과거의 솔라시우스도 유리아와 문라이트 후작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었지.
‘연적이 되어도 미워할 수 없는 여자……. 어떻게 보면 솔라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여자기도 해.’
이래서 그를 변경백에서 하루빨리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인데.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킨 변경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과 별개로, 연적이 될지도 모를 여식에 대한 심란함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므으으…….’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루시푸르네는 그저 입을 삐쭉 내밀고서 조용히 주위를 경계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의 체온과 손길 그리고 숨결을 느끼면서.
다들 서로를 경계하고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쉬지 못할 때.
솔라는 눈을 붙이기로 작정했다. 물론 깊게 잠들진 않았고 긴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옅은 잠을 청했다. 과거 대전쟁 시절 종종 써먹었던 수면법이다. 이걸 3년도 안 돼 다시 하게 되다니.
[…….]
솔라시우스가 잠들자, 마검 루시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닥불을 피운 곳에서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오라버니, 사령술 써서 불침번이라도 세울까?”
눈을 감은 솔라의 귓속으로 동생 루나의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도리도리.
솔라는 고개를 저어 반대했다. 아직 사령술사 이자벨에 대한 소문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반대하는 이유를 알았다는 듯 루나는 별다른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곤 모닥불과 그 모닥불 넘어 멍하니 자신의 오라비를 보고 있는 여기사를 응시했다.
‘저 여자, 우리 오라버니에게 완전히 빠졌군, 빠졌어.’
하긴, 능력도 외모도 성격도 혈통도, 어디 하나 꿀릴 게 없는 오라버니다. 여동생인 자신이 봐도 이건 인정이다. 당연한 일이기에 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라버니는 너무 착해 빠졌어.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어깨를 으쓱한 루나는 오라버니를 향해 호감을 대놓고 풍기는 여기사를 관찰했다.
분홍 머리에 분홍 눈동자를 한 여기사. 머리는 활동하기 편하게 목 뒤까지 짧게 잘랐다. 그럼에도 후작가 영애의 아름다운 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나쁘지 않을지도?’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 폰 문라이트. 신분도 꿀리지 않고 능력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외모도 오빠 옆에 섰을 때 빛을 잃지 않았다. 성격도 중요한데, 아까 대화를 얼핏 나눠 보니까 기본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루나가 말없이 유리아를 관찰하는 것처럼, 유리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솔라시우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도를 행했지만 이를 전혀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어.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고 있어!’
기사, 그것도 로안 샬루트라는 방랑 기사가 보이는 기사도는 그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루한에서, 아니 루한뿐만 아니라 제국을 비롯한 대륙 전역에서 기사도는 신화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이를 제대로 행하는 기사는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정도로 드물었다.
특히 주군 없는 방랑 기사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주군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 사칭이거나 주군에게 버림받은 기사들. 그랬기에 거의 모든 방랑 기사는 무장 좋고 훈련 잘 받은 무뢰배 취급이었다.
‘돌연변이 트롤 넷을 가볍게 죽인 것도 모자라, 수백 마리 늑대를 노래 한 소절로 쫓아내다니…….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오만하지 않다니.’
당장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아버지 문라이트 후작도 기사도를 지키려고 노력만 할 뿐이다. 유리아의 아버지 또한 종종 현실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다.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싫다는 듯 눈을 감은 솔라의 모습에 유리아는 아쉬움을 느꼈다. 저 푸른색 마검에 대해서도 궁금했고 광휘를 휘날리는 그의 마법 같은 무용도 궁금했다.
‘잘생겼다…….’
한편으론 눈을 감고 옅은 잠에 빠진 남자를 예술품 보듯 구경했다. 황족이 맞긴 한 듯, 그의 외모는 잘생긴 걸 넘었다. 엘프 정도는 와야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기사 로안 옆에서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시선을 의식했다.
“동생분께서는 안 주무십니까?”
유리아는 솔라에게 향했던 시선을 루나를 향해 돌리며 물었다.
흑발, 흑안에 검은 마녀 옷을 입은 소녀. 소문대로라면 로안이 의동생으로 거두었다는 몸종 출신 마녀일 것이다. 저 어린 마녀는 잠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저 고양이 같은 눈으로 잠든 오라비 옆에서 자신을 응시할 뿐이다.
“불침번은 저희가 서겠습니다.”
다시 한번 유리아가 루나에게 말했다.
“아니, 난 오라버니와 달라.”
그러나 리나 샬루트라는 이름의 마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짧은 대답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
“그렇군요.”
유리아는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마녀! 너는 무엇인데 후작 영애께 하대하듯 말하는 것이냐!”
그때 그녀 옆에 있는 기사 미하일이 불쾌하다는 듯 공격적으로 말했다.
미하일 옆의 병사 셋은 높으신 두 분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사님, 그리고 무서운 마녀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 오라버니는 몰락했지만 황족이야. 나는 그런 오라버니의 동생이고. 황족은 후작, 공작, 왕족보다 높아.”
“네가 황족이라고?!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를 한 마녀가?! 네가 몸종 출신의 의동생이라는 소문은 이미 변경백 전체로 퍼졌다. 마법을 익히다가 정신이 나간 것인가?”
리나의 말에 미하일이 비웃었고. 흑발, 흑안의 소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정신 나간 마녀가 뭔지 보여 줘?”
마녀 리나의 태도는 오라버니가 깨어 있을 때와 많이 달랐다.
오라버니 앞에서는 왈가닥, 철부지 소녀였다면 지금은 고고하고 냉정한 귀족 같았다.
“미하일, 그만해라!”
둘의 대치가 심각해지자, 유리아가 급히 중재에 나섰다.
“실례했습니다, 리나 샬루트.”
“아가씨!”
유리아가 먼저 굽히자, 미하일의 표정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미하일, 명령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마.”
여기사의 명령에 미하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두 눈동자는 모닥불 뒤의 검은 마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안 주무신다면 저희끼리라도 대화를 나눌까요?”
미하일을 조용히 시킨 유리아는 루나에게 부드럽게 제안했다.
유리아는 솔라시우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의 여동생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일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한편으론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후작가 영애를 앞에 두고서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소녀가 신기했다.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이 세상에는 신분이라는 게 있다.
즉, 후작 영애인 자신 앞에서 저렇게 태연하다는 것은 리나 샬루트 또한 황족이라는 의미다.
‘정말 황녀인가? 하지만 흑발, 흑안이잖아?’
유리아도 바람을 타고 온 뜬소문들을 듣는다.
황족 출신의 방랑기사 로안 샬루트 옆에는 리나 샬루트라는 마녀가 있는데 친동생은 아니고 몸종 출신의 의남매라더라, 와 같은 소문.
“여명이 찾아오려면 좀 더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무료함이라도 덜지요.”
어찌 되었든 기사 로안 샬루트는 리나라는 마녀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그렇다면 존중해 주는 것이 맞겠지. 당장 그의 힘이 필요한 것은 문라이트 변경백이니까.
“그래, 서로 질문을 주고받자. 나도 유리아 폰 문라이트, 그쪽에게 관심이 많아.”
유리아의 제안에 루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말입니까?”
유리아는 루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응! 분홍 머리에 분홍 눈동자라니! 옛날에 스승님께 들었어. 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면 그렇게 된다고! 오라버니의 금발, 금안보다 더 희귀하지 않아? 난 그것부터가 마음에 들었어.”
루나가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제 머리 색과 눈동자가 희귀하긴 합니다만…….”
루나의 말에 유리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쩌면 올케가 될지 모를 관계잖아?”
하지만 뒤이어 나온 루나의 말에 부끄럽게 머리카락을 만지던 유리아의 손이 멈췄다.
“올, 올……?!”
유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루나의 말에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신, 우리 오라버니에게 이성적으로 관심 있지? 아까부터 사랑에 빠진 눈으로 오라버니를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난 찬성이야! 새언니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눈앞의 여기사가 심장 마비가 오든 말든 루나는 씨익 웃을 뿐이다.
“허업!”
“그게 무슨!”
“영애께서 시집을?!”
루나의 말에 상당히 많은 이들이……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반응했다.
당장 유리아 옆에 있던 미하일이 미간을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졸고 있던 병사들도 화들짝 놀라 수마에서 벗어났다.
우우우웅!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이 버릇없는 도둑고양이 같은 마녀야!]
솔라의 허리춤에 있던 푸른색 마검 루시가 발작하듯 목소리를 냈다.
이 대화의 중심부에 있는 솔라도 현 상황을 인지했다.
‘루나? 얘는 왜 갑자기 급발진이지?!’
다만, 여동생이 쏘아 올린 작은 대환장에 지금 깨어나면 더 곤란할 거 같아서 계속 자는 척했다.
루나시르네가 이토록 멋대로 급발진하는 데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오라버니는 지금이 결혼 적령기야. 원래라면 가문에서 혼사를 정해 줘야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럴 수 없지’
이세계는 빠르면 10대 중반에서 보통 10대 후반에 결혼한다.
기사, 마법사 같은 전문직도 20대 초중반에 결혼한다.
‘이대로 놔뒀다간 저 목석같은 오라비는 서른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갈 거야.’
리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1황후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대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사령술을 익힌 나 같은 마녀를 받아 줄 남잔 없어. 나는 가정을 못 이뤄도 좋으니 오라버니라도.’
사실상 결혼이 불가능한 본인의 처지도 그녀의 행동에 영향을 줬다.
‘난 이 그림자 핵을 감당하기에도 벅차.’
그녀는 늘 목에 걸고 다니지만 옷 속에 가리고 다니는 로사리오를 의식했다. 로사리오 속에 봉인된 그림자 핵은 종종 웅웅 울면서 루나를 긴장케 했다.
‘무엇보다 유리아 폰 문라이트 정도 되는 여자는 또 만나기 힘들어.’
게다가 눈앞의 여기사는 후작가의 여식, 루한에선 여전히 외부인인 솔라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저렇게 오라버니에게 푹 빠졌으니 배신을 할 일도 없을 테고!’
귀족들에게 정략결혼은 숙명이다. 어차피 하게 될 정략결혼이라면 눈앞의 후작 영애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루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