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46.
로뮤는 솔라를 보며 신기함을 느꼈다.
너무 빨리 자란다. 너무 빨리 성장한다.
그 조그마한 아이를 목마 태워서 숲을 걸었던 것이 방금 전 같았는데…… 이제는 포옹만 간신히 할 정도로 커 버렸다.
검도 제대로 못 들던 녀석을 가르치던 게 어제 같았는데, 잠깐 못 본 사이에 말도 안 되게 성장해 있었다. 어쩌면 지금은 자신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솔라시우스, 누이 리리아가 지어 준 이름으론 로안 샬루트라 불리던 아이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한편으론 안타까움도 들었다. 이래서 장로들이 단명종과의 접촉을 금하는 것이구나.
눈앞의 찬란하고 듬직한 형제는 더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고, 늙고, 사라지겠지.
인사를 나눈 솔라는 로뮤에게 서둘러 자신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로뮤, 소개하지. 이쪽은 내 여동생인 리나 샬루트…….”
일단 솔라와 제일 가까이 있던 루나부터.
“반, 반가워요! 저는 로안 오라버니의 동생 리나 샬루트라고 합니다. 엘프, 그것도 하이엘프를 직접 보게 되다니…….”
루나는 평소의 모습과 달리 상당히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귀족 영애들이 예를 표하는 것처럼 무릎과 고개를 살짝 굽혔다 피는 식으로 인사를 한다.
“노아……?”
그런 루나를 본 로뮤가 알 수 없는 소릴 했다.
“네?”
“아니, 아무것도.”
루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로뮤는 고개를 저었다.
“로안의 동생이라고……?”
로뮤는 흑발, 흑안의 어린 마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루비 같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렸다.
하이엘프의 눈은 단순히 루나의 외모만을 살피지 않았다. 그녀의 영혼까지 훑었고 마지막으로 목에 건 로사리오에 향했다.
루나는 늘 그림자 핵을 봉인한 로사리오를 목에 걸었다. 하지만 마녀 상의 속에 숨겼기에, 다들 그녀의 로사리오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찾은 건가?’
허나, 로뮤의 눈은 마치 투시 기능이 있는 것처럼 그 로사리오를 정확히 보았다. 그 로사리오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힘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
‘닮았어.’
로뮤는 루나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연상했다.
“엘리샤인, 반가워! 어린 인간 아가씨.”
이윽고 그는 친근한 미소로 루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인간식으로 악수를 청한 것이다.
“……아주 똑 닮았구나. 로안은 나의 친구이자 동생이니. 리나 샬루트, 너 또한 내 친구이자 동생일 터.”
“잘, 잘 부탁드려요…….”
루나는 로뮤가 내민 손을 놀란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히 악수했다.
“보아하니 마녀로구나. 그런데 죽음의 냄새가 나.”
“……!”
그 말에 루나의 표정이 굳혔다.
“하지만 차가운 냄새는 아니야. 뭐랄까, 장의사에 가까운 냄새야. 아늑하고 따듯하지.”
하지만 이어지는 로뮤의 말에 루나는 굳었던 어깨를 풀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서러운 삶을 살았을 것 같구나.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너의 오라비 로안과 함께 너를 진심으로 대하겠다.”
리나를 바라보는 로뮤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따스함이 느껴졌다.
“……?!”
루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흑발, 적안의 하이엘프를 응시했다.
루나와 로뮤, 이 둘이 악수를 한 것을 확인한 솔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루시 때처럼 첫 만남부터 다투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기우였던 모양.
“그리고 이쪽은 변경백의 장남 프리드리히, 여기는 유리아, 저쪽 망루에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자가 이 요새의 주인 지크문트다.”
그는 이어서 변경백의 다른 이들 또한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게 꿈이요, 생시요? 엘프라니…… 엘프 지원군이라니!”
변경백의 장남 프리드리히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로뮤와 인사를 나눴다.
“지,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유리아 또한 로뮤를 신기한 눈으로 보며 인사를 표했다. 과연 엘프답게 솔라 옆에 서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 외모다. 한편으론 연적(?)의 남동생이라는 사실에 살짝 긴장한 눈도 했다.
“잘 부탁하오. 로뮤 엘펜리트라고 하오. 우린 명예롭게 싸울 것이고 목숨으로 신의를 지킬 것이니, 인간들도 그리해 주길 바라겠소.”
솔라의 소개를 들으면서 로뮤는 ‘인간은 동료도 참으로 빨리, 그리고 많이 사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연무장에는 여전히 100명의 엘프 지원군이 기립해 있었다.
* * *
볼카 성채는 병력 수에 비해 크기가 컸다. 따라서 엘프 지원군이 머물 병영은 충분했다.
어수선함이 가시지 않은 저녁, 볼카의 성채 안 회의실.
엘프들의 대표로 유일하게 하이엘프 로뮤가 회의실에 착석했다.
깜짝 생일 선물 같은 엘프 지원군을 어디에 배치할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투에 임할지를 논하기 위해서다.
“환영하오. 아까 로안 경이 소개해 줬듯이 내 이름은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이 요새의 주인이자 변경백의 영주요.”
변경백의 영주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가 다시 한번 정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지금 변경백은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가 간절히 필요하오. 이런 때에 100의 엘프 근위대는 정말이지 구원 그 자체였소. 내 명예를 걸고 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약조하지.”
“환대해 줘서 고맙소. 여왕의 명을 받고 온 하이엘프, 로뮤 엘펜리트라고 하오.”
로뮤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 앞에서 버릇없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닌 엘프, 그것도 엘프 사회에서 귀족이나 왕족 취급받는 하이엘프다.
이 자리에서 로뮤의 태도를 지적할 정신 나간 인간은 없었다.
“하이엘프여, 지금 온 지원군으로 엘프와 루한의 동맹을 확신하면 되겠소?”
짧은 자기소개가 끝나자, 문라이트 후작은 조심히 로뮤를 살피며 물었다.
동시에 후작은 로뮤 옆에 앉은 솔라의 허리에 있는 윈테이라를 의식했다.
지금 이 순간을 여왕께서는 과연 보고 계실까?
듣기론 마검인 척 연기하면서 지내시는 거 같았다. 만약 아는 척을 했다간 상당히 민망해질 것 같았기에, 윈테이라에 대해 알고 있던 후작과 프리드리히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아직 확정은 아니오. 애초에 우리는 루한과 동맹을 맺기 위해 온 게 아니오. 맹세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일 뿐.”
후작의 상념을 뚫고 로뮤의 대답이 들렸다.
“맹세라니?”
로뮤의 말에 지크문트의 머리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자세한 것은 말하기 힘드오.”
로뮤는 솔라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루한과 요정 숲의 동맹이 매우 높은 가능성을 지닌 것은 분명하오. 지금 우리 장로들이 이와 관련하여 회의에 들어갔소.”
“오오! 그 정도만 해도 희소식이오!”
“하긴, 애초에 하이엘프가 직접 온 파병인데…… 결코 가벼운 파병은 아니지!”
후작을 비롯한 회의실의 모두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회의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오. 어떤 결론이든 정식으로 결정 날 때까진 시간이 걸릴 것임을 밝히는 바요. 지금의 지원군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이니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로뮤의 대륙 공용어는 요정어 억양이 섞여 있어서 듣기가 감미로웠다.
“매우 높은 가능성이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다면 미리 양측 사절이 오가는 시기라도 조율하는 것이 어떻겠소?”
문라이트 후작은 살짝 아쉽다는 눈으로 로뮤에게 제안했고.
“사절이 오가는 시기를 확정하는 것도 당장은 불확실하오. 이 또한 장로들의 회의가 끝나야 결정할 수 있소.”
“그 회의는 언제쯤 끝날 것 같소? 대략적으로라도 상관없소만.”
“루한과 동맹을 맺을지에 대한 결정이 나려면 최소 6개월에서 최대 2년은 기다려야 하오.”
“그렇게나 오래?!”
로뮤의 대답에 문라이트 후작뿐만 아니라 회의실의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다니! 유일하게 솔라시우스만이 덤덤한 얼굴이다.
“너무 긴 거 아닌가? 6개월에서 2년이라니…….”
“인간에겐 긴 시간이겠군. 허나 우리에겐 그것도 빠른 편이라고 얘기해 두겠소. 아마 장로들은 독촉당하는 기분일 것이오.”
장수종과 단명종의 시간은 다르고 정신세계도 다르다고 얼핏 듣긴 했다. 문라이트 후작은 흐음, 하는 신음과 함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지금 당장은 여지를 잡은 것으로 만족하자.’
100의 최정예 엘프 근위대라도 온 것이 어딘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 수준의 기사 100이 추가된 거다.
“알겠소. 어쩔 수 없지. 그대들과 우리는 살아가는 시간이 다르니.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소.”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오. 하이엘프인 나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
“부디 그때까지 우리 루한이 잘 버텨 줬으면 좋겠군.”
“이해해 줘서 고맙소.”
회의의 대부분은 문라이트 후작과 하이엘프 로뮤의 문답식으로 진행됐다. 나머지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눈앞의 하이엘프를 힐끔거릴 뿐이다.
이 자리에 어쩌다 참석한 루나도 유독 힐끔거리면서 로뮤라는 엘프를 관찰했다. 그녀의 흑색 눈동자에 호기심과 호감 그리고 설렘이 언뜻 보였다.
[…….]
반면, 마검 루시는 어쩐 일인지 엘프의 등장 이후 한 번도 말이 없었다.
‘얘가 말도 없이 잠든 건가?’
솔라는 이 마검이 다시 잠든 게 아닌지 싶었을 정도다.
‘다른 이들이라면 윈테이라에 대해 모를 테지만, 문라이트 후작은 윈테이라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괜히 마검인 척하는 거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가 말이 없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런 식으로 변경백과 만나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부끄러웠다.
회의가 거의 끝날 때쯤이 되었다.
문라이트 후작의 궁금증도 어느 정도 풀렸고, 엘프 지원군의 요새 배치도 정해졌다. 내일부터 엘프 근위대 또한 볼카 성채의 한 곳을 경계 서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걸 깜빡했군. 로안!”
대강 이야기를 마친 로뮤가 문득 솔라를 불렀다.
“?!”
솔라는 괜히 싸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을 부른 로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잊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하는 게 알맞겠어.”
로뮤는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리리아가 쓴 편지다.”
검은 머리 하이엘프의 입에서 리리아라는 여자 엘프의 이름이 나오자, 회의실의 세 여자, 루나와 루시 그리고 유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싸한 느낌은 이거였나?’
아까 그것 때문에 시달렸던 솔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가 읽어 주지.”
그런 솔라를 의아한 눈으로 보며, 로뮤는 리리아가 썼다는 편지를 읽으려 했다.
“……그걸 왜 읽으려고?”
그냥 나한테 몰래 줘야지.
솔라가 황당해 했고.
“이 편지에는 오직 하이엘프만이 읽을 수 있게 마법이 걸려 있거든.”
“……다른 사람이 들어도 상관없는 내용인가?”
“그럴걸?”
“하이엘프만 읽을 수 있게 마법을 걸었다면서 아무나 들어도 된다고……?”
굉장히 무책임한 로뮤의 말에, 솔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괜찮아.”
하지만 로뮤는 밝게 웃으면서 솔라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럼 낭송하도록 하지.”
로뮤는 솔라가 말릴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엘리샤인! 로안 샬루트, 엘루루 피테 세라하.]
휴우…….
그리고 로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솔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쫄았군. 생각해 보니 엘프어로 쓴 편지였잖아?’
다행히도 로뮤가 읽는 편지의 언어는 요정어였다.
“로안, 네가 떠난 지 잠깐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연락이 오다니, 참으로 당황스러웠어. 하지만 이상하게 반갑고 기쁘기도 해.”
솔라시우스는 다소 풀린 표정으로 편지의 내용을 들었다.
“급히 편성한 근위대를 나의 동생 로뮤와 함께 답신으로 보낼게. 정식 답장은 답답한 장로들이 쓰겠다고 하는 바람에 늦을 거야. 단명종과의 접촉을 극도로 경계하는 장로들의 집착은 나도 어쩔 수 없거든. 현재 장로들은 3일째 네가 보낸 마법 통신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토론 중이야.”
편지 내용에 리리아의 한숨이 담긴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마법으로 바로 답을 할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 몰래라도 보내려 했지만…… 장로들이 요정 숲의 유일한 마법 통신구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토론 중이라 할 수 없었어. 요정 숲의 기괴함을 익히 아는 로안이라면 잘 알 거야.”
그 말에 솔라는 괜히 웃게 되었다. 태광휘의 감정이 아닌 솔라시우스의 감정이 자극된 모양. 유리아와 루나 그리고 루시가 그런 솔라의 반응을 경계한다.
“별 볼 일 없는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게. 로안이 보낸 마법 통신을 받은 직후, 나는 세계수의 신탁을 받게 되었어. 그리고 이를 너에게 전해야 하는 강한 의무감을 느꼈고.”
“!!”
편지의 내용에서 갑자기 세계수가 언급되자, 슬쩍 미소 짓던 솔라의 표정이 굳었다.
“세계수는 이렇게 신탁하셨다.”
낭송하던 로뮤의 말투도 바뀌었다.
“차갑게 무너진 세계선 위로 새로운 세계선이 빛과 함께 자라났으니, 따듯한 송풍이여, 너는 어디로 불어야 할지 알 것이다.
이것으로 편지를 마친다. 곧 보게 되기를. 엘-피테 로안 샬루트.”
그것으로 로뮤는 편지의 낭송을 마쳤다.
“뭐야? 뭐라고 한 거야?”
“……?”
루나와 유리아는 엘프어를 몰랐기 때문에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그저 노래처럼 듣기 좋은 엘프어를 들었다는 정도일 뿐이다.
“……그게 끝인가?”
“끝이야. 내 누이가 쓴 편지지만 참으로 두서가 없군. 썼다 지운 흔적도 많고…….”
로뮤는 밝은 표정으로 편지를 솔라에게 완전히 넘겼다.
‘세계수의 예지…… 세계수는 원작의 일을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지구에서 온 것도 알까?’
솔라시우스는 심각한 얼굴로 편지의 내용을 되새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