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44.
솔라의 의문 섞인 시선.
[비……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루시는 속으로 ‘아차!’ 하면서 급히 변명했다.
“그래?”
루시의 말에 솔라는 피식 웃었다.
“오늘은 유독 오래 깨어 있군, 루시.”
그리곤 과한 칭찬이 부담스러웠는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한 손으로는 마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여가…… 컨디션이 좋도다.]
그가 손잡이를 쓰다듬으면 마검 윈테이라와 동기화된 루시는 턱과 얼굴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이거야! 이걸 느끼고 싶었어!’
그녀는 오랜만에 느끼는 솔라의 따듯한 손길에 며칠 사이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들어 잠이 많던데? 무슨 일 있던 거야?”
[딱히 아무 일도 없다. 그저 컨디션의 문제일 뿐.]
“내가 이능을 쓸 때마다 너에게 무리가 가는 것 같아서 걱정했어.”
[그렇지 않다. 팍팍 써도 된다! 최근 잠이 많았던 이유는…… 그냥 원래 잠이 많았던 거다. 가능하면 자주 깨어 있겠지만 종종 이렇게 길게 잠들 수 있다.]
“하지만…… 태양 이능을 쓸 때마다 너에게 담겨 있는 냉기가 줄어들더군.”
[설원의 가호가 있는 곳에서 다시 충전된다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충전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말이지.”
[마석의 마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알뜰하게 사용하면 될 것이다.]
‘윈테이라에 부여한 설원의 권능에 이런 부분이 있었군.’
루시는 마검 윈테이라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대의 이능과 나의 잠은 어떤 연관성도 없도다. 괜히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다.]
루시가 최근 며칠간 윈테이라에 자주 동기화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빴기 때문이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장시간 왕도를 떠났어. 솔라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은 슬프지만 이때가 기회야!’
아리아는 갑자기 일이 있다면서 자신의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칩거하다시피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마법 통신으로 볼카의 지원과 같은 일 정도만 지시할 뿐이었다.
‘보나마나 태양샘 반지를 노리고 볼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겠지. 하지만 볼카에는 솔라가 있다.’
루시와 루카스, 하이마 등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재상이 없는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진행했다. 이런 이유로 루시는 윈테이라에 접속할 짬도 낼 수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쉽도다. 내가 잠든 사이에 그토록 멋진 대승을 거뒀다니.]
하지만 등가 교환의 법칙처럼, 루시는 솔라가 볼카에 와서 행했던 무용을 전부 보지 못했다.
제일 처음 암흑군단의 돌격대장 헌스터를 반갈죽한 것도 못 봤고, 광휘를 휘날리며 차징하던 전설적인 무용도 보지 못했다.
간신히 짬을 낼 수 있어서 윈테이라에 접속했을 때는 대부분의 일이 끝난 후였다.
[그…… 다시 한번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그대의 무용담 말이다.]
너무나 아쉬웠던 그녀는 솔라의 입으로 그 당시의 일을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
루시의 부탁에 솔라가 황당한 눈을 했다.
[응. 몇 번이고 들어도 너무 즐겁도다. 물론 지금 하는 서류 업무를 끝내고 해 줘도 된다. 오늘은 오래 깨어 있을 수 있도다.]
“단순 결재라서 상관없어.”
솔라는 시선을 책상에 고정하면서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그 당시의 얘기를 해 줬다. 손으로는 루시를 쓰다듬으면서.
마검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계속 얘기해 주는 것은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지만, 몇 번 하고 나니까 이제는 익숙해졌다.
[거기, 그래……. 거기 만져 주는 게 난 기분이 좋다.]
“처음 볼카에 왔을 때부터 얘기해 주면 되나?”
[이번엔 기마대 돌격을 얘기해 다오.]
여왕 루시푸르네에게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심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최고의 휴식과도 같았다.
은근히 말 많은 마검과 대화를 나누면서 서류를 처리하는 것은 솔라에게도 좋았다. 거의 반복 노동에 가까운 일이라서 이렇게 수다를 떨면서 일을 하면 확실히 덜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신히 전열을 재정비하고 재돌격을 감행했지.”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라고 외치면서 말이지! 로안, 그대와 그대의 기마대가!]
“돌진하면서 뭐라 외쳐야 할 것 같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더군.”
어린아이처럼 신나 하는 루시를 향해 솔라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좋은 구호인 거 같다. 내가 만약 루한의 여왕이었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야!]
‘솔라가…… 그런 구호를 외치며 돌격했었다니!’
실제로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루시는 감격해서 30분 동안 눈시울을 붉혔었다.
이건 회귀 전에도 듣지 못했던 구호다.
‘그동안의 정성이 헛되지 않은 것이야!’
그녀는 이번 생에서 솔라에게 물심양면 지원해 준 것에 대한 변화 정도로 인지했다.
똑, 똑, 똑.
은은한 마법등 아래서 마검과 기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났다.
“오라버니! 들어가도 돼?!”
그의 동생 루나시르네였다.
“들어와.”
마침 얘기도 서류도 거의 다 끝내 가던 중이라 솔라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칫.]
루시만이 불만 어린 반응이다. 둘의 오붓한 시간을 제일 싫어하는 마녀에게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물어볼 게 있어!”
이윽고 문이 열리고 루나가 성큼 들어왔다.
“유리아 경도 왔군.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든 거 같소만. ……안색도 안 좋아 보이고? 무슨 일 있었소?”
루나는 유리아와 함께 방문했는데, 며칠 만에 보는 것 같은 유리아는 안색이 유독 좋지 않았다.
[……?]
루시 또한 눈에 띄게 핼쑥해진 유리아를 보며 속으로 놀랐다.
“흥!”
이 모든 일의 원흉이기도 한 솔라의 반응에 루나는 콧소리를 냈다.
“오라버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혹시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어?”
“……?”
뚱딴지같은 루나의 질문에 솔라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넌 또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 것이냐!]
루시가 고개를 갸웃하는 솔라를 대신해서 반문했다.
‘얘는 도대체……?’
지난번 유리아와 자신을 이으려는 급발진도 그렇고, 저 동생이라는 애는 예측할 수 없는 기행을 종종 벌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루나 옆에 있는 유리아를 보았다. 유리아는 지금껏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불안해 보였고 연약해 보였다.
‘으음…….’
짧은 순간이지만 솔라는 대강 무슨 일인지 짐작했다.
유리아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옆에서 본 루나가 꼴에 큐피드가 되어 주겠다고 나선 것이겠지.
“…….”
솔라는 침묵했다. 어떻게 답할지 생각했다. 지구에도 이곳에도 결혼을 약속한 여자는 없다.
‘하지만…… 없다고 말하게 되면 ‘여지’를 주게 된다.’
희망 고문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나는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야 해.’
그가 1황자라는 신분을 끝내 숨기는 이유에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점도 있었다.
마왕을 죽이고 설원의 저주를 해주한 다음에 깔끔하게 지구로 떠날 생각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라버니, 왜 대답이 늦어? 설마……?!”
“……!”
솔라가 침묵하자 루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유리아의 안색 또한 더욱 어두워졌다.
[……!]
마찬가지로 솔라 옆에 있던 루시 또한 마음을 졸였다.
“있어.”
그러다가 솔라의 입이 열렸다.
“이……있다고?!”
“…….”
[!!]
그의 대답에 세 여자의 반응은 비슷하면서도 다양했다.
동생 루나시르네는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표정으로 자신의 오라버니를 바라봤고, 유리아는 혼이 나간 듯한 힘없는 눈을 한 것이, 살짝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루시푸르네는 너무 놀라 잠깐이지만 마검과의 동기화가 풀렸고, 급히 다시 접속했다.
“그래……. 있어. 미래를 약속한 여인.”
솔라는 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확답했다. 그의 시선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리아를 유독 담았다.
‘이게 최선이다. 모두를 위하는 길.’
선의의 거짓말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언젠가 지구로 갈 몸이다. 괜히 여기서 책임지지 못할 인연을 만드는 것보단 미리 싹을 자르는 것. 그 편이 나았다.
‘루나에게도 언젠간 말해야겠지.’
지금 말했다간 저 말괄량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중에 마왕을 잡고 설원의 저주를 풀고 차원 이동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면 말할 생각이다.
‘그때까지 최대한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줘야지.’
설원의 저주를 풀게 되면 그는 대가로 루나의 안정적인 정착을 여왕에게 요구할 생각이었다.
‘루나를 루한 마녀회에 정식으로 등록시켜 달라고 해야지. 궁정 마녀의 직책도 달라고 하고. 영지와 작위는 내 거를 물려주자.’
그런 오라버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데?! 언제?! 어디서!”
뒤이어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루나가 따지듯 물었다.
“누군지 말할 수는 없어. 너를 만나기 훨씬 전에 약속한 것이고. 아주 멀리 있다.”
“왜…… 왜 안 말한 거야?!”
“안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루나는 솔라에게 뭐라 더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유리아와 오라버니를 이어 주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은 대부분 그녀가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
루나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옆에서 석상처럼 멍하니 있는 유리아를 의식했다.
“유리아 언니…… 미안해……. 내가 잘 모르고…….”
뒤이어 밀려오는 죄책감. 루나는 유리아를 향해 울먹이면서 사죄했다.
“……아니, 괜찮아. 난 전에도 말했다시피 결혼에 관심 없다니까. 아하하하…… 하긴, 로안 경 같은 남자를 보고만 있을 여자는 없겠지요.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부럽습니다.”
곧 쓰러질 것 같았던 유리아는 이제는 반쯤 해탈한 반응이다.
그녀는 오히려 울먹이며 사죄하는 루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줬다.
“…….”
솔라는 그저 무심한 얼굴로 이 상황을 감당 중이다.
[나의 로얀 샬루트여.]
그리고 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루시가 솔라를 불렀다.
[혹시 그대의 연인이 요정 숲에 있는가? 엘프인가?]
루시는 그가 말한 여인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
솔라는 루시의 질문에 뭐라 답할지 고민했다. 지구에도 이곳에도 없는 가상의 여자. 하지만 무조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실제로 솔라시우스는 요정 숲에서 자랐으니까.
[맞구나? 엘프였어!! 누군지 밝히지 못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 그대는 요정 숲에서 최근까지 살았다고 했지.]
그가 침묵을 지키자, 루시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확신에 차 말했다.
‘엘프 여왕 리리아! 하이엘프 리리아야!’
유리아와 더불어 루시의 가장 큰 연적이기도 한 요정 숲의 여왕.
“오라버니, 그게 정말이야?! 엘프라고?!”
“……!”
루시의 말에 엉엉 울던 루나와 그녀를 달래 주던 유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서 솔라를 바라본다.
[로안 샬루트! 유감이지만 엘프와 인간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도다. 그건 오직 신화나 이야기책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단명종과 장수종의 결합은 엘프 사회에서 절대적인 금기에 가까웠다.
“맞아, 오라버니! 인간과 엘프는 수명이 너무 차이나! 물론 우리 황족들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그건 아주 예외적인 사례잖아?”
물론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약 1,000년 전, 제국을 건국한 마하대제의 아내, 제국의 초대 황후가 엘프였으니까.
“마하 대제가 죽고서! 하이엘프 아낙시아가 남은 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알면서 그러는 거야?! 300년 정도 버티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루시와 루나는 이미 솔라의 여인이 요정 숲의 엘프라고 확신한 모양.
드물게 루나와 루시의 의견이 일치했다.
“…….”
유리아는 그저 힘없는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솔라시우스는 좀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