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32.
마을 중심부로 갈수록 주민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참 좋으신 분이여! 저런 분이 우리 루한에 와 주시다니!”
“그분 목소리 들었어? 정말 감미롭고 고급스러운 말투였어. 우리 같은 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 할 거야.”
“아주 높으신 귀족 나리들만 쓴다는 높은 제국어를 실제로 듣다니……. 과연 귀족은 다르구나!”
“귀족이 뭐냐? 저분은 귀족이나 왕족보다 훨씬 높은 황족인데!”
주민들은 하나같이 솔라시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번에 동부에서 일어난 사령술사의 폭주도 로안 기사님이 막으셨다잖아!”
“그뿐이야? 동부에서 악명 높던 도적들도 전부 몰살시켰고.”
“용사님이 탄생하신 거야! 용사님이!”
“이 지옥 같은 세상도 슬슬 바뀌려나?”
이야기의 주제는 솔라시우스. 그것도 그의 업적과 언행을 찬양하는 대화뿐이다.
“여왕님이 아주 총애하는 기사님이래!”
“저분이 그럼 차기 국서가 되는 것인감?”
“망명 황족이긴 해도 저런 분이라면 국서가 되어도 난 찬성일세!”
“하지만 여왕님은 지금 저주에…….”
“씁! 이 사람아! 로안 용사님이라면 방법이 있겠지!”
“악황후와 암흑대공을 무찌르고 여왕님의 저주를 풀고 결혼하는 이야기책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거야!”
게다가 이젠 기사에서 용사 취급이다.
적어도 지금 이 마을에서 로안은 여왕 루시푸르네보다 더 인기 있는 것 같았다.
“그 잠깐 사이에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쯤 되니까 동생인 루나마저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이기 때문에 마을 안에서 솔라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몰랐다.
“들었어?! 로안 님께서 사재를 털어서 우리 마을에 식량을 베푸신대!”
“도적들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도 우리 마을에 준다고 하시더라!”
“맙소사, 그 용사님 어디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건 여왕님은 물론 교국의 성자들도 하지 않는데…….”
“일단 어서들 가세! 용사님 덕분에 어쨌든 추수 때까지 굶을 일은 없겠어!”
점점 솔라가 있는 곳으로 향할수록 이상한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주민들도 솔라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낄 정도.
“……?!”
“뭔 소리야?”
“아무리 우리 오라버니가 착하지만, 호구는 아니었는데…….”
루나도 유리아도 미하일도 병사들도 모두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주민들의 대화를 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 중 한 명을 붙잡아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참았다.
1초라도 이상한 기행을 하는 로안 샬루트를, 오라버니를 만나야 될 것 같았다.
단순히 기사도를 넘어선 그의 기행은 듣기만 해도 이상했다. 대가를 받지 않고 무력을 쓰는 것만으로도 기사도를 충분히 행한 것이다.
하지만 전리품을 양보하는 것도 모자라 사재를 털다니!
“이 인간을 그냥!”
루나가 참지 못하고 빗자루의 속력을 높였다.
일행들도 속력을 높여 마을 중심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
“도대체 이게 무슨!”
마을 사람 모두가 무릎을 꿇거나 절을 하면서 금발, 금안의 남성을 향해 성호를 긋고 있었고, 근처에서는 상인들도 보이는 자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빵과 밀 포대를 나눠 주고 있었다.
아마 사재를 털어 식량을 샀다는 것이 저거인 듯싶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저 품속의 아이는 또 뭐야?!”
주민들의 찬양을 받는 솔라의 품에는 웬 거적때기를 입은 여자아이가 안겨 있었다.
루나는 가까이서 본 오라버니의 모습에 입을 쩌억 벌렸고.
“이런 건 신화 속에서도 안 나온다고…… 교국의 성자들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유리아는 이제 반응하기도 지쳤다는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종종 교단이나 부자들이 빈민들에게 빵을 주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저기 있는 로안 샬루트는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는 성직자도 아니고, 돈이 썩어 넘쳐 민란을 걱정하는 대부호도 아니다.
그저 몰락한 황족에 방랑 기사일 뿐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군.”
문득 미하일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솔라는 자신이 이 마을에 와서 지금까지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단신으로 마을로 와서 도적들을 처단했다. 광휘를 휘날리며 검을 휘둘렀고 도망치는 놈들에겐 활을 꺼내 쏘았다.
멍하니 자신을 우러러보는 주민들에게 어떤 답례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마을의 상황을 파악했다. 꽤 대규모 침공이라 마을의 절반 정도가 불탔고, 도망친 도적들이 상당량의 식량을 들고 갔다.
이대로라면 추수 때까지 버티지 못할 듯싶었는데, 마침 싸움 냄새를 맡고 마을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전쟁 상인들을 발견했다.
솔라는 전쟁 상인들을 불러 그들이 가진 식량과 의복을 대량 구매했다.
돈이야 아공간 인벤토리에 충분히 있었기에 이 중 일부만 꺼냈음에도 충분했다.
전쟁 상인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하면서도 가지고 있는 모든 식량을 건넸고 인근 도시로 직원을 보내 솔라가 건넨 값에 맞게 식량을 더 가져오라고 시켰다.
솔라시우스는 그것도 모자랐는지 죽은 도적들의 전리품을 손대지 않고 마을에 기증했다.
이는 대전쟁 시절, 그가 지구에서도 늘 행했던 일이었다.
일명 대민 지원.
몬스터의 침공을 무찌르고 부산물을 판 대금의 일부를 피해 입은 지역에 기증하고. 기업과 정부에게 기부를 유도하여 시민들이 다시 설 수 있게 돕는 것.
지구에서 태광휘는 언제나 이를 행했다. 지구에서도 선행으로 꼽히는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유별난 업적은 아닌 행동.
그는 습관처럼 지구에서의 인본주의를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도 행했을 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식량을 구했다는 점이다. 어차피 언젠간 지구로 돌아갈 몸. 애초에 물욕도 딱히 없기에 가지고 있던 은화와 금화 중 일부를 풀었다.
만약 지금 이들을 외면하면 괜히 지구에 가서도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행동하고서 얼마 안 가, 솔라시우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아……! 신께서 보낸 용사가 분명해!”
“신이 우릴 버리지 않으셨어! 여왕님과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로 한 거야!”
“새로운 성자이자 신께서 보내신 용사! 로안 샬루트를 찬양하라!”
사방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향해 절을 하고 성호를 긋는다.
‘뭐지? 대민 지원은 처음인가?’
광기에 가까운 시선에 그는 어리둥절할 뿐이다.
‘적당히 감사만 표하면 되지 왜 이렇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마치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
애초에 게임 속 세상이라 그 안의 사회상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합체된 솔라시우스의 지식도 황궁과 요정 숲 지식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전에는 노숙을 하거나 오스키 같은 큰 도시에서만 머물렀고 늘 상인들의 접대를 받았다.
한마디로 그는 가장 아래에 속하는 하층민의 세상을 잘 몰랐다.
이 세계에서는 지나가던 성직자가 자신의 외투를 추위에 벌벌 떠는 거지에게 덮어 주는 것만으로도 성자 소리를 듣는 세계라는 것을.
심지어 교단의 교리도 사랑보다는 명예와 정의, 용기가 중점인 세계라는 것을.
이곳은 봉건주의에 마법과 검기, 몬스터가 존재하는 중세 판타지 세계였고, 지구의 어떤 시대보다 양극화가 심한 세상이었다. 힘 있는 자에겐 천국이지만 무능한 빈민들에게는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세계.
특히 설원의 가호가 옅은 변경백 외곽은 유독 심했다.
태광휘는 몰랐을 뿐이다.
겉으로는 환상과 모험이 가득한 중세 판타지 세계는 아직 인본주의가 꽃피지 못한 삭막한 세계라는 것을.
솔라시우스는 체할 것 같은 사람들의 찬양을 일단 무시하곤 자신의 품을 보았다.
헐벗고 굶주린 7살 정도 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그의 허벅지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빵을 씹고 있다.
부모는 이번 침략으로 죽은 것인지, 이전에 죽은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걸레보다 더러운 거적때기를 입고 그 속살 사이사이에 구타의 흔적이 만연한 것이 도적들이 오기 전부터 버림받은 아이 같았다.
마을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안쓰러워 직접 품에 안고 빵을 먹이는 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역사상 전례 없는 선행을 행한 것도 모자라 더러운 고아를 품에 안고 빵을 직접 먹이는 모습.
심지어 성직자도 아닌 방랑 기사가.
이해하기 어렵고 경악에 가까운 행동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를 바라보는 모두에게 알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이름이 뭐지?”
솔라는 벌벌 떨면서도 그가 건네주는 빵을 허겁지겁 먹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적발에 금색 눈동자, 이목구비도 또렷한 것이 나중에 크면 제법 미녀가 될 듯하다.
“이름 없어요……. 하지만 다들 마야나라고 불러요.”
아이는 빵을 오물오물 씹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허억!”
“으음…….”
아이의 말에 주위에서 솔라를 찬양하던 마을 사람들이 순간 흠칫한다.
“마야나? 그럼 그게 이름 아닌가?”
“……아니에요.”
솔라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이 메마른 거 같았던 아이의 얼굴에는 모처럼 침울한 그늘이 생겼다.
“마야나가 무슨 뜻이지?”
아이의 그늘진 얼굴을 본 솔라시우스가 시선을 돌려 주민들에게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그것이, 하하하…….”
주민 모두가 시선과 대답을 회피한다.
“내가 대답해 줄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리나.”
하늘 위, 검은 마녀 옷을 입은 루나가 빗자루를 타고 솔라에게 다가왔다.
“마야나…… 참 오랜만에 듣네.”
그녀는 마야나의 의미를 아는 듯 보였다.
“마야나는 저주받은 년, 개 같은 년, 사악한 년과 같은 부정한 뜻을 담고 있어.”
루나는 솔라의 품속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딱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나랑 스승님도 전에 종종 들었었지. 흑마법을 익힌 마녀를 멸시하는 평민들의 은어야.”
“…….”
그 말을 들은 솔라의 황금색 눈동자가 고요해졌다.
“이 아이가 마녀인가?”
솔라는 더욱 벌벌 떨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루나에게 물었고.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어. 평범한 아이야.”
리나는 아이의 눈을 관찰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아이는 저주받은 아이입니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에요!”
“갑자기 집에 불이 나더니, 저 아이의 아비와 형제가 모두 불타 죽었습니다!”
“입양한 친척도 화재로 죽었고요!”
그러자 용기를 낸 일부 주민들이 외쳤다.
“당장 저 마야나를 죽여야 합니다!”
“아무리 용사님이라도 저주받은 아이를 계속 데리고 있으시면 부정 탑니다!”
“이리 주십시오! 우리가 마야나를 화형시켜 정화하겠습니다!”
“저 아이는 우리 마을의 수치입니다!”
당장이라도 화형식을 할 기세.
덜덜덜덜.
아이는 더 심하게 벌벌 떨었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저런 시선에 매우 익숙한 듯하다.
“약자라고 모두 선한 건 아니야. 악을 행할 힘이 없을 뿐.”
솔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중얼거렸고, 뒤이어 고요한 황금빛 시선으로 주민들을 훑었다.
고오오오오-!
고요한 시선을 맞은 주민 모두가 입을 착 다물었다. 방금까지 빛의 수호자 같았던 기사님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고요하고 차갑고 무섭다.
꿀꺽.
침이 절로 삼켜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몇몇은 실금하기도 했다. 마음이 여린 자는 무서움에 흐느꼈다.
“하지만 지금 너희의 행동은 무지에 가깝지.”
높은 제국어와 요정어로 감미로웠던 목소리가 싸늘한 설풍처럼 들려왔다.
쯧.
솔라는 혀를 찼다. 혀를 참과 동시에 마을 중심부를 무겁게 짓누르던 고요한 살기가 쑥 사라졌다.
“…….”
“…….”
살기가 사라졌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거나 털썩 주저앉은 상태.
말없이 이를 훑던 솔라의 시선에 문득 유리아 일행이 보였다.
그들도 방금 솔라시우스의 살기를 보았는지 벌벌 떨고 있었다.
유리아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가 담겨 있었지만, 평소 띠껍게 굴던 미하일은 벌벌 떨면서 솔라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차를 몰던 병사들은 대놓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근처에서 식량을 나눠 주던 상단의 직원들은 더욱 열심히 마차에서 식량을 꺼냈다. 방금 솔라의 고요한 살기에 놀라 빼돌려 먹으려던 물량까지 부랴부랴 꺼내는 게 보였다.
“우와! 오라버니, 호구는 아니었네?”
유일하게 이 자리에서 평소와 같이 반응하는 이는 루나뿐이었다.
루나의 검은색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안도가 담겨 있었다.
그런 동생의 반응에 솔라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