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42.
기다란 창을 앞으로 치켜든 보병진과 돌진하는 기병의 싸움은 예로부터 딜레마다.
말은 겁이 많아 보병이 장창으로 벽을 치면 주춤한다.
마찬가지로 기병의 거대한 돌진 앞에서 떨지 않을 보병도 없다.
기병과 보병의 대결은 티끌의 싸움이다.
양쪽 중 훈련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은 쪽, 분노와 믿음이 충만한 쪽이 이기는 법이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기병이 보병을 압살했다.
기병은 기본적으로 훈련을 많이 받으며, 승리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포를 거세당한 암흑군단이라면 어떻게 될까? 심지어 고위계 마녀가 돌진하는 기사와 기병들에게 각종 정신 공격을 가한다면?
결과는 눈앞에 처참하게 무너진 인마의 파편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과정부터 결과까지 목도한 이들은 당연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으로 공포와 공황을 주입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돼 버렸다.
“돌격 준비.”
솔라시우스는 뒤를 돌아 명령했다.
“……!”
“…….”
그의 지시에 모두가 말없이 주춤한다. 일부는 몸을 잘게 떨었다.
“궁병이나 마법사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대로 차징하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집니다.”
몇몇은 대놓고 항명하려는 투다.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군.’
단순히 살기와 카리스마로 차징을 유도하기엔 무리가 있다.
“…….”
그는 저 앞의 보병진을 보았다. 보병진 뒤에 있는 마법사들도 고려했다. 혼자서 돌격하면 어찌어찌 잡을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보병과 마법사 들이 자신의 발을 묶는 동안 공성 마법이 완성되면 다 끝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아끼는 말이 다치거나 죽으면 참으로 슬플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화아아앗!
결국 솔라는 두려움에 떠는 기사들 앞에서 광휘를 발현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치켜든 검 끝에서 등불 같은 빛이 등대처럼 빛났다.
그의 태양 이능 중 하나인 ‘새벽의 등불’이다.
오리지널의 밝기보단 약했지만, 이 정도 인원을 휘감는 데엔 문제없었다.
“너희는 겁쟁이의 검인가, 여왕 폐하의 검인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솔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진에 높은 위계의 마법사가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나를 믿어라. 나는 너희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
“……!”
“?!”
그의 목소리에 방금까지 두려움에 떨던 기사와 기병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를 믿어라. 내 뒤를 따른다면 너희는 어떤 저주도, 방해도 받지 않고 명예롭게 돌격할 것이다.”
“!!”
괜히 용기가 샘솟았고 이상하게 승리할 것만 같았다. 얼굴 보고 대화 나눈 지 몇 분도 안 된 남자지만, 그의 뒤를 따르면 승리할 것만 같았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확인한 솔라시우스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그리고 지구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어느 섬나라의 구호를 흉내 내서 외쳤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솔라가 말한 구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두가 홀린 듯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오직 내 등만 보며 달려라!”
솔라가 여전히 새벽의 등불을 유지하며 박차를 가했고, 그가 탄 검은색 말 맨해튼카페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어찌나 빠른지 5미터 정도 앞서 달렸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뒤이어 기사들과 기병들이 여왕의 안녕을 외치며 솔라의 뒤를 쫓았다.
광휘를 쫓는 100여 명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서렸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자신 있었다.
저 앞에 루한의 빛나는 검이 보인다.
그에게서 흐르는 광휘가 자신들을 감싸 안았다. 힘과 용기가 미친 듯이 솟았다.
“광휘의 기사!”
질주하던 중 누군가가 솔라를 보며 외쳤다. 전에 유리아가 문득 외쳤던 것과 똑같은 칭호. 사람 눈은 전부 거기서 거기인 모양.
“광휘의 기사!”
뒤따르던 모두가 앞으로 영원토록 불리게 될 로안 샬루트의 칭호를 외쳤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광휘의 기사!”
여왕의 안녕을 기원하는 외침과 새로운 전설을 찬양하는 외침이 전장을 덮었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광휘의 기사!”
그 외침은 어쩌다 볼카 요새까지 들렸는지, 요새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이들까지 광휘의 기사를 외쳤다.
아리아 데스모는 두 번째 돌격을 감행하는 이들을 보며 비웃다가 어느새 표정을 굳혔다.
광휘의 물결, 무엇보다 허리에 꽁꽁 묶인 푸른색 마검.
“솔라시우스?!”
보병대가 시야를 가리는 바람에 이제야 알게 되었다.
곧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저건 도대체……? 흐응~?”
그의 이능 중 하나인 ‘새벽의 등불’을 처음 본 아리아는 마법사답게 호기심부터 일었다.
“어서 오세요~. 1황자 전하, 부디 뒤지지 마시길! 당신의 능력이 저는 참으로 궁금하답니다.”
이윽고 평소 그녀의 텐션대로 차갑게 웃으며 마법을 준비했다.
“그나저나~ 차징을 하는 주제에 무장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요? 정말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가벼운 리넨 튜닉에 견갑이 전부인 솔라의 모습은 아리아에게 우습기 그지없었다.
‘전장으로 발걸음한 보람이 있네.’
루한의 재상이자 악황후의 최측근인 그녀가 굳이 이렇게 전투에 참전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간만에 피 냄새를 맡아 보고 싶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저기 달려오는 남자, 솔라시우스였다. 멀찍이서 바라본 그의 힘을 가까이서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이번 돌격만 막으면 볼카는 끝장이군.’
뒤에서는 10명의 마법사, 마녀들이 공성 마법을 막 완성한 모양이다. 공성 마법진이 크게 빛나면서 맹렬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미끄러지거나, 파인 땅에 걸려 넘어지거나, 잠들거나, 공포에 떨거나, 공황에 미칠지어다.”
아리아는 아까와 똑같이, 똑같은 마법을 준비했다.
자, 받아라! 이 학습 능력 하나 없는 멍청한 놈들아! 대초원의 오크들이 네놈들보단 똑똑할 것이다.
설원의 징벌은 걱정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는 볼카 요새 바깥. 설원의 가호는 옅은 것을 넘어서 미치지도 못한다.
“……?”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제일 선두에 선 솔라시우스부터 무너졌어야 했다. 잠을 자든, 미끄러지든, 공포에 대열을 이탈하든 뭐든 간에.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솔라시우스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기사단과 기병들까지, 오히려 더욱 가속이 붙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저 앞에서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를 찬양하는 외침이 들렸다.
동시에 눈부신 빛이 솔라에게서 터져 나왔다.
감정을 거세당한 암흑군단의 보병들이 엄청나게 밝은 빛 때문에 눈을 감거나 겨눴던 창을 움직였다. 지구식 표현으로 ‘눈뽕’에 당한 것이다.
“광휘의 기사!”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사들의 외침은 더욱 명확하고 강렬했다.
화르르륵.
이제는 사방이 매우 뜨겁게 느껴졌다.
“끄윽……! 뜨, 뜨거워!”
“몸이, 몸이 불타고 있어!”
“물 마법을, 냉기 마법을!”
뜨겁게 느껴지는 게 아닌 실제로 뜨거워졌다.
솔라시우스의 또 다른 태양 이능, 광역 스킬 ‘열사의 필드’가 펼쳐진 것이다.
공성 마법을 완성해 가던 마법사들이 당황해 집중이 흐트러졌고, 암흑군단의 병사들도 뜨거운 열기와 몸에 붙은 불 때문에 전열이 크게 무너졌다.
쏴아아악, 퍼엉!
이어서 솔라시우스가 검을 휘둘러 뭔가를 쏘아 댔다.
그가 검을 휘둘러 쏘아 낸 빛 덩어리들이 암흑군단 병사들을 꿰뚫는 것도 모자라 중심부에 있던 마법사들까지 죽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아리아 데스모는 코앞에서 목도한 솔라시우스의 힘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퍼버버버벅-!!
이윽고 솔라시우스가 제일 먼저 보병들과 접촉했다.
그의 차징은 여타 차징과 달랐다. 창도 아닌 검을 들었음에도 앞을 막던 보병들이 십 수 미터 하늘 위로 튕겨져 나갔다.
아무리 전열이 흩어졌다고 해도 창이 아닌 검으로 이게 가능한가?
‘시, 실드?!’
자세히 보니 그가 탄 검은색 말 바로 앞에 은은한 태양 빛을 내는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콰지지지직, 퍼억, 퍽, 콰아앙!
광휘의 기사는 빛의 실드를 탱크처럼 앞세웠고, 광휘의 물결이 흑색 방진을 덮쳤다.
솔라시우스는 실드로 제국군을 밀면서 방진의 중심부를 보았다.
수 명의 제국 마법사와 마녀가 열사의 필드에 괴로워하는 중이다.
‘저 회색 마녀인가?’
그는 시선을 돌려 유독 넓은 챙으로 얼굴을 가린 회색 마녀를 보았다.
열사의 필드 속에서 그나마 평정을 유지 중인 마녀. 아마도 저 회색 마녀가 이번 임무의 지휘관일 터.
그는 재빨리 접근해 검으로 그 마녀를 베었다.
“꺄아아아악!”
회색 마녀는 비명과 함께 쓰러졌지만.
“……?!”
솔라는 이상함을 느끼곤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방금 분명 검으로 베었는데, 목숨을 취한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본 그의 시야에는 무릎을 꿇은 회색 마녀가 보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재처럼 변하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못 죽였군.’
느낌으로 확신했다. 저 재로 변하는 마녀는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저 검을 휘둘렀다.
짧지만 강렬한 전투가 끝나고, 차징에 임했던 기사와 기병 모두가 멍한 눈을 했다.
멍했던 그들의 눈은 이내 몽롱하게 변했고.
“광휘의 기사.”
“광휘의 기사.”
자신들에게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을 안겨 준 이에게 검을 들어 최고의 예를 표했다.
“오라버니~!”
멀리서 솔라의 여동생인 리나 샬루트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 * *
‘다만 그는 빛이로소이다.’
잃어버렸던 현실감이 돌아온다.
“이건 방랑 기사가 아니라 성기사나 팔라딘이라고 불러야겠어, 허허허허…….”
성채에서 이 전투를 지켜보던 문라이트 후작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허허, 웃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알게 모르게 떨렸다.
그는 자연스레 옆에 서 있는 딸을 보았다.
“…….”
딸은 아까부터 몽롱한 분홍 눈으로 광휘의 기사라는 칭호가 붙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수록 후작은 안타까웠고 가슴이 아팠다. 다시금 왕궁에 계실 여왕 폐하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지금 말하자.’
문득 후작은 생각했다. 딸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내 딸 유리아야.”
그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유리아를 불렀다.
“예, 후작 각하.”
공식적인 자리다 보니 그녀는 지크문트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혹시 로안 경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냐?”
그런 딸에게 후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그……그…… 무슨!”
평소라면 아니라고 단번에 대답했을 딸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하아…… 확실하군.’
문라이트 후작은 차마 딸아이를 보지 못하고 저 멀리 시선을 두고서 말을 이었다.
“만약 로안 경에게 마음이 있다면 접도록 하거라.”
“……아니, 아닙니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어…… 예?!”
유리아는 아버지의 말을 좀 뒤늦게야 인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도 결혼에 대해 은근히 눈치를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마음을 접으라는 말이 나오자, 유리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는 임자가 있는 사람이다.”
“!!”
아버지이자 변경백인 문라이트 후작의 시선은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솔라시우스는 자신의 여동생 리나 샬루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후작의 시선은 유독 그가 허리에 찬 푸른색 마검을 담았다.
“그, 그런…… 하하하.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후작 각하. 애초에 존경에 가까웠던 감정입니다. 사,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농담이 전혀 아닌 것 같은 아버지의 분위기에 유리아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 그런데…… 로……로안 경에게 여인이 있다니요? 혹시 그의 의동생 리나 샬루트를 말하는 것입니까?”
유리아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물었고.
“아니, 전혀 다른 사람이야.”
후작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처음 듣습니다. 그에게 여인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제가 그의 동생 리나 샬루트와 친함에도 한 번도 그런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유리아는 반쯤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리나 샬루트는 로안 경의 의동생이지 않느냐? 그 아이도 모를 수 있다.”
“……아버지는 그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 이상은 알려 하지 말거라. 그냥 로안 경에게는 약혼자에 가까운 여자가 있다는 사실만 알아 둬라.”
문라이트 후작은 깊게 한숨 쉬면서 대답을 피했다.
저 푸른색 마검과 여왕에 대해서 얘기를 해 줘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관뒀다.
여왕과 자신의 딸이 연적이 되는 것은 최대한 피하거나 늦추고 싶었다.
“저, 저는…… 상관없습니다. 늘 말했다시피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로안 경은 분명 훌륭한 기사지만 그뿐입니다. 그, 그래도 그와 이어질 여자는 참으로 행복하겠군요…….”
유리아는 이제 어색하게나마 웃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