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49.
정령사 엘프가 안내한 곳은 식료품이 모인 창고였다.
그곳에는 정령사 엘프뿐만 아니라 몇몇 엘프들도 추가로 서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미간을 찡그리며 코를 막고 있다는 것.
“오라버니!”
“리나?”
추가로 루나 또한 엘프들과 함께 창고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 상자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솔라와 로뮤를 안내한 엘프가 인상을 찡그리며 상자를 가리켰다.
“아니! 그냥 고기라니까 그러네!”
그런 엘프들을 향해 한 관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솔라는 엘프와 인간 사이를 잇는 역할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오오! 로안 기사님! 광휘의 기사!”
솔라가 나타나자, 관리가 성자라도 마주한 듯 찬양하려 든다.
이를 본 루나가 옆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다.
“무슨 일인지 말부터 해. 성호 좀 제발 그만 긋고…….”
솔라는 자신을 향해 기도까지 올리려는 관리를 간신히 제지했다. 그의 얼굴과 귀에는 부끄러움과 부담스러움이 보였다.
로뮤가 그런 솔라를 재밌다는 눈으로 지켜본다. 한편으론 그도 이상한 악취를 맡았는지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글쎄! 엘프들이 이 상자들에서 불길한 냄새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관리가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불길한 냄새?”
관리의 말에 솔라는 냄새를 맡아 보려 했다. 하지만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는 모르겠군.”
그는 흡흡거리며 동생 루나를 쳐다봤고.
“나도 마찬가지야, 오라버니.”
루나 또한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 이 말입니다! 이건 루한의 재상이신 아리아 데스모 공작께서 직접 보내신 귀하고 맛좋은 고기들입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상자 하나하나 보존 마법이 인챈트된 마도구지요.”
“재상……?”
관리의 말에 솔라의 표정이 굳었다.
“……한번 열어 보도록.”
“예!”
솔라의 말에 관리가 기다렸다는 듯 쌓여 있는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안에서 도축한 고기가 나왔다. 돼지를 도축한 모양.
“우욱!”
“으음!”
“단명종 놈들, 저런 역겨운 걸 먹다니……!”
“쉿! 입조심해!”
상자가 열리자 엘프들이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히익!”
이번엔 루나 또한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굳었다.
“다른 것들도.”
하나만 열면 안 될 것 같아서 솔라가 직접 무작위로 10개의 상자를 더 열었다.
“평범한 고기 같은데?”
그는 직접 고기의 냄새도 맡았고, 만져도 보았고, 단검으로 살짝 살라서 맛까지 보았다.
“아니야! 이 고기들 뭔가 이상해…….”
솔라의 말에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긴 그렇지만 되게 불길해. 이건 내 사…… 전공 마법의 감이야. 원혼이 녹아 있는 것 같아.”
사령술사인 루나가 불길하다고 말했고.
“확실히…… 특별할 게 없는 고기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군. 불길한 냄새가 나.”
로뮤 또한 루나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엘프들 중 유일하게 코를 막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악취를 맡는 것은 분명한지, 늘 밝거나 평온했던 그의 얼굴이 모처럼 찌푸려졌다.
“아니! 엘프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까?”
관리는 엘프와 대화하길 포기한 듯 솔라에게 대신 하소연했다.
“천만에, 우리도 제한적이지만 육식을 한다. 보통 자연사한 고기를 취하지.”
관리의 말에 로뮤가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으로 이 고기에서 불길한 영혼의 냄새가 난다. 아주 지독한 방법으로 고문해서 도축한 것 같은 냄새가.”
“맞아! 로뮤 오라버니 말이 정확해! 이 불길함은 짐승의 영혼 같은 거였어!”
로뮤의 말에 옆에 있던 루나가 맞장구쳤다. 둘은 그사이에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작게 하이파이브까지 한다.
‘로뮤 오라버니?’
루나의 입에서 나온 말과 둘의 친밀함에 솔라는 눈을 크게 떴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으음”
로뮤와 루나 그리고 엘프들이 한입으로 이렇게까지 말하자 솔라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맛은 이상 없었는데 괜히 찜찜하군.’
아까 맛본 고기 한 점이 찜찜했다. 혹시 몰라 맛만 보고 바로 뱉긴 했는데…….
“일단 이 고기들은 배급을 보류한다. 어차피 마도구 상자에 있으니 오래 보관도 가능할 거다. 마지막에, 정 먹을 게 없을 때 먹는다.”
“하지만…… 병사들이 모처럼 신선한 고기가 왔다고 해서 기뻐했는데……. 다들 육포에 질린 참이거든요.”
“아주 못 먹게 하진 않겠다. 하지만 엘프들의 감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동생도 마녀라서 감이 좋은 편이고. 일단은 지켜보자.”
“알겠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로안 기사님의 지시라면 볼카의 모두가 납득할 겁니다.”
솔라는 그렇게 일을 마치곤 로뮤와 루나와 함께 창고를 벗어났다.
“로안, 결국 저 고기를 먹일 건가? 참고로 우린 절대로 먹지 않을 거야. 될 수 있으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군.”
창고에서 멀어지자마자 로뮤가 솔라에게 말했다.
“보급 중 일부를 인간들에게서 받기로 방침을 정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나도 입지가 곤란해져.”
로뮤가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야! 저 고기 배식할 때는 나한테 꼭 말해 줘! 그날은 따로 먹을 테니까.”
옆에 있던 루나도 동참했다.
“으음…….”
그들의 말에 솔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고 보니, 재상이 꽤 오랫동안 영지에 칩거 중이라 했지? 내가 아는 재상이라면 분명 저 고기에 무슨 짓을 했을 거야. 엘프와 사령술사가 불길하다 했으면 무조건이다.’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로뮤, 이따 밤에…… 정령과 마법을 이용해서 저 고기가 있는 창고만 태워 줘. 문라이트 후작에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괜찮겠어? 인간들이 많이 기대하고 있다고 들었어. 괜히 저들과 우리의 사이가 더 나빠질 수도 있어.”
“제국군 짓으로 돌리면 돼.”
“과연 믿을까? 그러기엔 우리가 이미 너무…….”
“걱정 마, 내가 말할 거니까. 너흰 가만히 있어.”
“많이들 의심할 거야.”
“의심을 한다고? 내 말을? 이 요새에서?”
솔라는 로뮤의 우려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
솔라의 미소를 본 로뮤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서 피식 웃었다.
“기꺼이 협조하지.”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자, 제자이며, 친구이기도 한 남자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그날 새벽, 볼카 요새에서 불이 났다. 식량 창고 하나가 불탔고, 그 안에 있던 재상이 보낸 고기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탔다.
그리고 며칠 후.
뿌우우우-.
제국의 암흑군단이 뿔 나팔 소리에 발걸음을 맞췄다.
무려 5,000이 넘는 최정예들. 병사 하나하나가 하급 기사 수준이라는 암흑군단 전체가 볼카 요새로 진군한다.
최선두에는 대륙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도살자 대공이 앞장섰다.
비슷한 시기, 볼카 요새 인근의 숲에서도 흉측한 키메라 군단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 * *
볼카 요새.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살기가 문라이트 후작의 볼을 찌른다.
“올 것이 왔군.”
변경백의 영주는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요새에 진을 친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한다.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고 승리했다.
충분한 보급과 무엇보다 광휘의 기사의 존재로 사기는 높았다.
재상이 보낸 신선한 고기가 제국군의 마법으로 불타 버린 게 아쉬웠지만, 그게 사기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바로 광산으로 가자.’
솔라시우스는 저 멀리 움직이는 제국군을 보며 생각했다.
이틀 정도 더 기다렸다가 놈들이 안 움직이면 광산으로 갔다 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틀째 되는 날 딱 맞춰 움직여 주는 제국군 덕분에 솔라는 광산으로 떠나지 못했다.
그는 아쉬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도했다.
‘놈들이 하루라도 늦게 움직였으면 큰일날 뻔했어.’
로뮤와 엘프 지원군이 있다지만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특히나 암흑대공 둠은 로뮤와 문라이트 후작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잡을 수 있을 터.
“적들은 숫자도 많고 강하다.”
장궁을 어깨에 메고서 솔라 옆에 서 있던 로뮤가 나직이 말했다.
요새의 가운데 성벽에는 엘븐나이트와 엘븐레인저가 밀집해 있었다.
마법사들이 있는 망루에는 10여 명의 엘리멘탈리스트들이 마법과 정령술을 준비 중이다.
쿵쿵쿵쿵.
지평선 너머 적들의 실루엣이 보였고 놈들의 북 치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도 여진처럼 울렸다.
“로안.”
멀리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로뮤가 평온한 눈동자로 솔라를 불렀다.
솔라는 말없이 고개를 로뮤가 있는 곳으로 돌렸다.
“왜 우리가 여기로 왔는지 아나?”
로뮤의 말에, 솔라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의문이긴 했다. 아무리 언약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리스크를 부담할 필욘 없었다. 솔라시우스가 살아 있다고 해도 사실상 제국은 이미 끝났다. 엘프 입장에서는 이를 어겨도 크게 피해 입을 것은 없다.
그저 두고두고 찜찜할 뿐이다. 그 찜찜함 때문에 소중한 여왕의 근위대를 대거 투입한 것부터가 의문이긴 했다.
“언약 때문은 아닌가 보군.”
“그래.”
로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향했다.
“세계수는 미래를 볼 수 있어. 정확히는 다른 세계선에서의 일들을 볼 수 있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솔라가 로뮤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편지에 담긴 세계수의 신탁으로 예상은 하긴 했지. 세계수가 원작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원작 때보다 많이 달라진 것이 세계수의 개입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가정도.’
여왕 루시푸르네의 반응. 갑작스러운 루카스의 복귀. 그리고 이번 엘프 근위대의 파병.
‘여왕의 팔찌가 세계수의 잎으로 된 팔찌였지. 전대 여왕 예나체리나가 쓰던…….’
세계수가 개입했다고 가정하면 어째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세계수가 너에 대한 신탁을 내릴 때, 덧붙여서 말한 것이 있어. 바로 우리 엘프들에 대한 신탁이었지. 누이는 너에 대한 신탁은 편지에만 몰래 적고, 엘프 전체에 대한 신탁은 정식으로 알렸지.”
“신탁이 뭐였지?”
“설원의 가호가 무너지면 다음은 세계수의 가호라고. 흑태자는 악황제가 되고 악황제는 마왕이 될 것이고, 결국 설원의 가호를 범하고 세계수를 불태울 것이라고.”
전방을 향하던 로뮤의 붉은 눈동자가 솔라의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100퍼센트군. 지구로 돌아가는 거, 의외로 쉬워질 수도 있겠어.’
솔라도 로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 누이라도 100명의 근위대를 한번에 공간 이동시키는 것은 무리야. 세계수가 도와줬고 장로들이 묵인했으니까 된 것일 뿐.”
“이왕 도와주고 묵인할 거면 동맹이랑 답장도 바로 해 주면 안 되는 거였나?”
“그거랑 이건 또 다른 모양이야. 세계수도 거기까지는 터치 안 했고.”
엘프들의 이상한 사고방식에 듣는 솔라도, 말하는 로뮤도 고개를 절레 저을 뿐이다.
“로뮤 오라버니!”
그때, 로안과 로뮤 사이에 있던 루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하렴, 리나야.”
루나가 자신을 부르자, 로뮤가 고개를 숙여 키가 작은 루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기…… 이번 전투가 끝나면 요정 숲으로 돌아가는 거야?”
“근위대는 여기에 남을 거야. 하지만 나는 로안과 함께 돌아가겠지. 너도 원한다면 함께 가도 된다. 애초에 거기엔 네 어머니 무덤도 있으니까. 갈 자격은 충분해.”
“그럼…… 혹시 나 말고 한 명 더 갈 수 있을까?”
“한 명 정도야 가능할 거야. 대신 그 사람이 사고를 치면, 리나, 네가 책임져야 해.”
“물론이야! 고마워!”
루나와 로뮤의 대화는 아주 친밀해 보였다.
솔라는 그런 둘을 보면서 신기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