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48화 (48/212)

제48화

#48.

여왕과의 알현을 마친 섭정 루카스는 왕궁 안쪽에 위치한 공터에 섰다.

그가 도착한 공터는 왕궁에 있는 궁터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다.

마치 불쾌한 기억을 애써 지우려고 한 것처럼 억지로 부수고 치운 티가 강한 공터다.

“여기서…… 설원의 계승식이 행해졌지.”

루카스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의 눈이 회한을 담고는 그날을 떠올렸다.

설원의 계승식이 실패했던 그날, 폭주하던 설원의 권능은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 놔뒀다간 아내와 딸은 물론, 왕도 윈테라 전체가 얼음이 될 것 같았다.

화염 마법의 대가였던 그는 거대한 눈보라 속 작은 촛불이었고, 몰살은 코앞으로 다가왔었다.

!!

그리고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루카스도 몇 번 보았던 남자였다. 언제나 후드를 깊게 눌러썼던 남자.

벙어리였는지 말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남자, 늘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던 남자였었지.

그자는 자신의 아내 예나체리나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렇게 나타났었다. 늘 그랬듯이.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던 그 남자는 그날도 갑자기 나타났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과 달리, 정체불명의 남자는 홀로 설원의 폭주를 다스렸다.

이름도 정체도 몰랐던 그 남자를, 아내는 언제나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었지.

그날의 마지막에도 그녀는 그자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냈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전대 루한의 여왕이었던 예나체리나는 루카스가 아닌 그 남자에게 유언을 남겼다.

‘제 딸을, 부디 제 아이를 부탁해요. 염치없지만, 저에게 해 줬던 것을 루시에게도 부디……!’

루카스의 아내이자, 루시의 어머니 예나체리나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에게.

이름 모를 벙어리 남자는 결국 설원의 폭주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나체리나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폐허가 된 계승식장. 설원의 저주를 품은 딸과 숨을 거둔 아내의 주검을 뒤로하고, 정체불명의 남자는 언제나처럼 쓱 하고 사라졌다.

그 남자의 활약으로 수도를 구할 수 있었다. 딸 또한 저주를 품었지만 목숨은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루한은 여왕을 잃었고, 루카스는 아내를 잃었다. 딸은 어머니를 여의었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는 진실.

당시 딸은 의식이 없었고, 폭주하는 설원 속에 있던 사람은 자신과 그자뿐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루한의 국서 루카스는 은둔자가 되었다.

여왕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 끝내 얻지 못했던 아내의 마음, 저주를 품은 딸,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를 향한 질투와 고마움.

이 모든 게 섞여 자기혐오를 만들었고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그날 이후, 후드를 깊게 눌러쓴 벙어리 남자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죽은 아내의 유언을 무시라도 하듯이.

루카스는 자기혐오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딸에게 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 났다.

그날 이후, 자신을 원망하듯이 보던 딸의 눈빛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었는데…….

어느 날, 딸이 먼저 폐인이 된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날의 일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것은 루카스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아버지.”

그것은 아버지의 사명이었다.

“저의 영혼과 마나를 바치겠습니다.”

루카스는 섭정으로 복귀했고, 딸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갈아 넣었다.

‘내가 폐인으로 지내던 사이, 재상이 왕국을 완전히 집어삼켰어.’

하지만 역시나 일은 쉽지 않았다.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온다.

‘예나는 지키지 못했지만, 루시만큼은 지켜야 한다!’

그래도 두렵진 않았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딸 루시를 떠올리면 힘과 용기가 솟았다.

‘그자가 오지 않는다면 나라도 딸을 지켜야 해!’

이번만큼은 절대 그 남자에게 질 수 없었다.

회상을 끝낸 루카스는 피식 웃으면서 몸을 풀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당장 죽어도 아쉬움이 없도록!

딸이 자신에게 부탁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각종 마법 서적을 찾아야 했고, 재상의 갑작스러운 칩거를 이용해 마탑은 물론 마녀회와 대신들도 포섭해야 했다.

그는 요즘 들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지켜봐 주시오, 여보. 죽어서 당신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겠소! ……그때는 그 남자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줬으면 좋겠군.”

지금까지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을 오늘도 하늘을 보며 했다.

* * *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볼카 인근의 작은 숲에 있었다.

숲속이었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대규모 벌목이라도 했는지 연무장 몇 개를 합친 것 같은 거대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회색 마녀복을 입은 그녀는 자신의 패밀리어인 회색 까마귀를 쓰다듬으며 표정을 구겼다.

“엘프라니……. 엘프가 대체 왜?”

왕도에 없다 보니 소식이 대체로 느렸다. 방금 요새 상공을 패밀리어로 정찰하고서야 엘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후유증에서 회복하고 나니까 많은 것이 변했네?”

아리아의 핏빛 눈동자가 짜증으로 물들었다.

솔라에게 칼을 맞을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아리아는 본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법 중 하나인 인형술이었다.

어깨에 앉은 패밀리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

물론 그 인형이 죽으면 본신인 아리아는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패밀리어를 잃을 때와 비슷한 피해를 입는다.

아직도 자신을 무심히 가르던 솔라시우스의 검이 생생하다. 그의 차갑고 무서운 금색 눈동자는 잠을 잘 때마다 악몽처럼 꿈에 나타난다.

“듣기론 왕도에서 우리 여왕님이 귀여운 짓을 벌이는 거 같고~.”

아리아는 볼카 요새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어쩐지 복수가 너무 쉽다 싶었어.”

그녀가 본래 계획했던 것과 일이 많이 틀어졌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원래는 암흑대공 둠과 암흑군단을 움직여 고대의 데몬과 문라이트 후작을 묶어 두려고 했었다.

그사이 아리아 자신이 나서서 몰래 태양샘 반지를 훔칠 생각이었고.

볼카 광산 입구는 온갖 결계와 보안 마법이 가득했기에 아리아도 쉽게 갈 수 없었다. 패밀리어로 초입 정찰을 보낸 것도 간신히 한 거다.

가능하면 데몬과 암흑대공, 변경백과 솔라시우스가 싸움으로 정신없을 때 들어가야 했다.

‘솔라시우스의 실력이 내 예상을 훨씬 초월했어. 어쩌면 암흑대공과 막상막하일지도 몰라!’

이 모든 것이 솔라의 존재로 다 틀어졌다. 본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트리겠다는 생각으로 솔라시우스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거늘. 데몬이나 암흑대공에게 차도 살인을 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그녀가 직접 목도한 솔라시우스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대의 데몬이 활동을 멈춘 것도 예상외였고.’

데몬의 깊은 수면(추정)도 그녀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지만, 솔라시우스보단 공헌도가 낮았다.

“부디 그 고기를 먹어 줬으면 좋겠는데…….”

아리아는 자신의 까마귀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녀가 볼카로 보낸 고기는 확실히 맛도 좋고 신선한 고기다.

“듣기론 병사들은 그동안 매일 육포만 먹었다고 그랬지. 신선한 최상급 육류가 왔는데 어떻게 안 먹겠어?”

맛좋고 신선한 고기지만 아리아는 그 고기에 한 가지 수를 썼다.

은밀한 저주를 부여했다. 마법사나 사제도 눈치 못 챌 아주 은밀한 저주.

잔혹하게 고문하다 죽인 짐승의 고기에는 짐승이 생전 느낀 고통과 원망이 강하게 서려 있다. 이런 고기를 먹으면 정신적으로 불안해지고 몸 또한 괜히 피곤해진다.

티는 안 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애초에 들킬 일도 없고, 설령 의심을 받는다고 해도 발뺌하면 그만이다.

“엘프가 변수긴 하지만……. 귀쟁이들은 단명종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꺼리지. 병영에 박혀 나오지 않을 거야.”

딱 하나, 엘프 근위대가 걸렸지만 넘어갔다.

“그 오만한 것들이 단명종이 먹는 고기에 참견할 경우의 수는 0에 가까워.”

아리아 데스모는 엘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다.

‘저 고기를 먹은 상태에선 정신 공격에 아주 취약하지.’

아리아가 노리는 것은 특히 솔라시우스. 그가 저 고기를 먹고서 정신적으로 작은 틈이라도 보였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저주와 정신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특히, 솔라시우스가 많이 먹어 줬으면 좋겠는데~.’

회색 마녀는 차갑게 미소를 지으면서 저 멀리 있을 볼카 요새를 노려봤다.

그녀의 상상 속에 정신 공격에 무너진 솔라시우스가 보였다. 그때가 되면 지난번의 고통과 모욕을 배로 갚아 줄 것이다.

‘함부로 죽이지 않을 거야~. 두고두고 고문하고 실험하고 마지막엔 영혼 없는 하수인으로 써야지.’

그렇게 웃으며 망상을 하고 있는데,

“준비가 끝났다.”

그녀의 뒤에서 흑마법사 지하드의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수고했어~ 지하드.”

아리아가 잔혹하게 미소지으며 쭈뼛이 서 있는 흑마법사를 반겼다.

“너…… 정체가 뭐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그런 아리아를 향해 지하드가 잔뜩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빛과 열에 아주 강한 면역력을 준 거야. 나쁜 건 아니야.”

아리아는 광휘와 뜨거운 열을 발산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답했다. 그녀의 대답에도 지하드의 긴장한 눈은 풀릴 줄 몰랐다.

“오래 살다 보면~ 싸움 실력은 몰라도 잡기술은 확실히 늘더라고.”

지하드의 진지한 눈에 아리아는 그저 차가운 미소만 지을 뿐.

위우우우웅.

잠시 뒤, 아리아와 지하드가 있는 넓은 숲속 공터에 거대한 마법진 수십 개가 빛나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키에에에!

거대한 마법진 속에서 흉측한 모습의 괴물들이 무수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볼카 요새에는 루한 전역에서 보내온 보급품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용병과 모험가를 비롯한 지원 병력도 틈틈이 성벽을 채우고 있었다.

요새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았다. 수적으로 열세지만 보급이 충만하고, 광휘의 기사의 활약 덕분이었다. 거기다 최근 지원 온 엘프 근위대는 상인과 용병, 모험가가 볼카 요새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볼카는 개전 이후 가장 활기찬 분위기를 내뿜었다.

“엘프들이 병영에서 나와 활동하다니……. 로뮤 네가 시킨 거야?”

솔라는 병영을 순찰 돌고 경계를 서며 정령으로 보급품 정리를 도와주는 엘프 근위대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잔소리 좀 했지.”

로뮤가 어깨를 으쓱이며 씨익 웃었다.

본래 엘프는 굉장히 폐쇄적이다. 단명종이 내뿜는 감정과 가파른 시간선에 오염(?)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도 했다.

때문에 본래의 엘프들은 어지간해선 병영에 나오지 않았다.

‘원작 플레이에서도 요정 군단은 유독 베타적이었지.’

그랬던 엘프들이 비록 무표정했지만 외부에서 인간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적대적이고 차가워야 할 태도가 무심함과 무례함 사이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저들을 설득하는 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원작에서는 결국 포기하곤 군대를 아주 따로 굴렸었지.

그랬던 것이 로뮤의 존재 하나로 수월히 풀린 느낌이다.

“이 정도 인원까지는 하이엘프의 권능으로 찍어누를 수 있어.”

로뮤가 요정 숲에서 별종 취급받더라도 명색이 하이엘프. 원작의 요정 군단까진 무리여도 소수의 근위대 정도는 충분히 통솔 가능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보급품 적재 작업이 수월해졌다.

지금도 로뮤를 비롯한 몇몇 엘프들이 그렇게 도착한 보급품을 바람과 땅의 정령으로 옮겼다.

“이 치료 키트는 우리 것과 굉장히 비슷해. 신기하군.”

그러다가 한 엘프가 옮기던 보급품 중 하나를 신기하다는 듯 살폈다.

엘프가 관심을 보이는 보급품이라니? 솔라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갔고.

“……!!”

‘저 키트는 설마?!’

해당 보급품의 정체를 알게 된 솔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신기하군. 정말 우리들이 사용하는 배합과 유사하잖아?”

로뮤마저도 보급품을 보더니 흥미롭다는 눈을 한다.

“이것의 이름이 뭐지?”

로뮤는 이 치료 키트를 가져온 전쟁 상인에게 대륙 공용어로 물었다.

“예? 어! 제국 황실에서 사용한다는 치료제입니다. 아주 효과가 좋더군요.”

전생 상인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엘프를 멍하니 보다가 화들짝 놀라고는 바로 답했다.

“제국 황실에서? 하긴, 그들은 우리와 오래전부터 교류를 해 왔으니…….”

상인의 대답을 들은 로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작권 의식이 없는 엘프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솔라는 성채의 하늘을 보며 애써 모르는 척했다.

“요정님, 이 키트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시지요.”

그때, 전쟁 상인이 엘프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물건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한다. 로뮤가 먼저 말을 건 것에 자신감과 호기심이 생긴 모양.

“우리들이 사용하는 연고와 비슷하더군.”

“그러고 보니 이 치료 키트, 여기 계시는 로안 기사님이…….”

“!!”

이를 본 솔라가 속으로 기겁했다. 눈으로 죽일 듯 전쟁 상인을 노려봤는데 로뮤에게 정신이 팔렸는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

‘여기서 저 치료제의 이름까지 밝혀지면 끝장이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저 치료제의 이름은 ‘로안 키트’일 터.

로뮤와 엘프들이 그에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이상하게 쪽팔릴 것 같았다.

“이봐…….”

솔라는 급히 전쟁 상인에게 말을 걸어 다른 일을 시키려 했다.

“근위대장 로뮤, 봐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찰나, 정령사로 보이는 한 엘프가 나타나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무슨 일이지?”

표정이 심각한 엘프 정령사의 등장에 로뮤의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향했고 솔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쟁 상인은 열었던 입을 닫으며 두 엘프를 번갈아 보았다.

“이 성채로 온 물품 중에 불길한 것이 있습니다.”

엘프 정령사의 말에 로뮤와 솔라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로안, 내 부하들이 이상한 걸 발견한 모양이야.”

“가 보지.”

솔라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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