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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39화 (39/212)

제39화

#39.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이런저런 잡담 같은 거 하지 않고, 약한 기술부터 차근차근 쓰면서 분량 잡아먹지 않고, 시작부터 기습하듯 필살기를 써서 죽이는 것.

클리셰 비틀기란 이런 게 아닐까?

솔라시우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

오랜만에 태양의 후예와 태양검을 힘껏 쓴 솔라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일으켰던 이능을 해제했다

‘무한하진 않나 보군.’

마검 루시에 깃든 냉기가 옅어지는 것을 잠깐이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능을 해제하니 냉기가 느리지만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쯧.

‘이래선 태양샘 반지를 얻어 봤자…….’

혀를 찬 솔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고 전세는 바뀌었다.

공격하는 쪽이었고 심지어 방어자보다 숫자도 적었음에도 충분히 상대를 압도했던 암흑군단의 최정예가 멈칫했다.

“……!”

칼과 창, 도끼를 휘두르던 흑색 중갑의 정예병들이 금발, 금안의 남자를 훔쳐본다.

감정을 거세당했음에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는지, 저들의 탁한 눈동자에 동요가 서렸다.

“암흑군단 돌격대장 헌스터가 전사했다!”

“적장이 죽었다! 적장이 죽었다! 다들 힘을 내라!”

“지원군! 지원군이 왔다!”

변경백의 기사들이 간만에 고함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이어서 크지 않은 함성이 일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고대의 데몬 때문에 가슴 깊이 함성을 못 내지르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

“후퇴, 후퇴한다!”

암흑군단의 최정예는 감정을 거세당한 것이지 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너도나도 성벽에서 물러났다.

엄청난 피해를 각오했던, 어쩌면 최후의 전투가 될지 몰랐던 상황이 깔끔한 승리로 끝나자 모두가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혹시…… 그대가 로안 샬루트요?”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후작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앞의 방랑 기사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변경백.”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족이지만 몰락했다. 반면, 상대는 일국의 최고위 귀족. 나이도 많고 심지어 소드 마스터다. 여왕 루시푸르네도 변경백과는 서로 존대를 한다. 영애에 불과한 유리아 때와는 달리, 변경백에게는 존칭을 사용해야 될 것 같았다.

‘제때 왔군.’

이들의 얼굴을 보니 말단 병사부터 후작까지 피로와 배고픔이 가득해 보였다. 며칠만 늦었어도 함락되었을 터.

“그대가 별동대에 합류했다는 보고는 아돌프에게 마법 통신으로 들었소.”

“별동대는 곧 도착할 겁니다. 전황이 급박한 거 같아 나 홀로 먼저 왔습니다.”

히이잉~.

솔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덩치에 사나운 갈퀴가 인상적인 흑마가 솔라의 뒤에 섰다.

“좋은 말이군. 로안 경의 말이오?”

“이름은 맨해튼카페입니다.”

“특이한 이름이로군.”

금발, 금안의 황족과 푸른 눈의 변경백은 서로를 탐색했다.

‘이자가 로안 샬루트……!’

‘이 아저씨가 문라이트 후작……. 일러스트와 똑같이 생겼군.’

전투가 끝났다. 아직 어수선했지만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성벽에는 설원의 징벌을 받아 얼음 동상이 되어 버린 제국군 몇이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다섯 정도.

그래도 설원의 가호가 사실상 없다시피 한 볼카에서 설원의 징벌이 내리다니. 참으로 이례적이다.

변경백 쪽에서는 설원의 징벌을 받은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본래 부정한 살육에 반응하기 때문에 방어자 입장에서는 유리할 수밖에 없다.

“…….”

“…….”

솔라와 문라이트, 두 사람은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말없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병사들, 기사들, 마법사들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훔쳐본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침묵의 어색함에 문라이트가 결국 질문을 이었다.

“스물하나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오러라니. 참으로 대단하구려! 빛으로 전신을 물들일 정도의 오러는 나도 자신 없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그나저나 내 딸이랑 동갑이구려. 듣자 하니 딸아이가 경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들었소.”

“할 일을 했을 뿐.”

“요즘은 자신이 할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당장 나도 그렇고.”

솔라의 나이를 들은 변경백은 자연스레 동갑인 딸내미가 떠올랐다. 전부터 자신은 검과 결혼했다니 뭐니 하면서 독신을 선언했던 철부지 딸이.

‘사위로 삼으면 참 좋을 텐데…….’

문라이트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곤 흠칫 놀랐다.

오늘 처음 본 남자다. 얼굴을 본 지 몇 분도 안 됐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하는 남자가 신기했다.

‘그나저나 저 푸른색 검은……?’

이어서 후작은 솔라가 허리춤에 찬 푸른색 검에 시선이 갔다.

전투용보다는 보검에 가까웠는데 마석이 박힌 것을 보니 마검 같았다.

‘저 검…… 어디서 본 기억이……?’

후작은 이제는 대놓고 솔라의 허리춤을 집중해서 응시했고, 솔라는 후작이 무엇을 보는지 눈치챘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루시는 아직 자나? 검에 서렸던 냉기가 감소한 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는 후작의 유심한 시선을 받아 내면서 마검 루시를 쓰다듬었다.

“그 푸른색 마검…… 혹시 어디서 나셨소?”

그렇게 루시를 쓰다듬고 있는데, 문라이트 후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루시 말이군요.”

“루……루, 루시?!”

솔라의 대답에 처음으로 후작이 말을 더듬었다.

마검의 이름치곤 어울리지 않는 이름.

‘루시라면…… 평범한 이름이긴 하지만, 현 여왕 폐하의 애칭이기도 하다. 잠깐…… 저 마검이 설마?!’

솔라가 말한 마검의 이름 때문인지 문라이트 후작은 저 마검의 정체를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국서의 검 윈테이라!! 어째서 저게 저자에게?!’

후작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으로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검의 이름이 루시요?”

“그렇습니다. 제가 지었습니다.”

“지었다고? 본래 이름은 없었소?”

“갑작스레 선물받은 거라.”

“어디서?!”

후작의 이어지는 질문에 솔라는 말없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킨다.

‘맙소사!’

진짜 하늘에서 받은 거지만 후작은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

“그……그렇군.”

그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저 검은 분명 윈테이라가 맞았다. 소문에 따르면 여왕 폐하가 저 망명 황족에게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여왕이 전례를 깨고 국서의 검을 눈앞의 기사에게 준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몰래!

‘섭정이 복권한 데에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군.’

후작은 루카스 대공의 복권을 떠올렸다.

“어찌 되었든…… 도와줘서 고맙소, 로안 경, 그대의 충성과 무용에 과인은 경의를 표하오. 그대에게 변경백에서 줄 수 있는 모든 지원과 자율권을 보장하겠소!”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변경백 영애를 구해 주고 비자금을 지켜 준 것도 모자라 별동대에 자원하여 적시에 와 준 것만으로 그대는 변경백의 귀빈이자 은인이오. 신께서 폐하와 루한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문라이트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독이며 솔라시우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참으로 아깝군.’

황족이고 나발이고 정말로 마음에 드는 젊은이였다. 저 정도 남자라면 유리아도 분명 마음이 있을 텐데…….

‘그렇다면, 폐하께선 설원의 저주를 해주할 방법을 찾은 건가? 저렇게 대놓고 침을 발라 놓은 걸 보면 결혼할 의지가 분명하시다는 건데…….’

이러면 안 되지만 여왕을 향한 서운함이 드는 후작이었다.

솔라가 볼카에 도착하고서 30분 정도 지났을까? 별동대가 볼카 요새의 후문으로 입장했다.

“후작 각하! 프리츠 오라버니!”

분홍 머리, 분홍 눈동자를 한 여기사가 제일 선두에 섰다.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그런 막내딸을 본 문라이트가 입을 삐쭉 내밀면서 한소리 했고.

“유리아! 더 예뻐졌구나! 비자금 수송하다 큰일을 치를 뻔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으냐?”

문라이트 후작의 오른쪽에서 서 있던 프리드리히가 반가움의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반겼다.

“아, 아버지! 오라버니! 저는 괜찮습니다.”

유리아 또한 눈시울을 붉히며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바라봤다.

못 본 사이 눈에 띄게 야윈 모습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 로안 경, 요새에 들어오면서 들었습니다. 악명 높은 암흑군단의 돌격대장을 일격에 척살했다고.”

이어서 그녀는 아버지 왼쪽에 서 있던 금발, 금안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라를 보는 유리아의 눈에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겼다.

“놈이 방심해서 그럴 수 있었소. 운이 좋았지.”

솔라시우스는 유리아의 질문에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기습 또한 실력입니다. 다시 한번 경에게 변경백이 빚을 졌습니다.”

솔라를 바라보는 유리아의 분홍색 눈동자에 빛이 서렸다. 양 볼은 상기되어 옅게 붉어져 있었다.

‘내 동생 유리아가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어! 하지만 문제는…….’

‘확실히 남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내 딸이 저런 감정을 보이다니. 하아…… 참으로 안타깝구나! 나중에 이 사실을 어찌 말해야 할지…….’

‘혼기가 좀 지났긴 하지만 유리아는 아직 젊어, 이제야 남자에게 관심을 가졌으니 가능성은 열린 셈이지. 문제는 로안 경 같은 남자가 더 존재하냐는 건데…….’

‘변경백에 무투 대회라도 열어서 사윗감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 딸이자 동생을 보는 아버지와 오빠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아, 그리고! 이쪽은 리나 샬루트입니다. 로안 경의 여동생이기도 합니다.”

그때, 유리아가 두 사람에게 누군가를 소개했다. 그녀의 뒤에서 작은 체구에 딱 봐도 어려 보이는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아의 혼사에 정신이 팔려 있던 후작과 프리드리히는 이제야 동생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렸다.

작은 체구의 흑발, 흑안의 어린 마녀가 보였다. 여타 마녀들처럼 빗자루를 타고 공중에 떠 있었는데,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유리아와 그녀가 탄 말에 가려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어린 마녀가 전장에 있는 것은 위험한데……. 잠깐! 리나 샬루트……? 유리아, 저 마녀 아가씨가 누구 동생이라고?!”

루나의 인사를 받은 프리드리히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놀랐다.

“로안 경의 여동생이라고요, 오.라.버.니.”

첫째 오라버니의 모습에 눈을 찌푸린 유리아가 천천히 강한 어조로 답했다.

“아아…… 들은 적 있지. 로안 경에게 의동생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

프리드리히는 그제야 로안과 관련된 소문을 기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문라이트 후작은 진지한 눈으로 흑발, 흑안의 어린 마녀를 관찰했다.

‘저 마녀…… 보통이 아니군.’

의동생이라고 해도 과연 로안 샬루트가 아무 이유 없이 동생으로 삼은 게 아닌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로안 샬루트의 동생이자, 마도의 길을 걷고 있는 위치, 리나 샬루트라고 합니다.”

루나가 기다렸다는 듯 빗자루에 내려 인사를 했다.

“루한의 방패이자 검, 변경백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변경백의 정당한 후계자이신 프리드리히 공자님 또한 직접 뵙게 되어 기쁩니다, 호호호호호!”

평소와 확연히 다른 모습. 어색하지만 예법에 맞춰 귀족가 레이디처럼 인사를 하는 것이, 지켜보는 유리아와 솔라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선함과 충격을 뒤로하고.

“리나,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이 언니가 최대한 도와줄게! 로안 경도 마찬가집니다. 비록 전장이지만 문라이트는 친구와 은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유리아는 아버지와 첫째 오라버니를 만나서 그런지 들떠 있었다.

“응! 유리아 언니만 믿을게! 언니도 시킬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돈 드는 거 아니면 어지간하면 들어줄게.”

루나는 그런 유리아의 기분에 최대한 웃으면서 호응해 줬다.

‘유리아가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또래 여자는 처음인데…….’

‘로안 경도 그렇고 동생인 리나 양도 그렇고, 유리아가 참으로 좋은 인연을 얻었구나. 하아…… 너무 아깝군.’

친한 친구, 혹은 사이좋은 자매처럼 보이는 유리아와 루나를 보는 둘의 시선이 다시 한번 복잡해졌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딸아. 리나 샬루트 양도 볼카에 온 것을 환영하오. 자세한 얘기는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하도록 하지.”

후작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곤 두 여자에게 말했다.

“마법 통신이라서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유리아야, 식사하면서 배신자 미하일과 너를 습격한 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다오.”

장남 프리드리히가 옆에서 후작의 말을 거들었다.

“물론이에요! 프리츠 오라버니. 리나, 날 따라와. 로안 경,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경이 먼저 출발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컸을 겁니다.”

요새의 본채 입구에 서 있던 다섯 사람은 이윽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까악, 까악.

회색 까마귀가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건물로 들어가는 그들을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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