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33.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태광휘를 아는 이들은 정의와 선을 그의 관련 키워드로 떠올렸다.
정작 태광휘 본인은 두고두고 떠오를 찝찝함이 싫어서, 무엇보다 물욕이나 야망이 크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지는 방향으로 행동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애초에 착하다니 정의롭다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속 듣다 보면 만만하고 힘센 호구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용사라는 칭호를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오지랖 넓게 일부러 일을 만들진 않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기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것이 타인에겐 엄청난 선행으로 보였겠지.
하지만 바보같이 선만 행하지는 않았다.
태광휘는 대전쟁을 치르면서 인간의 추악한 밑바닥을 많이 봐 왔다. 생존 앞에서 인간은 쉽게 타락하고 무너졌었지. 그 과정에서 많이 실망을 했지만 반대로 많은 희망도 보았다.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은 어떻게 보면 익숙하기도 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시선을 거뒀다. 실망과는 별개로 저들에게 내일을 살아갈 식량은 마저 줄 것이다. 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럼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 줘야겠구나.”
생각을 정리한 솔라는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이름이 좋을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여러 이름을 떠올렸다.
“잠깐!”
그때, 루나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작명 센스를 못 믿겠어. 평생 가지고 갈 사람 이름인데 정상적인 내가 지어 주는 게 나아!”
“정상? 네가?”
“시끄러! 댁보단 내가 훨씬 정상이거든?”
루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비록 자신이 사령술을 익힌 마녀라지만 눈앞의 남자만큼 기행을 벌이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무슨 이름으로 지으려고?”
“으음……! 그래, 쥴리아! 쥴리아로 하자! 제일 무난해!”
확실히 무난한 이름이다. 평민 소녀기 때문에 거창한 이름은 지어 봤자다. 오히려 팔자 사나워진다고 꺼릴 것이다.
“나쁘지 않네.”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품에 안은 아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들었지? 이제부터 네 이름은 쥴리아다.”
그 속삭임에 아이의 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 * *
솔라가 한번 싸늘한 시선으로 휘저어서 그런지, 아까와 같은 광신의 열기는 이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솔라와 리나 그리고 유리아 일행은 마을 중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파 사이를 뚫고 제일 먼저 솔라가 향한 곳은 쥴리아라고 이름 지어 준 아이를 맡길 곳이었다.
그는 마을 외곽에 있는 교단의 신전을 찾았다. 종교적인 건물이기 때문에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도적들도 여긴 건들지 않았다.
“로안 기사님께서 마을에서 행한 이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들었습니다. 힘이 없어 무력하게 보고만 있던 저희에게 신께서 구원을 내린 게 분명합니다.”
그를 맞이한 것은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사제였다. 노파에 가까운 할머니 성직자.
‘이 사제라면 믿을 수 있겠군.’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게 불안했지만 적어도 이 아이에게 모질게 굴진 않을 것 같았다.
‘신전에 오니까 그가 생각나는군.’
신전에서 성직자를 보니 솔라는 문득 원작 후반부에 함께 싸웠던 캐릭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성자 시몬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교국에 있으려나?’
눈앞의 할머니 성직자에게도 슬쩍 물어봤지만 모르는 것 같았다.
‘아직 성자가 되진 않았겠지만, 그 정도 인물이면 전부터 이름이 알려져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물어보는 사제들마다 모르니 원.’
전에, 사령술사 이자벨 토벌 때에도 함께한 사제들에게 물어봤었다. 그때도 다들 시몬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루한은 대륙에서 제국 다음으로 교단의 영향력이 작다 보니 아는 정보가 별로 없는 모양.
그를 초반에 포섭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 여러모로 아쉬웠다.
솔라시우스는 신전의 사제들에게 짧은 인사와 덕담을 나누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이 아이를 잘 키워 주시오.”
그는 늙은 사제에게 품에 안았던 쥴리아를 소개했다.
“이 아이군요, 마을 중앙에서 로안 님이 품에 안고 빵을 먹인 아이가.”
사제는 쥴리아에 대해 얼핏 들었는지 따스한 눈으로 손을 내밀었다.
“…….”
쥴리아는 눈을 꾹 감고 솔라의 옷깃을 꼭 쥐고 버텼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전형적인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함께 못 간다. 나는 지금 전쟁터로 가는 중이거든.”
그런 쥴리아를 향해 솔라시우스는 단호한 눈으로 말했고 아이는 울기 직전의 얼굴로 결국 늙은 사제 옆에 섰다.
“이건 아이 키우는 데 보태시오.”
이어서 그는 사제에게 금화 두 닢을 건넸다.
“금, 금화?! 그것도 두 닢이나 말입니까?”
금화를 본 그녀가 흠칫한다. 이 정도면 쥴리아를 어른이 될 때까지 키우고도 남는다. 남고 또 남아서 신전 운영에도 숨통을 틔워 줄 것이다.
“망설이지 말고 받으시오. 거절해도 문 앞에 두고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님은 정말로…… 신께서 내린 용사가 분명한가 봅니다. 저 같은 늙은 성직자마저도 부끄러움과 깨달음을 느끼게 만드니까요.”
사제의 말에 솔라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 이어서 이세계에서도 자꾸 용사라고 불리는 게 싫었지만, 늙은이의 말에 태클 걸기도 뭐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씻고 쉬고 싶었다.
쥴리아를 맡긴 후. 일행은 마을의 여관을 찾았다. 이미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기에,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도 마을의 여관은 무사했다. 마을 규모에 비해 제법 커다란 여관이었는데 아마 마을 주민들보단 이곳을 거쳐 가는 부유한 상인들을 위한 여관인 듯싶었다.
일행은 이 여관에서 마차를 댔다. 그리곤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그러니까, 도적 떼를 무찌르고 전리품을 마을에 건네고 사재를 털어 식량을 주는 행위가 이상하다는 거지?”
“당연하지! 특히 마지막이 제일 이상해! 이런 건 이야기책 속에서도 안 나와! 마하 대제의 건국신화에서도 그런 건 없었다고!”
“단순한 선행 이상이라고?”
“착한 걸 넘어서 정신 나간 짓이었다니까? 장담하는데! 만약 오라버니가 막판에 살기를 피우지 않았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체가 오라버니를 더 벗겨 먹으려고 달려들었을 거야!”
루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오라버니를 나무랐다.
‘그래서 칼트 상단의 상인들도 그렇게 반응했던 건가?’
동생의 말에 그는 처음 루한에 왔을 때 만났던 상인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솔라의 행동에 감격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의문 어린 눈을 했었다.
아마도 ‘이 기사 양반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잘해 주나?’ 싶었을 것이다.
솔라는 손목에 낀 팔찌를 보았다. 아공간 인벤토리. 엄청난 보물이다. 이 인벤토리 안에 있는 금화보다 더 비싼 마도구였다.
당시에는 지나친 답례라고 생각했는데 빚지는 걸 싫어하는 상인들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답례를 해야 속이 편했을 터.
“하지만 로안 경의 그런 모습이 저는 마냥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루나와 솔라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리아가 입속의 음식을 전부 삼키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는…… 로안 경이 사람들에게 식량을 베풀고 그 쥴리아라는 아이를 안고서 빵을 먹이는 모습을 봤을 때…… 뭔가, 뭔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런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봤습니다.”
유리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지금도 그때의 그 광경을 생각하면 괜히 가슴이 뛰었다. 로안 샬루트의 기사도를 봤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 여운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서렸다.
“하긴, 이상했지만 마냥 나빠 보이진 않았어.”
루나는 눈썹을 올리며 유리아의 감상에 작은 동의를 했다.
“그렇지? 리나, 너도 오라버니인 로안 경을 본받도록 해. 나는 지금부터 로안 경의 기사도를 목표로 전진할 생각이니까.”
루나가 모처럼 동의하자 유리아가 분홍색 눈동자를 반짝인다.
“유리아 언니, 미쳤어?! 마녀가 얼마나 돈 많이 먹는 직업인데 그런 짓을 해?!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그렇게 돈이 많으면 차라리 나한테 투자를 해! 아주 멋진 마도구랑 마법진으로 보답할 테니까!”
괜히 불똥이 솔라에게 튀었다. 그는 동생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 대신 음식을 씹었다.
“마도구? 리나야, 그럼 기사에게 도움이 되는 마도구도 만들 수 있어?”
루나의 말에 반응한 사람은 솔라가 아닌 유리아였다.
그들이 여관에 마음 놓고 마차를 주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루나가 마차에 새로 걸어 준 보안 마법 덕도 있었다.
유리아는 리나라는 새로 사귄 동생의 마법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유리아 언니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만 해!”
“그래? 나는 어떤 마도구가 필요하냐면…….”
루나가 흔쾌히 수락하자 유리아는 가까이 다가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런 기능을?! 이론상으론 가능해. 시간과 예산 그리고 재료만 있으면! 그런데 언니…… 돈은 있고?”
“그…… 일단 외상으로 해 주면 안 될까?”
“이 언니가 나를 완전 오라버니 보듯 하고 있네?!”
루나와 유리아는 자매처럼 솔라를 가운데에 두고 시끄럽게 대화를 나눴다.
여관에는 여관 주인과 종업원 그리고 투숙객으로 보이는 몇몇 상인들이 1층 식당에 나와 있었는데, 모두가 숨을 죽이고 솔라 일행이 앉은 테이블을 힐끔 보았다.
‘뭐라는 거지?’
‘대화 소리가 안 들려!’
그들은 이 마을에 강림한 전설적인 용사 일행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들을 수 없었다.
솔라의 부탁을 받은 리나가 마법으로 음 소거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 무시무시한 테이블에 합석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광장에서 저 로안 샬루트라는 기사가 내뿜던 눈빛을 여관에 있던 상인들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딱 봐도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여기사와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평기사, 그리고 성격이 좋지 못해 보이는 마녀가 있는 파티다. 괜히 나댔다가 저주받을 게 두려워 상인이든 모험가든 용병이든 모두 눈치만 볼 뿐이었다.
주변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보든 말든 솔라의 일행들은 모처럼의 따듯한 식사와 여유를 누렸다.
특히 리나와 유리아, 두 여자의 시끄러운 수다는 멈출 줄 몰랐다.
그녀들의 수다를 듣다 지친 솔라는 서둘러 식사를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저들 식사하시길. 나는 방에 들어가서 씻고 쉴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로안 경, 푹 쉬십시오.”
“고생했어! 오라버니, 어서 가서 쉬어! ……그래서 말인데 유리아 언니, 변경백이면 자체적으로 마법사나 마녀가 있을 거 아니야?”
유리아와 리나는 솔라를 대충 배웅하곤 대화를 마저 이었다.
“리나, 아무리 내가 변경백 여식이라고 해도 그런 힘은 없다니까?”
“그래도 말은 해 볼 수 있잖아? 내가 그 마차에 걸린 마법을 보니까 느낀 건데, 걔들보단 내가 더 실력이 높을걸? 투자만 잘 성사되면…….”
둘은 죽이 잘 맞았다. 특히 루나는 지금까지 같은 성별의 또래가 없어서 그런지 유리아를 은근히 따랐다. 유리아 또한 루나가 싫지 않은지 때론 친구처럼 대했다.
나이 차이도 크지 않았기에 둘은 자매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솔라시우스가 방으로 사라지자마자, 지금까지 말없이 식사를 하던 미하일이 물 한 컵을 깨끗이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저도 가 보겠습니다.”
미하일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리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그런 미하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태도를 본 미하일은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무시하곤 방으로 향했다.
“저희도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가씨.”
뒤이어 병사들도 유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미하일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향하는 미하일과 병사들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