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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43화 (43/212)

제43화

#43.

유리아 폰 문라이트, 그녀는 자신이 또래와 다르다는 것은 초경을 막 시작했을 즈음에 알았다.

일단 분홍 머리와 분홍 눈동자부터가 가족들과 달랐다.

오라버니들도, 아버지도, 그리고 어머니도 분홍색 머리나 눈동자는 없었으니.

물론 분홍 머리와 눈동자는 봄의 축복이었고, 좋으면 좋았지 나쁜 건 아니었다. 유리아 또한 감기 한 번 안 걸리게 해 준 자신의 분홍색 머리와 눈동자를 좋아했다.

아주 희귀하지만 그녀와 같은 사례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기에 따돌림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예쁨받고 부러움을 샀다.

즉, 머리와 눈 색 때문에 자신이 또래와 다르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가 다르다고 깨달은 것은 바로 생각의 차이였다.

유리아도 어릴 적 다른 가문의 또래 여식들과 어울렸었다.

그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디 기사단의 누가 멋지다더라, 어느 가문의 누가 그렇게 잘생겼다더라’와 같은 대화를 나눴다.

유리아는 그 대화에 어떤 재미도, 공감도 느끼지 못했었다.

자신이 또래와 다르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이상하게도 두려웠다.

여타 귀족가의 여자들처럼 10대 중후반에 적당한 가문의 남자를 만나 정략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이

10대 초반부터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를 상상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또래 영애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유리아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후대를 낳고 기르는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그런 삶이 매우 답답할 것 같았다.

유리아는 자신의 가문과 가문의 터전인 문라이트 변경백을 사랑했고, 그 변경백에서 삶을 이어 가는 백성들도 사랑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변경백에 기여하고 싶었다.

어차피 후대야 오라버니들이 잘 이을 것이다. 다들 일찍부터 약혼하고 결혼까지 했으니까.

유리아가 15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약혼과 관련된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던 그녀는 방법을 찾았다.

듣기론 마녀들은 귀족 출신임에도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자식을 낳지 않고 고아를 제자로 받아 기른다고 했다.

만약 그 마녀의 가문에서 뭐라 한다면 마녀회에서 이를 보호해 준다고 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은 유리아는 마녀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유리아에겐 마법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뒤이어 찾은 것이 바로 검이었다. 여기사가 되면 결혼을 20대 중반까지 늦출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대대로 기사 가문이라서 그럴까? 여기사가 되겠다는 유리아를 아버지 지크문트는 크게 막지 않았다.

오라버니들도 오히려 그녀에게 서로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다퉜을 정도다. 오직 그녀의 어머니만이 크게 화를 냈었다.

검을 들었지만, 유리아는 검에도 큰 재능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마법처럼 전혀 못 하지는 않았다.

가문의 지원과 피나는 노력 끝에 간신히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를 수는 있었다.

20살이 되었다. 슬슬 다시 유리아의 혼담과 관련된 얘기가 돌려고 했다.

유리아는 굳게 결심하고서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자신은 검과 결혼했다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변경백을 위해 살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엄청난 용기를 낸 독신 선언.

어머니는 졸도하려 들었지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그런 유리아를 귀여워했다.

다들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20대 중반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그저 철부지 딸내미의 반항 정도로 보는 모양.

그래도 검과 결혼하겠다는 선언 때문인지, 다시금 오갔던 혼담이 쑥 들어간 것은 다행이었다.

유리아는 여기사의 삶을 만족했다. 아이를 낳고 남편의 가문에 종속되는 여자가 아닌, 한 명의 기사가 되어 가문과 변경백에 기여 하는 삶이 보람차고 좋았다.

종종 영지를 돌면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찬양을 받을 때면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났다.

그녀는 어느새 기사도라는 가치에 따라 살았다.

결혼 같은 건 생각도 들지 않았고, 평생 이런 삶을 살고 싶었다.

주위에 젊고 잘난 기사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어떤 남자도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일한 여기사인 자신을 음탕한 눈으로 힐끔 보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기사도와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그들은 기사라고 하면서 뒤에서는 매춘이나 도박, 갈취 등 명예롭지 않은 짓을 했다. 호감은커녕 싫기만 했다.

오직 기사도! 그 기사도를 실천하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만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유리아는 매일 검을 휘둘렀고, 약자를 돕고 시련에 굴하지 않는 기사도의 길에 매진했다.

쭉 그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기 전까진.

로안 샬루트라는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후작가 영애가 되어 여러 무도회에 참석해 많은 미남을 보아 왔지만, 로안만큼 잘생긴 남자는 보지 못했다.

‘과연 황족은 다르구나! 과연 대륙 최고의 혈통은 다르구나!’라고 유리아는 생각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느낀 남자 로안 샬루트는 단순히 외모만 잘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 망명 황족 방랑 기사는 엄청난 용력을 지녔다. 어쩌면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와 맞먹을 것 같은 검술과 오러는 강함을 넘어 아름다웠다.

마검의 도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마법으로 트롤을 해치우고 광휘를 휘날리며 요정어로 짐승을 쫓아낼 때는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두근거림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에 더욱 크게 와 닿는 것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가 숨 쉬듯 자연스레 보이는 언행들이었다.

그녀가 늘 추구했던 기사도, 아니,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사도를 로안은 보여 줬다. 어떤 연기나 가식도 아닌,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심지어 이를 의식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았다.

검과 결혼하고 기사도와 사랑에 빠졌던 유리아는…… 검과 기사도 그 자체인 로안에게 서서히 매료되었다. 어쩌면 마차에 실린 비자금을 탐내지 않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사랑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느끼는 두근거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감정이었기에 애써 부정하고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그의 여동생 리나가 가끔가다 올케나 새언니라고 장난칠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간지러웠지만, 패퇴한 기마대를 이끌고 광휘를 휘날리며 제국군을 밀어 버리는 모습에 넋이 나갔었지만, 남자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애써 외면했다.

……그랬던 유리아였지만.

‘로안 샬루트에 대한 마음을 접어라. 그는 임자가 있는 남자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로 인해, 유리아는 자신이 로안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유리아가 문라이트 후작에게서 그 말을 들은 지 이틀째.

그녀는 그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안색이 어둡고 창백했으며 움직임과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유리아의 아버지와 큰오라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을 뿐.

그녀는 의도적으로 솔라시우스를 피해 다녔다. 어쩌다 그를 마주하기라도 했다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들리는 로안 샬루트를 향한 칭송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유리아 언니! 요즘 무슨 일 있어? 혹시…… 오라버니가 언니에게 무슨 짓 했어?”

3일째 되던 날, 보다 못한 루나가 유리아에게 걱정 담긴 눈으로 물었다. 친구이자 동생의 검은 눈동자에는 진심 어린 우려가 담겼다.

“……리나야, 너 혹시 로안 경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니?”

이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았던 유리아는 반쯤 울먹이면서 리나에게 결국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백에 가까운 대화가 끝나고.

“아니! 후작님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우리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 들었나?”

유리아의 말을 들은 리나가 씩씩거렸다.

“너는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유리아는 다소 편해진 얼굴로 루나에게 재차 물었다.

“응! 난 그런 얘기 처음 들어!”

“그랬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엄청 확신하시던데…….”

“그냥 직접 물어보면 되지!”

“직……직접?!”

“그래! 오라버니에게 직접!”

“하지만…….”

“언제까지 말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을 거야? 상사병 걸린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상사병이라니! 끙끙 앓지 않았거든?”

“며칠째 죽상이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울먹이면서 오라버니에 대해 물어보던 게 누구였지?”

“…….”

“어서 가자! 직접 당사자 앞에서 확인하면 끝나는 문제 아니야?”

“어?! 잠, 잠깐……!”

“언니는 그냥 뒤에만 서 있어, 내가 물어볼 테니까.”

루나는 유리아의 손을 잡고 질질 끌다시피 솔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3일 동안 솔라시우스는 나름 바빴다.

유리아에게 마음을 접으라고 한 것과 별개로, 문라이트 후작은 솔라시우스에게 임시로 제2기사단장직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난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병대와 기사단을 규합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투에서 발휘했던 그의 무용 때문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기사와 기병들의 지지와 별개로 솔라시우스는 지휘관이 해야 하는 행정 업무도 아주 능숙하게 처리했다.

아니,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을 넘어서 혁신적으로 처리했다.

이로 인해 혹시나 해서 도움을 주러 온 변경백의 문관들을 기겁하게 했다.

지구에서 협회장과 길드장직을 해 봤고, 각성 이전에는 대학을 나와 직장 생활을 한 그다.

그런 그에게 중세 판타지 세계의 행정 업무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솔라의 모습에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황족이라는 그의 배경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줬기 때문이다.

[그대는…… 행정 업무도 잘하는구나.]

모처럼 오래도록 깨어 있는 루시가 행정 업무를 보는 솔라를 보며 신기해 했다.

‘정말 못하는 게 뭐람?’

루시푸르네는 까도 까도 계속 뭔가가 나오는 솔라를 볼 때마다 감탄만 나왔다. 이럴수록 그를 향한 마음은 깊어만 갔다. 누구에게든 좋으니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잘난 남자가 회귀 전에는 자신을 선택해 줬었다고!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 함께 최후를 나눴다고.

‘이토록 뛰어난 남자를 난 알아보지도 못하고…….’

한편으로는 다시 한번 회귀 전의 스스로를 자책했다.

“변경백 문관들이 많이 도와줘서 그래.”

솔라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루시의 말에 답했다.

[그렇지 않다! 문관들이 놀라는 표정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윈테이라와 동기화 중인 루시는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그녀 또한 여왕이다. 시녀장과 섭정이 침실 앞에 결재 서류들을 두고 가면 검토하고 결재도 한다. 그랬기에 솔라의 행정 업무가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대는 검도 잘 쓰고, 성격도 좋으며, 잘생겼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도 좋은 것 같다. 왕도의 대신들도 그대만큼 행정 업무를 잘하진 못할 것이다. 나의 주인 로안 샬루트는 정말이지 완벽하다.]

“내가 대신들보다 잘났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처음으로 서류에 가 있던 솔라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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