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31.
얼마나 이동했을까.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였다.
아침도 거르고 출발했기에 점심은 필히 먹어야만 했다. 다들 내색은 안 했지만 배가 고팠으니까.
“근방에 나베트라는 이름의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입니다. 그래도 식당과 여관 정도는 있을 텐데, 거기서 점심을 먹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도를 보던 유리아가 솔라에게 제안했다. 기사도 병사도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본다. 어느덧 솔라시우스는 이들 무리의 리더처럼 되었다. 타고난 카리스마와 지구에서의 경험 때문일까?
“그 나베트라는 마을, 공격받고 있는 것 같소만?”
“예……?”
솔라시우스는 유리아의 제안에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흡흡거리면서 바람을 타고 온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비명이 들려오고 피와 타는 냄새가 났다.
“리나.”
그는 설명 대신 하늘에 떠 있는 리나를 불렀고.
“무장을 보니까 도적들이야. 산적과 패잔병 들이 섞여 있어.”
어느새 망원경을 꺼내 들고 있던 리나가 아래를 향해 외쳤다.
“점심도 밖에서 해결해야겠군.”
그는 그렇게 말하곤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맨해튼카페가 히힝 울면서 속력을 냈다.
“로안 경!”
그런 솔라의 뒤를 유리아가 급히 쫓으려 하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슬며시 뒤를 돌아 기사 미하일과 병사 셋을 보았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 딱히 별다른 기색은 없었지만 괜히 불안했다.
저들을 믿을 수 있을까? 못해도 수 개월간 함께한 이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로안 샬루트가 더 신뢰 가는 것은 왜일까?
“괜찮아~ 유리아 언니.”
유리아가 망설이고 있을 때, 하늘에 떠 있던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아는 멍하니 하늘 위에 떠 있는 리나를 바라보았고
“방금 도적단 두목이랑 간부 셋을 한 번에 갈라 버렸어!”
검은 마녀복을 입은 소녀는 마치 스포츠 중계하는 해설자처럼 오라버니의 무용담을 알려 왔다.
“와! 벌써 도적단 중 절반을 쓸어 버림! 도적들 전부 도망치는 중! 어어?! 오라버니, 이제 활 꺼낸다!”
유리아를 비롯한 미하일과 병사들은 청력을 리나의 입에 집중했다.
“와…… 대낮인데도 광휘가 줄줄 흐르네. 오라버니는 도대체 요정 숲에서 뭘 배워 온 거야?”
말로만 들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대단할까? 유리아는 마차도 내팽개치고 그의 전투를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루시를 얻은 이후 더 빠르고 정밀해진 거 같은데? 아닌가?”
해설을 하던 루나가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중얼거리듯 말한 것이지만 청력을 집중한 두 기사의 귀에는 그런 리나의 혼잣말이 명확히 들렸다.
‘루시라고 하면 로안 경의 마검을 말하는 거겠지?’
유독 리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푸른색 에고 마검.
유리아는 그 마검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저 궁금한 정도였다.
“……!”
반면, 미하일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 * *
여왕 루시푸르네는 해가 하늘 높이 떴음에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베네사를 통해 오늘 예정된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하아…….”
딱딱하고 차가운 침대 위에 누운 루시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 답답하고 외롭고 우울하다.
천장에 있던 시선을 돌려 침대 옆에 있는 보주로 향했다.
“그렇네……. 설원의 저주가 있었네…….”
그동안 너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감히 내 주제에 행복을 찾겠다고.
처음 회귀했을 때. 루시의 다짐은 속죄였다. 이전 삶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한 속죄.
그랬기에 솔라의 대우를 최우선으로 했던 거고 그의 동생 루나시르네의 행방을 애타게 찾았던 것이다.
재상을 경계하고 유폐되었던 아버지를 섭정으로 모시는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설원의 저주를 완전히 해주하는 것은 부가적인 목표다. 현실성 없는, 세계 평화와 같은 추상적인 바람에 가까웠다.
본래 초심은 루한의 안녕과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설원의 저주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오직 루한의 안녕과 이전 삶의 속죄를 위해서! 그녀 자신을 위한 행복은 뒤로 미뤘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 사심으로 변질된 모양이다. 하!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암군 중에 암군인 루시푸르네의 행복이라니.
‘이전 삶에서 지은 죄도 모자라서, 이번에도 그의 앞길을 막으려 들다니!’
회귀의 고결함이 사적인 욕망으로 더러워진 것이다.
눈을 감았다. 아까 들었던 버릇 없는 마녀의 말이 떠올랐다.
‘가까이 가면 얼어 죽는 저주받은 여자에게 오빠를 장가보내라고?’
리나 샬루트에 대한 루시의 인식 때문인지, 그녀의 발언이 왜곡되어 재생됐다.
“하아…….”
다시 한번 한숨이 나왔다. 리나 샬루트. 어쩌면 본명은 리나 리버스일지 모를 짜증나는 마녀. 버릇없는 꼬맹이!
그러나 초심을 잃어 가던 루시에게 자극을 준 고마운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쩜 볼수록 얄밉지?”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 때문에 여왕은 혼잣말을 공격적으로 내뱉었다. 감긴 눈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재수 없고 얄미운 마녀지만 그 아이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또한 처음 우려와 다르게 리나 샬루트는 솔라시우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았다.
저 어린 마녀가 문라이트 후작 영애와 자신의 오라비를 중매하려는 일도 그렇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솔라시우스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솔라에게 행복이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있는 것일지도.
“으으…….”
생각이 이렇게 흐를수록 루시는 신음을 흘렸다.
“설원의 저주, 해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행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 속죄에 집중할수록 설원의 저주를 해제할 생각만 떠올랐다.
결과가 있다면 원인도 있는 법. 저주가 있다면 해주법도 분명 있을 거라 말하고 싶었지만…….
‘회귀 전에도 끝내 해주하지 못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지구식 표현으론 PTSD에 가까울 것이다.
설원의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 만들었던 대마법진 이노센티아가 떠오른다. 이노센티아를 떠올릴 때마다, 회귀 전의 트라우마가 그녀를 자극한다.
비록 중간 중간 재상이 훼방을 놨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하다. 애초에 루시푸르네 또한 여왕 이전에 한 명의 대마녀.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 루시 또한 재상 못지않게 관심을 쏟았고 해박했다.
‘이노센티아가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을 알맞게 품고 정상 작동됐어도…… 완전한 해주는 안 됐을 거야.’
그녀는 설원의 저주가 얼마나 악독한지 잘 알았다.
이노센티아가 정상적으로 가동했어도 기껏해야 많이 나아지는 정도일 거다.
사랑하는 이와 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
여왕은 그렇게 말없이 한 시간 정도 가만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졸리고 피곤할 뿐 잠은 오지 않았다.
두 눈을 감아 암전된 세상. 분명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지만 그녀의 심상에 어떤 인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분홍 머리에 분홍빛 눈동자를 한 여인. 그리고 그 여인 옆에 예복을 입은 금발, 금안의 남자.
신부 뒤에는 흑발, 흑안의 마녀가 부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절대 안 돼!”
상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루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몽을 꾼 것처럼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여느 때와 같이 서리가 되어 흩어졌다.
속죄니 뭐니를 떠나서 만약 이게 현실이 되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이노센티아! 다시 한번 해 보자! 이번에는 나 혼자서!”
끔찍한 상상은 트라우마마저 꿰뚫었다.
여왕은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뭐라도 해 보자!
루시푸르네는 넓고 평평하며 종이처럼 얇은 얼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수정으로 된 펜으로 마법진과 각종 수식을 쓰기 시작했다.
수식을 쓰는 그녀의 손목에 녹색 팔찌가 은은히 빛났다.
* * *
솔라시우스, 지구에서는 태광휘라 불리던 그는 본래부터 권력욕이나 물욕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것보단 방구석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진성 집돌이였다.
그의 천성은 태양 이능을 각성했을 때도 변하지 않았고, 훗날 지구를 구하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EX급 헌터가 되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구에서의 태광휘는 언제나 이타적으로 보였고 공명정대했다.
그런 그가 세계각성자협회장으로 있었기에 지구의 모든 각성자가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구촌의 모든 헌터가 그의 명령 한마디에 불지옥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광휘의 천성은 이세계 루한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루나와 유리아 일행은 마차와 함께 뒤늦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인근부터 침략을 상징하는 검은 연기와 시체가 보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귀를 적셨다.
침략은 생각보다 컸는지,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타거나 무너졌다.
막 침략이 끝난 마을. 기사 둘과 병사 셋이 마차를 이끌고 마을로 오는데도 마을 주민과 자경단 중 어느 한 명 막아서지 않았다. 아마도 솔라시우스가 사전에 얘기해 둔 모양.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의외로 들리지 않았다. 변경백의 외곽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기에 이들에게 무언가를 잃는 일은 재해 축에도 못 꼈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고 무너지고 불탄 건물을 수리할 뿐이다.
‘아니지. 좀 다른가?’
유리아는 반파된 마을에 들어서면서 주민들의 얼굴을 보았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텅 빈 죽은 생선 눈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이번엔 달랐다.
마을 주민들의 눈동자엔 하나같이 희망이 실려 있다.
그들은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마을을 습격한 도적과 패잔병들의 시체를 한데 모았다. 족히 100여 명은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벌거벗겨져서 마을 외진 곳에 언덕처럼 쌓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마을 노인들이 침략자들이 입고 있던 옷과 무기, 동화와 은화, 잡동사니를 분류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이 분류하는 노인들의 눈에도 희망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 막 들어서는데 근처에서 거친 욕설과 호통이 들렸다.
“퉤! 개자식들! 싸우라는 제국군이랑은 안 싸우고!”
“역겨운 패잔병 새끼들!”
“얼마나 우리 이웃을 많이 죽였으면 변경백 외곽에서 설원의 징벌을 받지?”
“제국군도 이새끼들보단 덜할 거야!”
몇몇 마을 청년들이 반쯤 불탄 집 앞에서 침을 뱉고 욕설을 하는 중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그들은 욕과 침을 뱉으면서 무언가를 밟고 있었는데 밟을 때마다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궁금했던 유리아와 미하일, 병사들은 잠시 멈춰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얼음 동상처럼 꽁꽁 얼어 죽은 패잔병 여섯이 마을 청년들에게 밟혀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저들은 솔라시우스나 마을 자경단에게 죽은 게 아닌 설원의 징벌을 받아 죽은 모양. 외곽에서 얼마나 부정한 살육을 많이 저질렀으면 설원의 징벌이 작동했을까?
“동정의 가치도 없군.”
“쯧!”
유리아와 미하일은 차가운 눈으로 혀를 차고는 시선을 다시 돌렸다.
“히익!”
“으으으…….”
반면, 각각 마차를 몰고 있던 병사 셋은 이 광경을 보곤 어깨를 움츠렸다.
같은 변경백 병사 출신이기에 은근히 와 닿은 모양이다. 괜히 자신들이 입고 있는 병사용 서코트를 가렸다.
“그나저나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밝군요.”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서 솔라시우스를 찾고 있는데,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도적들에게 침략당한 마을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밝은 표정을 한 주민들은 처음 보는군.”
모처럼 부관인 미하일과 유리아의 의견이 일치했다.
‘리나는 괜찮으려나?’
부관의 말에 동의한 유리아는 눈을 살짝 올려 오른쪽 위로 향했다. 검은 마녀복을 입은 소녀가 빗자루를 타고 뽈뽈뽈 부유 중이다.
처참한 마을의 모습. 하지만 그 남자의 동생 아니랄까, 리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검은 연기와 함께 풍기는 시체 타는 냄새에도 무덤덤하다.
‘하긴 숲에서도 트롤의 피로 목욕하면서 채집을 했었지. 마녀들은 원래 다 저러나?’
실제로 루나는 사령술을 익힌 마녀다. 10대 초반부터 해부학을 익혔고 늘 시체들을 인형처럼 가지고 놀며 자랐다. 잔인한 장면에 이골이 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리나, 로안 경은 어디에 있어?”
유리아는 리나를 향해 물었다. 어느덧 둘은 친구 혹은 자매처럼 편하게 말을 놓게 되었다.
“저어~기 마을 중심부에 있어. 와아…… 무슨 성자처럼 추앙받고 있네?”
“사람들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역시 로안 경 때문이구나.”
단순히 일당백의 무용으로 도적을 토벌해서 추앙받는 것은 아닐 터. 유리아는 더더욱 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