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45.
억울해 하는 솔라시우스의 심정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을 터.
솔라는 그저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로안 샬루트, 엘프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다. 그건 상대 엘프에게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가 가만히 있자, 루시는 당당히 말을 이었다.
[차라리 설원의 저주를 해주하고 루한의 여왕과 이뤄지는 게 더 현실성 있다.]
은근히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그냥 엘프도 힘들지만 만약에 하이엘프와 이어지려면 세계수와 엘프 장로들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리리아를 의식했는지 하이엘프의 경우까지 덧붙였다.
[그들은 하이엘프 아낙시아의 사례를 이유로 절대 불가를 외치겠지. 세계수가 허락해도 장로들은 끝내 반대할 거다.]
엘프는 장수종이다. 잔병치레는커녕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 전투로 인한 손실로 평균 수명은 500~600년밖에 안 되지만, 자연사의 경우 보통 1,000년은 살았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과 수명 차이가 매우 크다.
거기다 엘프는 어지간하면 재혼하지 않는다. 대부분 첫 반려가 평생의 반려인 셈. 심지어 인간과 달리 망각도 굉장히 느리다.
100년 전에 느낀 감정을 지난주에 느낀 감정처럼 유지한다는 것이다.
엘프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최악의 경우 900년 이상을 먼저 죽은 반려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EX급 각성자인 솔라시우스의 수명이 평범한 인간보다 길다고 쳐도 기껏해야 200~300년. 여전히 엘프보다 못했다.
[로안 샬루트, 엘프는 엘프의 시간이 따로 있다. 인간은 인간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루시는 이 악물고 솔라를 설득하려 했다.
회귀 전, 솔라시우스는 종종 요정 숲에 있는 한 여인을 그리워했었다.
‘하이엘프 리리아도 분명 솔라에게 마음이 있었어! 그랬으니까 세계수 묘목을 흔쾌히 내놨겠지.’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루시는 그가 그리워한 여인이 요정 숲의 여왕 리리아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리아 언니! 아직 포기하면 안 돼, 이거…… 가능성 있어!”
그때, 루시의 귀에 루나가 유리아에게 작게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
루나의 말에 유리아의 힘없던 눈에 초점이 잡혔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아신 거지? 그리고 엘프라면…… 마음을 접으라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동시에 작은 의문도 들었다.
‘변경백과 엘프 사이에 내가 모르는 밀약이라도 있는 건가? 요정의 숲은 변경백 동쪽 끝과도 연결되어 있으니까…….’
처음에는 루나의 말에 뭔가 빛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생각할수록 수렁에 빠진 기분이다.
“언니, 오라버니 성정 잘 알지? 절대 무책임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 양반은 아니야. 즉, 어지간하면 이어지지 못한다 이거지. 언니는 그 틈을 파고들어서 서서히 오라버니의 마음을 적시는 거야!”
생각에 잠긴 유리아 옆에서 루나가 조잘조잘 떠든다.
“서서히……? 서서히 말이지?”
“그래! 천천히! 급할 거 없이!”
“응! 알았어, 천천히.”
생각에 잠겼던 유리아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루나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년이!]
이를 본 루시가 이를 갈았다.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얼얼하다.
함께 반리리아 공동 전선(?)을 구축하나 싶더니만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루나와 루시가 쏘는 반엘프(?) 십자 포화에 솔라시우스는 미간을 구겼다.
‘뭔가 일이 귀찮게 꼬이는군.’
그는 요정 숲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 엘프?
대부분 여자 엘프는 어린 솔라시우스와 접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뮤 같은 남자 엘프들과 더 친하게 지냈지.’
장수종과 단명종의 결합을 극도로 경계한 장로들이 엘프식 펜스 룰을 친 것이다. 대신 남자 엘프들과는 비교적 자유롭게 어울렸다.
‘그렇다고 아주 없진 않았지. 리리아, 로뮤의 누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벽을 쳤음에도 그와 친목을 나눈 여자 엘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하게 일반 엘프가 아닌, 하이엘프 중에 한 명 있긴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극히 미약한 관계였다. 지구식으로 표현하자면 여사친에 가까운 사이. 썸은커녕, 루시와 루나가 생각하는 것처럼 애틋한 관계는 전혀 아니다.
‘그나저나 루시, 얘는 기억을 잃은 마검이 맞긴 한가?’
한편으론 유난히 말이 많아진 푸른색 마검을 살폈다. 기억을 잃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 같았다. 엘프의 생활상도 마법과 관련된 지식인가?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지?’
난감했다. 마음을 준 여인이 있다고 말한 이상, 마냥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
지금 와서 엘프가 아닌 사람이라고 말해 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다.
솔라는 이 답답한 방 안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문 앞을 딱 막고 있는 루나와 유리아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말을 타고 제국군을 향해 돌진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았다.
“로안 경! 로안 경!”
쿵쿵쿵쿵!
그때였다. 솔라의 집무실 문을 누군가가 급히 두들겼다.
“프리츠 오라버니?”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를 들은 유리아가 문 두들기는 이의 정체를 알아챘다.
“프리드리히 경, 무슨 일이오?”
솔라는 지원군이라도 만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청문회 같았던 세 여자의 포위가 일순간에 풀렸다.
“요새 연무장에서 거대한 공간 이동이 예측되었소.”
이윽고 집무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변경백의 장남 프리드리히가 급히 말했다.
“마법사들이 말하길…… 응? 유리아?!”
프리드리히는 말하다가 집무실 안에 있던 유리아를 발견했다.
그는 막내 여동생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공간 이동이라니?”
솔라는 프리드리히의 난감한 표정을 무시하곤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오며 물었다. 탈출 성공이다.
“연무장에 거대한 마법진 두 개가 갑자기 생성되었소. 아주 밝게 빛나고 있는데…… 우리 측 마법사의 분석에 따르면 굉장히 높은 위계의 공간 이동 마법이라고 하오.”
솔라와 프리드리히는 연무장으로 달리면서 문답을 나눴다.
“마법진?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는데요?”
마녀인 루나가 바로 뒤에서 뛰면서 프리드리히에게 물었고.
“두 마법진을 합치면 연무장을 가득 채울 정도요.”
프리드리히는 레이디를 대하듯 정중히 답해 줬다.
“말도 안 돼!”
[……!]
프리드리히의 말에 루나와 루시가 기겁했다.
높은 위계에 오르게 된다면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 혼자만 이동 가능하다. 마법진의 크기도 딱 그만하고.
그런데 연무장을 가득 채운 크기라면 상상으로만 떠돌던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일 가능성이 있다.
“제국 마도사들이 힘을 합치면 거대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 들었소. 이미 요새 내의 모든 병력이 연무장을 포위 중이고.”
“아무리 그래도 요새 내부로 대놓고 공간 이동을 한다는 것은……?”
“그게 의문이오. 뭔가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연무장으로 달리는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딱 일주일째군.’
솔라는 문득 요정 숲에 마법 통신을 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연무장은 늦은 밤임에도 야시장처럼 환했다.
쇠뇌와 투석기를 비롯한 공성 무기가 연무장을 겨눴고, 좀 더 앞에선 궁병들이 화살을 겨눴다. 마법사들이 대규모 마법을 캐스팅 중에 있었고, 병사들과 기사들은 몸을 풀면서 포위 대형을 짰다.
제일 높은 망루에선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가 말없이 연무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
[……!]
마법진을 본 루나와 루시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처음 보는 양식의 마법진이야! 공간 이동 술식은 맞지만 인간종은 절대 이런 식으로 못 해…….”
루나는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연무장에 크게 새겨진 마법진을 응시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볼카에 있던 마법사, 마녀 또한 멍하니 연무장의 마법진을 감상했다.
지금 각종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을 캐스팅 중에 있지만, 저런 마법을 쓰는 존재에게 이게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요새의 모든 마법사에게 공통으로 들었다.
[…….]
루시 또한 이때만큼은 침묵을 지켰다.
화아아악!
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연무장의 마법진이 번지듯 터졌고.
[엘리샤인! 로안 샬루트, 엘카림 피테.]
“안녕! 로안 샬루트, 내 동생!”
그 빛 속에서 밝은 남성의 목소리가 요정어와 함께 들렸다.
* * *
천만다행이게도 거대한 두 개의 공간 이동 마법진에서 등장한 것은 제국군도, 몬스터도 아니었다.
바로 신화처럼 이야기만 나돌던 엘프들이었다.
물론, 신화처럼 허황된 종족은 아니다. 드워프처럼 대도시에 가면 드물게 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제국 황족 같은 아주 높은 고위 귀족들은 마하 대제 때의 언약 덕분에 소수 엘프들과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그래도 확실히 대륙에서 가장 보기 힘든 종족인 것은 맞았다.
그랬던 엘프들이 지금 볼카의 연무장에 떼거리로 집결해 있었다. 본래 겨눴던 무기와 마법은 거둔 지 오래. 하지만 마냥 안심하긴 이르다.
대규모 공간 이동으로 온 엘프들은 일반적인 엘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죽 갑옷 위에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한 손에 고풍스러운 장궁을, 허리춤엔 짧은 곡도를 찬 엘븐레인저가 50.
날렵하고 움직이기 편하게 고안된 판금 갑옷에 방패와 기다란 곡도, 창으로 무장한 엘븐나이트가 40.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나풀거리는 천옷을 입은 엘리멘탈리스트가 10.
마지막으로 엘븐레인저와 비슷한 복장을 했지만 장궁 외에도 허리에 완드를 차고 다른 한 손에는 곡도를 든 1명의 하이엘프가 대표로 선두에 서 있었다.
성비는 장수종과 단명종의 결합을 최대한 예방하자는 취지인지, 전부 남성 엘프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총 101명의 엘프, 정확히는 엘프 지원군이라고 불러야 되겠다.
“로뮤.”
성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솔라가 모처럼 무심한 눈에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엘리샤인! 로안, 잠깐 못 본 사이에 많이 성장했구나. 인간종의 시간은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거 같아.”
솔라를 발견한 로뮤라는 이름의 하이엘프가 밝게 손을 흔들었다.
솔라는 망루에서 연무장으로 바로 뛰어내렸다.
‘이건 솔라시우스의 감정인가?’
태광휘는 자신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굉장히 반가운 가족 같은 친구를 만났을 때 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원작 게임에서 로뮤는…… 결국 파괴왕 가오이와 싸우다가 죽었지.’
원작을 떠올리는 머릿속과 달리 몸은 이미 로뮤라는 하이엘프에게 향했고.
“정말 반갑군, 로뮤!”
금발, 금안의 인간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하이엘프를 가볍게 포옹하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나는 잠깐이지만 인간종인 너에겐 오랜만일 수도 있겠어. 우리가 걷는 시간은 다를 테니까.”
로뮤는 일반적인 엘프치곤 굉장히 활달했고 밝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요정 숲의 도움에 인간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나의 형이자, 스승이자, 친구인 로뮤 엘펜리트.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올 줄은 몰랐어…….”
솔라는 진심을 담아 로뮤에게 감사를 표했다.
“나의 동생이자, 제자이자, 친구인 로안 샬루트. 우리의 언약은 네가 살아 있는 한 지킬 의무가 있어. 그것이 세계수의 명예이자, 요정들의 자존심이니.”
로뮤는 씨익 웃으며 솔라의 감사에 화답했다.
엘프, 그것도 하이엘프답게 로뮤 엘펜리트는 굉장히 잘생겼다. 게다가 일반적인 엘프와 다르게 그는 흑발에 붉은 눈동자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단순히 잘생겼다는 것을 넘어서 묘하게 색기와 퇴폐미까지 느껴졌다.
“그나저나 답장 없이 이렇게 갑작스레 오다니. 적으로 오인해서 공격할 뻔했어.”
가볍게 인사와 화답을 나눈 솔라는 연무장에 아직 남아 있는 대형 마법진을 가리키며 말했고.
“답장을 지금 장로들이 쓰고 있거든……. 내가 써서 보내려 했는데 예법에 맞지 않다고 노발대발해 버려서…….”
로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 이유를 말했다.
“이해했다.”
그 말에 솔라는 바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장은 아마 반년 후에나 올 거야. 그것도 빠르게 결정했다고 가정했을 때의 얘기지만.”
“하여간 엘프의 시간은…….”
“700살 이상 먹은 꼰대일수록 엄청나지. 나의 누이 리리아가 결국 참다 못해 나와 근위대를 급파한 거야. 그래서 지원군치고는 좀 적은 편인 거고.”
[!!]
로뮤의 입에서 리리아가 언급되자, 솔라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검 루시가 우우웅, 하고 울었다.
바로 뒤에 있던 루나와 유리아도 마찬가지로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