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30.
어색하고 적막했던 분위기가 반전됐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늦은 새벽의 여운이 모닥불 주위를 둘렀다.
[솔…… 아니, 나의 주인 로안 샬루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더러운 검은 마녀야! 네가 뭐라고 로안의 인생에 참견하려는 것이냐!]
푸른색 마검 루시가 노발대발한다. 분명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지만 이상하게 당혹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는 너는 뭔데? 나는 로안 오라버니의 하나뿐인 여동생이거든?! 에어컨 기능밖에 없는 마검 주제에 이래라저래라야?”
당연하지만 그런 루시의 반응에 가만히 있을 루나가 아니다.
[무엇보다 로안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다! 저 여기사가 로안을 사랑한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고! 멋대로 타인의 운명을 조율하려 들지 마라! 이 어리고 버릇없는 마녀야!]
“뭐래?”
잠든 오라버니 허리춤에서 발악하는 마검을 루나는 무시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솔라를 슬쩍 보았다.
‘자는 척하고 있네?’
곤란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오라비의 모습이 재밌다고 느껴졌다.
‘만약 정말 싫었다면 바로 일어나서 제지했을 거야. 하지만 오라버니는 자는 척하면서 가만히 있는 중이지. 즉! 나에게 전권을 위임한다는 뜻일 터!’
여동생의 착각은 깊어져만 갔다.
“새……새언니라니!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리나 샬루트!”
유리아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붉어진 얼굴로 부인했다.
“보니까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거 같은데 서로 편하게 말 놓자.”
루나는 부인하는 유리아를 향해 맑은 미소로 제안했고.
“그, 그럴까? ……가 아니라!”
그 미소에 유리아는 잠시 넘어왔다가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은 오빠뿐만 아니라 동생에게도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어떻게 돼? 나는 이래 보여도 열여덟이야.”
“스, 스물하나……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오라버니랑 동갑이네! 나이도 어쩜 잘 어울릴까? 유리아 언니라고 불러도 되지?”
“…….”
유리아는 리나라는 마녀에게 휘둘리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당황스럽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저는 로안 경을 존경하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진짜? 설마……! 혹시 다른 남자가 있는 거야?”
“아닙니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자를 사귀어 본 적 없습니다. 무엇보다 결혼할 생각도 없습니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유리아의 눈에는 여태껏 보지 못한 단호함이 서렸다.
“남자 경험이 없는 건 다행이네! 그런데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긴, 지금 같은 전시에는 좀 눈치가 보이긴 하겠지.”
“…….”
루나의 해석에 유리아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오라버니에게 관심 없어? 아까부터 오라버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건 결혼할 생각 없는 여자의 눈빛이 아니었어. 내가 잘못 본 건가?”
“물론 호감과 관심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로안 경의 기사도! 그, 그렇습니다! 기사도! 기사도를 본받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요, 기사도! 기사도!”
유리아는 허둥지둥 산만하게 말했다. 도대체 기사도라는 말을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연신 잠들어 있는 솔라시우스를 쳐다본다. 혹시나 그가 들었을까 싶어서.
“그래에~?”
리나가 유리아를 향해 묘한 미소를 흘렸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걸 보니 유리아의 말처럼 연애 경험이 없는 모양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천천히 유도하자. 시간은 많았다. 지금부터 볼카까지, 그리고 볼카에서도 눈앞의 여기사와 마주할 테니.
“그래서 우리 오라버니의 어떤 기사도가 마음에…… 끄읍!”
루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 했다가 말았다.
옆에서 차가운 냉기가 피어오르더니 리나의 엉덩이와 허리를 쿡쿡 찔렀기 때문이다. 정작 마검을 찬 솔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뭐야?!”
루나는 미간을 구기며 마검 루시를 노려봤다. 예리한 창끝처럼 뾰족한 아이스 스피어가 푸른색 마검 주위에 떠다녔다.
“루시, 너 미쳤어?! 에어컨 기능이 널 살린 거야! 그게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나한테 분해됐어!”
[너야말로 언행을 조심하거라! 죽기 싫으면!]
마검과 마녀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는 내 주……인 로안 샬루트의 혼사를 네가 결정한다는 것에 반대한다!]
“웃기시네! 네가 뭔데?”
[나는 로안을 지키고 그와 함께 미래를 이끌어 갈 마검…… 루시이니라!]
마검 윈테이라에 동기화 중인 여왕 루시푸르네는 눈앞의 버릇없는 어린 마녀가 얄미워 죽겠다.
‘리나 샬루트! 아니, 리나 리버스! 볼수록 얄밉네, 정말!’
이번 일로 리나가 자신의 연적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고맙기는커녕 더욱 싫었다. 단순히 의남매로 남기로 했다면 기꺼워서라도 마법이라도 전수해 줬을 텐데.
‘감히……!’
연적이 아니면 뭐 하나? 또 다른 연적을 멋대로 만들고 난리인데!
“웃기시네! 마검 주제에 무슨 오라버니 부인 행세야!”
[원, 원래 기사에게 검은 애인과도 같다고 들었다!]
검은 마녀와 푸른 마검. 둘의 대립은 좀 더 이어졌다.
“…….”
이 사태의 중심 중 하나인 유리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마검과 마녀를 번갈아 보았다. 자신을 새언니 후보로 올린 마녀와 이를 격렬히 반대하는 마검의 대립은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다.
[하지 마라!]
“네가 뭔데?”
사용하는 문장은 달랐지만 의미는 쳇바퀴 돌 듯 똑같은 대치.
처음 기겁했던 미하일과 병사들 그리고 유리아까지 살짝 무료한 눈을 하게 될 때쯤.
“그래서, 너는 우리 오라버니가 누구랑 이어졌으면 좋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죽게 할 생각은 아니지?”
루나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루시에게 물었다.
[그건……! 로안은 황족이니까 적어도 왕족이나…… 여, 여왕 정도는 되어야…….]
갑작스러운 루나의 변화구에 루시가 당황해 허겁지겁 답했다.
“여왕? 루한의 여왕님을 말하는 거야? 하긴, 그분 정도면 신분도 능력도 괜찮긴 하지. 듣자 하니 엄청 아름답다고 했고.”
루시의 주장에 루나가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국서가 된다면…… 그것도 좋을 거 같긴 해. 여왕님께서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물론 오라버니는 믿지 않는 거 같지만.”
[그, 그렇다! 너와 내가 의견이 맞는 경우도 있구나!]
루시푸르네는 처음으로 눈앞의 어린 마녀가 마음에 들었다.
마검 루시와 마녀 루나가 처음으로 훈훈한 분위기를 내보였다.
유리아는 그런 마녀와 마검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중간중간 잠든 솔라를 향해 분홍색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은 덤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검 덕분에 질투 유발도 하게 됐네?’
루나는 멍한 얼굴의 유리아를 힐끔 보면서 속으로 씨익 웃었다.
“오라버니가 루한의 국서가 된다라…….”
한편으론 루한의 여왕과 오라버니가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물론 가능성을 매우 낮았지만.
[그래, 국서! 루한의 국서가 되는 거다! 로안 샬루트라면 가능하고도 남는다!]
루시푸르네는 흑발, 흑안의 어린 마녀가 이렇게 어여쁠 수 없었다.
‘루한의 여왕님 정도면 나중에 제국을 되찾을 때 큰 힘이 되어 줄 수도 있겠다.’
루나 또한 오라버니의 반려로 루한의 여왕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루한의 국서라면 훗날 황위를 되찾을 때 큰 힘이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만에 하나 제국을 되찾게 되면 오라버니는 황제가 되는 것이고 루한의 여왕은 황비가 된다. 예전 제국의 영토에 북쪽의 루한까지 오라버니가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루한의 여왕은…….’
동시에 가장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근데 말이야, 루한의 여왕님은 설원의 저주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그 저주를 해주한다면 모를까, 그게 안 된다면 불가능할 거야.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도 자식은 낳아야 할 텐데…….”
루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서는 성녀 취급받는 여왕님이기에, 아무리 철부지 마녀라고 해도 여왕에 대해선 조심스레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오라버니가 더위를 지나치게 많이 탄다고 해도…… 괜히 시도했다가 얼어 죽으면 그것도 문제니까…….”
[……!]
조심스러운 루나의 말에 루시는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설원의 저주.’
악의 없는 루나의 말. 하지만 악의가 없기에 더더욱 루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설원의 저주…… 이번 생에선 과연 해주할 수 있을까? 약화가 아닌 완전한 해주가 가능하긴 할까? 확실치 않은 가정 때문에 솔라의 앞길을 망칠 수도 있어.’
여왕 루시푸르네는 갑자기 든 현실감에 가슴이 철렁거렸고, 들끓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래, 맞아……. 나는 저주받은 더러운 년이었지. 나 같은 여자보단 차라리…….’
루시의 고질병인 우울증과 자기혐오가 급격히 증가했다. 요 근래 회복 중이던 그녀의 멘털이 깨져 버렸다.
마검에 동기화된 루시의 시선이 모닥불 너머의 여기사에게로 향했다.
설원의 저주가 해결되지 않는 한, 솔라와 자신은 이어질 수 없었다.
확실히…… 현실적으로는 눈앞의 여기사가 솔라에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
우울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자기혐오로 영혼이 지옥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았다. 몰려오는 정신적 고통에 루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갑자기 마검이 마석도 빛내지 않고 조용하자, 루나는 알 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며 루시를 살폈다.
[자야겠다. 피곤하다.]
루시는 그 말을 남기고는 동기화에서 벗어났다.
커다란 충격은 잠든 솔라를 지켜 주겠다고 한 다짐도 잊게 만들었다.
마검 루시의 아웃으로 인해 모닥불 주위는 다시금 적막을 되찾았다.
동시에 적막과 함께 어둠도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숲과 숲 사이로 난 길까지 여명의 빛이 스며들었다.
빛이 스며듦과 동시에 감겼던 솔라의 눈이 떠졌다. 금색의 눈동자가 새벽의 은은한 빛과 만나 별처럼 피어올랐다.
“일어났어? 오라버니?”
눈을 뜬 오빠를 향해 루나가 방긋 웃는다.
‘걱정 마! 내가 책임지고 장가보내 줄게!’
루나는 굳은 다짐을 하고 잠에서 깨어난 솔라를 반겼고.
콩!
그런 동생을 향해 솔라가 꿀밤을 세게 때렸다.
“히에엑! 왜 때려?!”
루나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항의한다.
“출발하지.”
솔라는 동생을 무시하곤 검은색 말 맨해튼카페에 올라탔다.
그리고 허리춤에 잠들어 있는 마검 루시를 쓰다듬었다. 아까 동생과 대화를 나누던 것은 전부 들었다. 그 과정에서 루시는 어떤 이유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한편, 루시 못지않게 침묵을 지키는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유리아의 부관이자 문라이트 변경백의 평기사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열등감과 욕정이 동시에 담긴 눈으로 유리아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솔라시우스를 노려봤다.
‘몰락한 망명 황족 주제에!’
검은 말에 올라타 여명을 맞이하는 방랑 기사. 유리아는 그런 방랑 기사를 붉어진 얼굴로 힐끔힐끔 쳐다본다. 옆에선 재수 없는 검은 마녀가 빗자루를 타고 상공을 뽈뽈거리며 날고 있다.
‘빌어먹을. 일이 꼬였어.’
그럴수록 솔라시우스를 향한 미하일의 눈에는 질투와 짜증이 뜨겁게 타올랐다.
‘기사도를 챙길 거면 적당히 챙기고 떠날 것이지!’
몬스터도 짐승 무리도, 전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솔라의 허리춤에 달린 푸른색 마검으로 향했다.
전부터 이상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근거는 없지만 저 마검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느낌.
‘그 말도 안 되는 용력은 분명 저 마검 때문이겠지. 저 젊은 나이에 오러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해! 무엇보다 기사가 마법을 쓴다는 건 마검을 가지고 있을 때뿐이니까.’
저 마검만 있으면 나도!
열등감에서 질투로 다시 질투에서 탐욕으로 미하일의 눈동자가 빛났다.
* * *
숲길에서 빠르게 빠져나온 일행은 마차의 속력에 맞춰 이동했다.
세 대의 마차에는 각 마차마다 말이 두 마리씩 붙었지만, 워낙 무게가 나가다 보니 속도가 느렸다.
“비자금을 꺼낼 정도로 변경백 재정이 안 좋은 거요?”
솔라는 유리아와 함께 나란히 선두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그렇습니다. 원래도 아슬아슬했는데 최근 제국군이 대규모로 움직이면서 더 심해졌습니다.”
비자금이란 정말 위급할 때 사용하려고 마련한 재산이다. 가문이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어지간하면 쓰지 않는 재산. 그걸 꺼내 쓸 정도면 보통 쪼들리는 게 아니라는 거다.
“특히나 부대 이동에 물자가 많이 소요됐습니다. 군대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돈이 드는데 제국군의 움직임에 맞춰 이동하다 보니…….”
“행군만큼 자원이 많이 소비되는 것도 없지.”
유리아의 말에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전투보다 부대 이동이 자원과 보급을 더 많이 소모한다. 그도 지구에서의 대전쟁으로 뼈저리게 느껴봤다.
“중앙에서 추가 지원은?”
“온다고는 했는데 시간이 좀 걸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비자금으로 추가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예정입니다.”
“비자금이다 보니 공식 재산 목록에 없을 테고. 어디 외진 곳에 숨겨 둔 것을 꺼내 왔나 보군.”
“정확하십니다. 저는 그렇게 숨겨 둔 가문의 비자금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정도 되는 재산을 군량미로 바꿀 수 있는 큰 도시까지 운송하는 임무였죠.”
유리아는 다시 한번 눈앞의 방랑 기사에게 감탄했다. 황족 출신이라 그런가? 보급과 행군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 같았다.
그럴수록 유리아는 이 금발, 금안의 망명 황족에게 더욱 호감이 갔다. 솔직히 이제는 단순히 기사도만의 문제가 아닌 듯싶었다.
한편, 솔라시우스는 괜히 유리아와 변경백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 또한 나비효과인가?’
어떻게 보면 죽음의 대마녀의 탄생을 막은 것으로 이 모든 사태가 시작된 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