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38.
셀 수 없이 많은 제국군이 동시에 움직였다.
변경백의 국경 전체에 진을 쳤다.
루한의 중앙군, 영주들의 지원군 또한 이에 맞서 포진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거대한 대치.
늘 국지전만 있던 변경백에 전면전의 분위기가 흘렀다.
팽팽한 상황이 흐를 때, 최남단 볼카 요새 앞에 암흑군단의 깃발이 나타났다.
암흑대공의 투구도 보였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군단,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
팽팽한 긴장의 축이 무너졌다.
루한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 변경백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후작이 직접 볼카로 향했다.
왕도에서는 병력을 더 보내고 싶지만 당장 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미 국경 전체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부를 빼려 해도 그때마다 국경 전체를 포위한 제국군이 공격을 해 왔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지원군은 구할 수 없는 상황.
적은 병력으로 문라이트 후작은 암흑군단과 암흑대공을 상대해야 했다.
* * *
볼카 요새의 분위기는 패색이 짙은 안개처럼 피었다.
요새에 있는 모두의 얼굴은 병사나 기사 할 것 없이 오랜 굶주림으로 야위어 있었다.
“쿨럭, 큭!”
변경백의 영주이자 루한에서 기사도를 아는 몇 안 되는 남자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후작은 마른기침을 했다. 마른기침을 한 입가에는 피가 묻었다.
루한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
“각하…….”
하지만 후작 주위에 기립한 기사들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을지언정 경악하진 않았다.
“괜찮다. 그 백정놈과 싸워서 내상으로 끝났으면 다행인 거지.”
얼마 전 문라이트 후작은 요새 가까이 모습을 드러냈던 암흑대공과 결투를 벌였다.
싸움은 후작에게 불리했지만 볼카에 똬리를 튼 데몬을 의식한 암흑대공이 크게 날뛰지 않아서 어떻게든 쫓아낼 수 있었다.
“피해 상황은?”
“밤사이…… 마법사 하나와 평기사 열이 당했습니다.”
“병사들 피해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서서히 숨을 조여 오는 것이 아주 악취미야.”
암흑대공과 그의 군단이 볼카 요새를 숨 막힐 정도로 압박했기 때문이다.
놈들도 볼카의 데몬을 의식하는지 대대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시때때로 정예들을 요새로 침투시켜 기사급 이상의 병력을 암살했다.
“놈들의 암살 공격으로 고급 인력이 극도로 부족합니다.”
“마법사와 마녀가 너무 부족합니다. 결계와 방어막만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사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병사들을 지휘할 평기사가 없어서 탈영병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비탄스러운 보고가 이어졌다. 놈들은 영악했다. 아무리 암흑군단이라고 해도 중위급의 기사와 마법사는 암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은 변경백 군대의 허리를 공략했다. 바로 하급 마법사, 마녀와 평기사 들이었다.
“…….”
후작의 짙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고 푸른색 눈동자에는 근심이 서렸다.
“차라리…… 저 데몬이 날뛰어 줬으면 좋겠군.”
문라이트 후작은 다크 서클이 깊게 드리운 눈으로 볼카 요새의 중심부를 응시했다.
볼카 요새의 중심부에는 볼카 광산이라는 깊은 광산이 있었다.
대대로 루한에 귀한 광물을 제공해 주던 곳. 하지만 굴을 너무 깊게 판 나머지 땅속 깊숙한 곳에 있던 고대의 데몬을 깨워 버렸다.
“데몬을 일부러 자극하여 공멸하는 계획은 아직입니다.”
후작의 혼잣말에 후작과 닮은 얼굴에 마찬가지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남자가 말했다.
“나도 안다, 프리드리히. 그건 요새가 무너졌을 때나 행할 것이다.”
변경백의 장남인 프리드리히였다.
“영지에 있을 둘째 알버트가 부럽군요. 세바스에 있을 셋째 아돌프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우리 말괄량이 유리아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리아는 확실히 걱정되는구나. 세바스에 도착했다고 듣긴 했다만. 다만 비자금 수송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마법 통신이라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요.”
“그 애도 알버트처럼 영지에 박아 놨어야 했어. 비자금 수송은 프리드리히 너에게 맡겨야 했는데 말이야…….”
“장담컨대 유리아는 가출했을 겁니다. 저는 그 비자금을 가지고 타국으로 튀었을 거고요.”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저승길 동무로 데려온 거 아니더냐.”
“참으로 영광입니다, 아버지.”
농담이 깃든 장남의 투정에 후작은 모처럼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마지막 마법 통신에서 별동대를 보냈다고 했던가?”
그러다가 이내 표정을 굳히곤 미안하고 자랑스러운 장남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렇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도착해야 합니다.”
“…….”
프리드리히의 대답에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론 그들을 보내 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당장 볼카를 구원할 지원군도 별동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별동대에 그 망명 황족이 합류했다고 아돌프가 전했습니다. 그 있잖습니까? 저번에 왕도에서 누누이 강조하던 방랑 기사 말입니다. 소문에 따르면 실력이 아주 대단하다더군요.”
침울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생각나는 그나마 밝은 소식들을 애써 말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왕도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마법 통신이었다.
로안 샬루트라는 망명 황족을 보낼 것인데, 그는 실력이 매우 뛰어난 기사로 그에게 되도록 많은 지원과 자율권을 주라는 지시였다.
“흥, 황족들이 아무리 다재다능하다지만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방랑 기사 하나가 도움이 되어 봤자지.”
암흑대공 정도면 모르겠지만, 그런 존재가 루한에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사령술사 이자벨을 척살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도적단을 단신으로 몰살시켰다고 하던데요?”
“원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정작 이 통신을 들은 문라이트 후작은 코웃음을 칠 뿐이다. 기사도 정신으로 여왕과의 의리는 지킬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 달랑 망명 황족 하나 보내 준다는 사실에 강한 서운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부자간에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눌 때였다.
땡- 땡- 땡- 땡.
갑자기 적의 침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새를 울렸다.
데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리는 작은 편이다. 대신 요새의 망루 곳곳에 붉은빛이 발광했다.
“변경백 각하! 못해도 500 이상의 정예병이 요새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한 병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적 지휘관이 누구지? 암흑대공이 나타났나?”
“암흑대공은 안 보입니다. 하지만…… 암흑군단의 돌격대장인 헌스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병사의 말에 지크문트 주위에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이번에 아주 제대로 힘을 빼놓을 작정인 모양입니다.”
“암흑대공은 최대한 힘을 아꼈다가 데몬을 상대할 생각인가 보군.”
암흑대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지만, 그의 행동대장이자 군단의 돌격대장인 헌스터가 나타났다는 것은 호랑이 대신 늑대를 마주한 꼴이다.
“끄응…… 다들 뭣들 하나! 전투 배치!”
문라이트 후작은 신음을 흘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그런 후작을 프리드리히가 만류한다. 내상은 요양이 필수인 부상이다. 이를 무시했다간 다신 검을 들지 못하는 폐인이 된다.
“너희들만으로 군단의 검은전차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냐?”
후작의 말에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떨궜다.
요새의 성벽은 고요한 긴장으로 가득 찼다.
저벅, 저벅, 저벅.
저 앞, 저 아래에 흑색 중갑으로 완전무장한 500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 병사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평기사와 전투력이 맞먹는다는 정예병 중의 정예.
“…….”
“…….”
이를 보는 변경백의 병사들도, 전진하는 암흑군단의 정예병들도, 어떤 고함도, 어떤 함성도 지르지 않았다.
후욱, 후욱, 후욱.
그저 긴장 가득한 숨을 몰아쉴 뿐이다.
흐으으윽, 흐윽.
변경백의 어린 병사 중 몇이 두려움에 흐느끼는 중이다.
몇몇은 바지에 오줌까지 지리고 있었다.
그들은 요 근래 암흑군단이 해 온 짓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어제까지 자신들을 지휘했던 기사님의 잘린 머리가 병영 앞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그림자도 보기 힘들던 마법사들의 찢어진 몸이 병영 곳곳에 뿌려져 있는 것도 충격이었다.
사기는 바닥을 뚫고 지하에 처박혀 있었고, 매일매일 자살자와 탈영병이 수십씩 발생했다. 이렇게 성벽까지 창을 들고나온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볼 수 있었다.
“쏴라!”
나이 많은 부사관이 푸르게 질린 얼굴로 사격을 명했다. 원래라면 현장 지휘는 평기사가 해야 했지만, 기사의 수가 부족하여 임시로 부사관이 지휘하는 상황.
파바바바밧.
부사관의 지시에, 성벽에 있던 석궁병들이 적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피비비빗.
하지만 석궁병들이 쏜 볼트는 군단병의 코앞에서 투명한 막에 막혀 버렸다.
진군하는 적들 사이사이에 제국의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는 모양.
파바바바밧.
제국 쪽에서도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석궁을 쏜 변경백과 달리, 마법 전력이 풍부한 그들은 화염구와 얼음창과 같은 공격 마법을 성벽에 퍼부었다.
파앙, 파앙, 파앙.
석궁 때와 비슷하게 성벽에 쳐진 방어막 결계 덕분에 제국군의 마법 공격은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타앗, 타앗, 타앗.
암흑군단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 중의 정예들이 맨몸으로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올라온다! 성벽에 인챈트한 전격 마법을……!”
성벽에 거미처럼 붙은 제국군을 본 변경백의 마법사가 외쳤으나.
퍼엉.
그 외침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마법사의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히이익!”
마법사를 호위하던 기사가 갑자기 터진 마법사의 머리를 보곤 비명을 질렀다. 마법사의 머리는 반쯤 터져 있었는데 터진 부위에는 큼지막한 손도끼가 박혀 있었다.
손도끼를 발견한 기사는 뒤늦게 마법사를 공격한 원흉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다.”
원흉의 목소리는 성벽이 아닌 하늘에서 들렸다.
푸촤아악.
기사가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기 무섭게, 어른 몸통만 한 거대한 워 해머가 기사를 짓눌렀다.
기사는 마치 프레스기에 깔린 것과 같은 시체가 되었다.
“크흐흐흐흐.”
쿠웅!
망루에 무겁게 착륙한 남자는 포악한 웃음을 흘렸다.
2미터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체구. 육중한 중갑까지 입으니 사람이 아닌 몬스터처럼 보였다. 저런 거대하고 무거운 몸으로 어떻게 성벽까지 점프했는지 미스터리할 정도.
“암흑군단의 검은전차 헌스터께서 왔는가?”
그런 남자를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했다.
“직접 마중 나와 주시다니 영광이구려, 문라이트 후작!”
“그래, 무식한 건 여전하군, 헌스터.”
문라이트는 어두운 얼굴로 암흑군단의 돌격대장인 헌스터를 향해 검을 겨눴다.
‘으음…… 좋지 않아.’
그의 속은 그의 표정만큼이나 좋지 못했다. 아직 내상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
“흐흐흐흐, 후작 각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우드득, 우드득.
헌스터는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검은색 중갑으로 얼굴부터 전신이 가려 표정은 보지 못했다.
“걱정 마라. 네놈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으니.”
문라이트 후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전황을 보았다. 그의 장남 프리드리히부터 고위 기사들까지 모두가 성벽 위로 올라오는 적들을 막아 내기 바빴다.
그나마 자신이 이렇게 헌스터를 상대하고 있어서 버티는 것이다.
“빨리 끝내자.”
문라이트 후작은 자신의 검에 오러를 불어 넣으며 무겁게 말했다. 마나를 운용할 때마다 내장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그러지. 나도 대공으로부터 이번엔 봐주지 말라는 명령을 들어서 말이오. 후작 같은 사람을 이런 상태로 죽이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오.”
사방은 전투 중임에도 조용하다. 조용하면서도 참담했다. 제국군은 도대체 어떤 훈련을 한 것인지 죽으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인간미 하나 없는 저들의 모습은 더욱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으으으, 아악! 어머니!
간간이 비명과 절망을 내뱉는 쪽은 오직 변경백의 병사와 기사뿐이다.
‘그래, 차라리 저 비명 소릴 듣고 데몬이나 깨어나라.’
후작은 한숨을 깊게 내쉬곤 헌스터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타앗!
하늘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쑥 하고 내려오더니, 문라이트 후작과 헌스터 사이를 가로막았다.
뒷모습만 봐서 자세히 모르겠지만 금발에 키가 크고 날렵하고 탄탄한 체형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
후작은 앞을 막은 남자를 보곤 달려들려던 검을 멈칫했다.
‘별동대인가!?’
문득 아까 프리드리히가 말한 별동대가 떠올랐다.
‘하지만 복장이 무슨……!’
그렇지만 찬란한 금발이 인상적인 남자의 복장은 전투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견갑 정도만 차려입었고 한 손에는 그래도 명검으로 보이는 검을 든 상태다.
그가 허리춤에 맨 푸른색 검에 눈이 갔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자세히 볼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이보게! 젊은이! 당장 물러나게!”
문라이트 후작은 별동대로 추정되는 남자를 향해 진심 어린 충고를 전하려고 했다.
“저놈은 자네가 상대할……. 어?!”
하지만 그의 충고는 이어지지 못했다.
솔라시우스는 볼카 요새에서 가장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로 착지했다.
‘강하군.’
솔라는 눈앞의 거대한 제국군 기사를 관찰했다. 놈이 손에 든 사람 몸통만 한 워 해머는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것 같았다.
‘암흑군단의 고위 간부군. 무장을 보니 돌격대장 헌스터인가?’
게임에서 본 기억이 났다. 나름 네임드였지.
흐읍!
헌스터를 확인한 솔라시우스는 어떤 고민도 없이 온몸의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냈다.
그의 검에서 이세계에서 오러라고 부르는 광휘가 빛나기 시작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전신이 광휘에 물들었다.
궁극기, 태양의 후예가 순식간에 발동됐다.
오리지널보단 못하지만 그렇다고 약하다고 볼 순 없는 필살기.
쏴아아악!
솔라시우스는 태양의 후예와 태양검을 발동하여 눈앞의 헌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헌스터는 갑자기 나타난 솔라시우스가 순식간에 엄청난 오러를 몸에 두르자 깜짝 놀랐다.
서거거걱!
강렬하고 빠른 기습 필살기.
솔라의 오러가 듬뿍 담긴 검이 광휘를 흘리며 궤적을 만들었고, 암흑군단의 돌격대장 헌스터는 방어도 제대로 못 하고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