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47.
솔라는 로뮤가 건넨 편지를 아공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세계수의 신탁……!”
그리고 이어서 로뮤에게 신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 했다.
“나 또한 편지를 읽기 전까지 신탁에 대해 몰랐어.”
솔라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로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내 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요정 숲에 다시 가라고?”
“동생아, 이래 봬도 난 하이엘프다. 내 누이보단 못하지만 나름 감이라는 게 있지.”
로뮤의 붉은 눈동자가 솔라의 금색 눈동자를 응시한다. 마치 그의 앞길을 알기라도 하듯이.
“편지를 여기서 낭송한 것도 이유가 있던 거야?”
로뮤의 말에 솔라는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이상하게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
솔라를 바라보는 로뮤의 시선이 푸른색 마검으로 이동했다.
[……!]
로뮤의 붉은 시선을 느낀 루시가 화들짝 놀랐다.
반면, 루시를 향한 로뮤의 시선을 솔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편지의 내용 때문에 생각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나, 태광휘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문득, 원작 게임에서의 세계수를 떠올렸다. 태초의 의지를 가진 나무이자 정령.
하지만 거창한 설정과는 달리, 게임에선 이런 신탁을 내리지 않았었다.
게임 캐릭터 솔라에게 묘목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 그것밖에 없었다.
‘볼카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세계수를 만나러 가 봐야겠군. 어쩌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다.
편지 낭송을 끝으로 회의가 끝나자마자, 루나가 솔라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편지 내용! 알려 줄 수 있어?”
“볼카에서의 일이 끝나면 요정 숲에 한번 가 봐야겠어.”
솔라는 편지의 내용 대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작게 얘기해 주었다.
“진짜?!”
루나는 기쁨과 놀람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요정의 숲에는 어머니의 무덤이 있었기에 언젠간 한번 가 보고 싶긴 했다. 또 어머니의 무덤과 별개로 마도의 길을 걷는 이에게 요정의 숲이란 언제나 탐구의 장소이기도 했다.
“아……!”
그러다가 문득 문라이트 후작 옆에 서 있는 유리아를 의식하곤 조심스레 오라버니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요정 숲에서 쭉 사는 건 아니지?”
“잠깐 들르기만 할 거야.”
“우리 둘만 갈 수 있는 거야? 요정의 숲?”
“아마도 그렇겠지.”
솔라는 하이엘프 로뮤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루나는 솔라의 대답에 살짝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문라이트 후작의 부관 임무를 다시 수행 중인 유리아가 있었다.
‘유리아 언니! 걱정 마! 내가 오라버니를 잘 마크할게! 그리고 반드시 데려올게!’
소녀는 다짐했다.
‘그나저나…….’
다짐을 마친 루나는 시선을 조심히 돌려 누군가를 슬쩍 보았다. 흑발에 붉은 눈이 매력적인 하이엘프가 소녀의 시야에 담겼다.
요정 숲에서 자신의 오라비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서러운 삶을 살았을 것 같구나.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첫 만남에서 로뮤라는 엘프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루나는 졸지에 추가된 큰오빠(?)를 계속해서 의식하게 되었다.
* * *
로뮤의 편지 낭송이 끝나고서, 여왕 루시푸르네는 솔라에게 이만 자겠다고 말한 후 동기화를 해제했다.
오늘은 그녀가 정한 자체 휴일. 밤새 솔라와 함께할 수도 있었지만 생각이 복잡해져서 집중을 오래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역사가 크게 바뀌었어?’
일단 엘프 지원군의 존재다. 회귀 전에는 지금보다 한참 뒤에나 모습을 드러낼 엘프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계수의 신탁이라고?’
하이엘프 로뮤가 낭송한 편지의 내용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현생에서의 루시는 요정어를 짧게나마 할 줄 알았다. 원래는 몰랐지만 회귀 이후 부랴부랴 독학으로 익혔다.
회귀 전의 그녀는 요정어를 몰랐고, 이로 인해 솔라를 오해했었다.
결국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시련과 상처를 줬고, 그녀는 이를 가슴 깊이 후회했다.
회귀를 한 루시는 바로 요정어를 공부했다. 제국과 달리 루한은 활동하는 엘프가 전무했기에, 책과 문헌으로 독학해야만 했다.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지만 듣는 건 어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엘프어로 된 편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리리아…… 아니, 세계수는 내가 회귀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자신을 응시하던 로뮤라는 하이엘프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는 느낌상 낭송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루시는 그것이 마검으로 동기화 중이었던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도대체 세계수와 하이엘프들은……!”
그녀는 괜히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움츠렸다.
‘차갑게 무너진 세계선은 회귀 전의 세계를 의미해. 또 나의 이전 삶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녀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면서 편지에 적힌 신탁을 곱씹었다.
‘새로운 세계는 회귀를 한 지금의 세계고, 빛과 따듯한 바람은 솔라를 뜻하는 거야. 그런데 마지막에 어디로 불어야 할지 알 것이라는 말은 뭐지? 솔라에게 하는 말은 맞는 거 같은데…….’
여왕의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
‘혹시……? 솔라도 나처럼?’
생각은 거기까지 도달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랬다면 그가 지금처럼 행동하지 않았겠지.’
솔라는 마지막까지 루시 옆에 있었다. 루시푸르네는 자신과 솔라가 애틋함을 넘어선 절실한 사랑을 함께 공유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회귀를 했다면…… 선택지건 뭐건 죄다 무시하고 일단 왕궁부터 왔을 거다.
‘내가 회귀함으로써 많은 것이 변한 건가? 그렇다면…… 솔라의 저주와 무력도?’
솔라가 품고 있다는 저주가 떠올랐다. 그가 행한 사령술사 이자벨의 척살과 볼카에서의 무용담도 떠올렸다.
그의 무력을 직접 보진 못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 볼수록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긴 했다.
회귀 전의 솔라시우스도 강했지만, 이번 삶에서의 솔라는 더 강한 거 같았다.
물론 솔라는 회귀 전에도 죽음의 대마녀를 상대했었다. 암흑군단의 정예들을 참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쉽고 빠르게 죽였냐고 묻는다면? 아무리 콩깍지가 씐 루시라도 미심쩍긴 했다.
‘솔라의 저주…… 그리고 윈테이라…… 그리고 나의 회귀.’
그녀는 습관적으로 손목의 푸른색 나뭇잎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회귀를 해서…… 그래서 솔라에게 변화가 생긴 걸까? 충분히 가능성 있어. 우리 둘은 마지막에 함께 마왕에게 죽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이 회귀를 하면서 솔라에게 영향이 온 것인지 모른다.
‘솔라는……! 기억을 가져오는 대신 힘을 선택한 것일지도 몰라! 그 대가로 저주까지!’
루시의 망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더 강해진 대신 그만큼의 부작용을 얻은 것일 테지.’
그녀의 망상은 거의 확신처럼 변해 버렸다.
솔라시우스와 루시푸르네! 둘은 함께 최후를 맞이했고, 자신은 회귀를, 솔라는 기억 대신 힘과 저주를 가지고 온 것으로 이야기가 창조되었다.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루시는 솔라를 향한 근본 없는 죄책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 날, 왕궁 알현실.
전날 밤 루시는 밤새 솔라를 향한 미안함과 세계수의 신탁 그리고 하이엘프 리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끙끙 앓았다.
때문에 알현실에 앉은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다.
“폐하, 휴일 동안 잘 쉬셨습니……까?”
알현실로 입장한 섭정 루카스가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루시의 안색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잘 쉬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한 섭정공에게 애써 괜찮다는 미소를 보여 줬다.
“그렇군요.”
루카스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피로해 보이긴 했는데 아마도 윈테이라에 밤새 동기화한 모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폐하, 문라이트 변경백에 엘프 지원군이……!”
그때, 기사단장 하이마가 시녀장 베네사와 함께 알현실로 들어오며 외쳤다.
아마 변경백에서 마법 통신을 보낸 모양.
“알고 있다. 일단 요정 숲에서 사절단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하이마의 보고에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고 계셨군요.”
왕실기사단장 또한 윈테이라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지. 하이마 경도 나가지 말고 여기 있도록. 나눠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화로를 켜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카스는 화로에 불을 넣었다.
“재상이 왕도를 장시간 비운 덕분에 마탑 내 상당수 마법사들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녀회는 힘들 것 같습니다.”
화로의 은은한 빛과 열기 속에서 루카스는 루시에게 보고를 올렸다.
“아니에요. 마탑이라도 장악한 게 어딘가요?”
루시는 진심으로 만족했다. 마녀회는 애초에 재상이 꽉 잡고 있었다. 마법사인 루카스가 마녀회에 개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고.
‘원래라면 내가 마녀회를 장악해야 하지만.’
이놈의 설원의 저주가 문제다. 그랬기에 루시는 마녀회를 깔끔히 포기했다.
“장악한 마탑을 중심으로 제가 의뢰한 것들을 최대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마탑에 봉인된 각종 서적과 재료들을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마왕의 저주와 차원 이동과 관련된 정보를 최우선 순위로 모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루카스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루시는 요즘 다시 연구하고 있는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까 고민했다가, 일단 보류했다.
루카스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루카스의 주변은 믿지 못했다. 그가 마탑을 되찾았다고 해도 불안했다.
‘루카스가 이노센티아를 준비하다가 조금이라도 재상의 귀에 들어가면 안 돼!’
대마법진 이노센티아는 본래 재상이 처음 고안했던 것. 루시가 이노센티아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재상이 알게 되면 일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다.
회귀 전의 트라우마가 그녀를 아직 목 조르고 있었다.
‘지금은 이노센티아가 급한 게 아니야. 이노센티아는 나중에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이 모였을 때, 그때 한번에 해야 해. 재상이 어떤 수도 쓰지 못할 때!’
그랬기에 루시는 이노센티아에 관한 것을 숨기기로 했다.
‘지금은 솔라의 저주를 푸는 것이 중요해. 차원 이동이라는, 그가 궁금해 하는 마법에 대한 정보도! 무엇보다…….’
그가 차원 이동이라는 마법에 왜 관심 가지는지는 여러 짐작이 간다. 아마도 마왕을 없애기 위함일 것이다. 마왕의 본체는 마계에 있다고 전해지니까. 지금 제국에 있는 흑태자는 엄밀히 말하면 마왕의 아바타에 가까웠다.
“마탑을 장악하는 것 외에도 아리아 데스모의 수상한 행적들을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재상 편에 선 마녀와 귀족들의 약점을 잡고서 조금씩 중립으로 만드는 중입니다.”
루시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루카스는 보고를 이었다.
“재상이 복귀하면 여러 가지로 놀랄 겁니다.”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참! 아마 내일부터 루한 전역에서 보낸 지원 물자들이 볼카에 도착할 겁니다. 대신들과 재상이 보낸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가요? 재상이 보낸 물자는 무엇무엇이 있지요?”
“식료품이 대부분입니다. 육류가 유난히 많은데 마녀회의 수장답게 고기를 보관한 모든 상자가 냉기 마법을 인챈트한 마도구였습니다.”
“음식에 이상한 짓을 했을 가능성은?”
“안 그래도 제가 신뢰하는 마법사를 보내 살펴보게 했습니다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불손한 인물이라고 해도 대놓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겁니다.”
“좋아요. 수고 많았습니다, 섭정공.”
여왕은 섭정의 보고를 듣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루카스 옆에 멀뚱히 서 있는 기사단장 하이마를 바라보았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뭘 말하는지 눈치챈 하이마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총력을 다해 1황녀 루나시르네를 찾고 있습니다만…… 도저히 보이지가 않습니다. 루한에 거주하는 모든 금발, 금안의 여성뿐만 아니라 변장을 고려하여 남성까지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루시는 하이마의 말에 진심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꾼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 경우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이마의 말에 루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그녀도 하이마와 왕실기사단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잘 아는데.
‘설마……?’
그러다 문득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어리고 버릇없는 한 마녀가 떠올랐다. 의동생이지만 솔라가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는 소녀.
루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안 돼. 제국 황족은 모두 빛의 속성을 가져. 마하 대제와 하이엘프 아낙시아의 후손이기 때문이지.’
물론 빛 속성을 가진 자가 사령술을 익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가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할까?
세상 어떤 정신 나간 마녀가 성향이 정반대되는 아이에게 자신의 정수를 가르칠까?
루시는 애써 가능성을 접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1황녀 루나시르네를 꼭 찾았으면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설마…… 아니겠지.’
여왕은 괜히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루나시르네의 행방을 찾으라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