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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52화 (52/212)

제52화

#52.

프리드리히와 유리아는 후작의 외침 덕분에 엎드릴 수 있었고 덕분에 화를 면했다.

“으으으…… 병, 병력이!”

“말도 안 돼……!”

하지만 초토화된 요새를 보자, 둘은 전의를 완전히 잃고야 말았다.

“모처럼 땀을 흘릴 생각을 하니 흥분되는구나.”

모두가 두려움에 떨든, 고통에 신음하든, 암흑대공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담겨 있을 뿐.

“놈을 성벽 밖으로 밀어야 하오!”

급히 일어서서 검과 몸에 오러를 발현한 지크문트가 외쳤다.

“흐아압!”

로뮤 또한 기합을 내지르며 대공을 향해 정령이 가득 담긴 장풍 같은 화살을 쏘았다.

“내 오랜 유흥 변경백 군주여, 새로운 희열이 될 하이엘프여. 나와의 싸움을…… 즐기도록.”

이를 본 둠은 다시 한번 3미터가 넘는 검을 풍차처럼 돌리려 한다.

로뮤의 화살이 저 검기에 흩어졌다.

부아아아악!

“엎드려라!!”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한번 급히 엎드려야만 했다.

퍼엉― 콰아아앙― 콰르르륵.

둠이 검을 휘두를수록 볼카 요새는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고. 기계처럼 성벽으로 올라왔던 암흑군단의 병사들도 그 검기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둠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누구도 이 유흥을 방해한다면 용서치 못하겠다는 듯.

그쯤 되자, 암흑군단의 병사들도 성벽에 오르는 것을 멈추곤 말없이 뒤로 물러날 뿐이다.

“이젠 주변의 부질없는 것들도 치웠으니.”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사기 넘치던 요새가 무너지고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일어선 자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즐기도록.”

도살자 대공은 오히려 이게 마음에 든다는 듯 죽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마치 흑백 영화의 흑백 세상처럼 주위는 회색으로 물들어, 저벅저벅저벅 무겁고 적막한 잿빛 발소리만이 순간의 색을 더할 뿐.

암흑대공의 말처럼 이제는 개미 따위를 걱정하며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서 있는 사람보다 누워 있는 사람이 더 많은 회색 성벽 위, 절망을 안고 두려움을 명확히 느끼면서도 검을 쥐고 일어서는 이의 모습은 진정 용기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문라이트 후작은 증오를 표정에 가득 담으며 검을 들었다.

그의 눈에 전멸하다시피 한 부하들이 보였다.

“아버지!”

“…….”

천만다행으로 그의 장남과 막내딸은 무사하다.

“최대한 멀리 가 있어라! 이건 명령이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 봤자 도움도 안 돼! 후문으로 가서 로안 경을 불러!”

후작은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외쳤다.

“도대체 이런 자를 상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버틴 것이오?”

옆에서 먼지를 털고 자세를 잡은 로뮤가 질렸다는 눈으로 후작과 대공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 도살자 놈 취향이 맛있는 건 아껴 먹는 편이라서.”

로뮤의 질문에 후작이 치를 떨면서 말했다.

“아주 좋은 자세야. 난 용기 있고 명예를 아는 이를 사랑한다.”

이를 본 둠은 만족한 웃음으로 몸의 관절을 우두둑 풀었다.

도살자 대공의 유일한 유희는 도살뿐.

발버둥 치는 강한 상대는 도살의 재미를 더 크게 만들어 준다.

“선공을 허락하마.”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고.

“성의는 거절하지 않는 편이지.”

“기꺼이!”

둘은 곧장 둠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뮤와 지크문트의 검에서 각자의 오러가 흘러나오더니 둠을 향해 휘둘렀다.

카아아앙!

둘의 검기를 둠은 자신의 대검을 휘둘러 쳐냈다.

“그래! 이 감각!”

거대한 충격파로 로뮤와 후작은 성벽 아래로 튕겨져 나갔다.

“좀 더 분발하라. 그 로안이라는 놈이 올 때까지 내 흥을 식지 않게 하라.”

성벽 아래로 추락한 둘을 향해, 암흑대공이 대검을 높이 치켜들고 뛰어내렸다.

“……!”

“!!”

둘은 하늘에서 쏘아지듯 내려오는 회색 덩어리에 급히 몸을 굴려 일으킨다.

쿠웅

묵직한 착륙음과 함께 회색 대검이 아까처럼 풍차 돌기를 하려 한다.

“유리아! 프리츠! 엎드려!”

이를 본 후작이 급히 뒤쪽을 보며 외쳤다.

아직 그의 자식들이 대공의 사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

부우우웅!

후작의 바람과 달리 둠의 오러 먹은 대검을 크게 휘두르려던 때!

촤촤촤촤촥!

검을 휘두르려던 암흑대공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더니 그의 몸에서 차가운 서리가 맺혔다.

대공의 몸은 급속히 차가워졌는지 입에서는 입김마저 났다.

“설원의 가호!”

이 현상의 정체를 확인한 로뮤가 감탄하듯 외쳤다.

부우우웅.

보통은 즉사해야 할 설원의 징벌이었지만 둠은 몸이 좀 느려진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맹렬히 움직였다.

“크흐흐흐흐흐!”

대공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설원의 징벌을 받았음에도 무겁고 차갑게 웃을 뿐이다.

카아앙!

문라이트 후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가 360도 휘두르려던 대검을 검기로 쳐 냈다.

대공의 풍차가 시작도 못 해 보고 멈춰 섰다.

로뮤 또한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이 도살자의 목을 노렸다.

서걱!

하이엘프의 오러를 담은 곡도가 대공의 목을 베었다.

대공의 목을 분명 베었지만 지상에 착지한 로뮤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무슨 놈의 살가죽이!”

베었을 때의 감촉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오러를 담았음에도 대공의 목은 단단하고 질겼다. 뒤를 돌아 대공을 보니, 피를 좀 흘리고 있을 뿐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인다.

마치 몸속에 트롤의 피라도 흐르는 듯 그 상처마저도 순식간에 회복 중이다.

잠시 대치 상태로 서 있었다.

“저 도살자를 지금까지 어떻게 상대했냐고 물었었지?”

문라이트 후작은 대공의 틈을 노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자가 봐준 것도 있지만 설원의 가호가 아주 결정적이었지. 병사와 기사들을 제물 바치듯 암흑대공에게 돌격시키고…… 설원의 징벌이 발동되면 그때 내가 공격을 했었지.”

문라이트 후작의 얼굴에 씁쓸함이 보였다.

‘그나저나 볼카는 사실상 설원의 가호가 없다시피 한 곳인데……. 윈테이라를 통해 여왕 폐하가 여기에 있어서 그런가?’

후작은 씁쓸함을 삼키면서 유독 잘 발현되는 설원의 징벌에 의문을 품었다.

“…….”

설명만 들었을 뿐인데, 로뮤는 지금까지 변경백의 기사와 병사들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해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변경백 각하! 힘내십시오!”

“루한의 소드 마스터여! 부디 승리를!”

“신이시여! 우리 영주님을 가호하소서!”

그때, 저 멀리서 변경백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이 싸움을 멀리서 보고 있었다.

“근위대장 로뮤! 우리도 돕겠다!”

마찬가지로 얼마 남지 않은 엘프 근위대가 이 싸움에 참전하려 한다.

“아니! 그대들은 이후의 싸움에 대비하시오!”

엘프들이 참전하려 하자, 로뮤가 급히 만류했다.

“잘 생각했도다. 개미가 오면 밟을 수밖에 없으니까.”

둠은 후작과 로뮤 뒤에 있는 이들을 마치 개미 보듯 하면서 말했다.

파바바밧!

그리고 대공은 냅다 돌진을 감행했다.

지금까지 늘 선공을 허용하던 둠이 처음으로 기습적인 선공을 개시한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설원의 징벌은 좀 힘들거든.”

이유는 바로 설원의 가호 때문.

하지만 도살자 대공이라는 이름답게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매서웠고 파괴력도 변함없었다.

암흑대공은 그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짙은 회색의 오러를 그의 대검과 전신에 가득 담고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그래! 오늘 기어코 결판을 내자!”

문라이트 후작이 이를 악물고 검에 그의 모든 오러를 담아 대공과 맞붙었다.

“살다 살다,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줄이야!”

로뮤 또한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모든 오러를 검에 바르고서 후작과 함께 달려들었다.

셋은 한 지점에서 충돌했다.

―!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음이 찰나를 채웠다.

우아아아아앙!!

얼마 후 충격음과 충격파가 터졌고, 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충격파에 휩쓸려 뒤로 넘어졌다.

30초 정도 흐른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최후의 합이 되어 버렸군.”

제일 먼저 들린 것은 끔찍하게도 암흑대공의 목소리.

“쿨럭…… 크으으윽!”

뒤이어 들린 소리는 절망스럽게도 문라이트 후작의 신음 소리.

“…….”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하이엘프 로뮤의 모습이다.

“아쉽군.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암흑대공은 이렇게 싸웠음에도 땀 한 방울 이마에서 흘리지 않았다.

“좀 더 아껴 두고 싶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겠군. 다른 약속도 있어서 말이야.”

둠은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끝내 광휘의 기사는 오지 않는군. 그 마녀가 복수에 성공한 모양이야.”

그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진 후작과 로뮤가 아닌, 볼카 요새 중심부에 있는 광산으로 향했다.

“충분히 즐거운 유흥이었다. 너희의 시체는 박제해서 나의 저택 입구에 장식하도록 하지. 대공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굳이 명예를 걸어야 하나? 싶은 말을 끝으로 대공을 자신의 대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안 돼!!”

그때, 멀리서 분홍 머리를 한 여기사가 달려와 대공 앞에 섰다.

유리아 폰 문라이트는 벌벌 떨면서도 용기를 담아 둠에게 검을 겨눴다.

“봄의 축복을 받은 아이로구나.”

둠은 유리아를 흥미롭다는 듯 보았다.

“하아압!”

유리아는 그런 둠을 향해 달려들었고,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퍼어억!

“재의 마녀가 널 보면 죽이지 말라고 그랬지.”

둠은 검조차 휘두르지 않고 한 손으로 유리아를 제압했다.

“그래도 봄의 기운 정도는 조금 취해도 되겠지?”

암흑대공은 유리아를 후려친 손을 뻗었다.

“아아악!”

의식을 잃지 않았던 유리아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움츠리며 비명 지른다.

“오랜만에 맛보는 분홍색 기운이 참으로 좋구나.”

둠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려움을 안고 싸우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니! 기사도를 펼쳐라!”

“용기의 여기사 유리아 아가씨를 따르라!”

“후작 각하를 지키자!”

우와아아아!

지크문트와 유리아가 쓰러졌지만. 변경백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둠에게 달려들었다.

“단명종에게 명예가 뒤처져선 안 된다!”

엘프들도 나섰다.

“아주 재밌군, 재밌어!”

이들을 보는 둠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서렸고, 유리아의 봄의 기운을 흡수하던 것을 멈추고는 다시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래, 개미는 밟아 줘야 제맛이지.”

그는 더 세게 올 설원의 징벌을 기대하며 회색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처어억!

그의 회색 대검이 크게 움직인다.

이를 본 모두가 이를 악물고 발을 멈추지 않았다. 고기 방패가 되어 자신들의 영주와 대장을 지키려 한다.

부우우웅!

그렇게 회색 오러가 가득 담긴 대검이 크게 휘둘리려 할 때.

화아아아앗!

눈부시게 밝은 광휘가 추락하듯 착지하더니, 암흑대공 바로 앞에서 터졌다.

광휘의 폭발에 둠이 일으켰던 회색 오러가 흩어졌다.

“호오!!”

암흑대공 둠은 눈앞에 나타난 광휘를 휘날리는 기사를 보며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 오러를 단번에 파훼하다니! 역시…… 전하시군요. 피는 어디 안 가나 봅니다.”

도살자 대공은 로안 샬루트의 정체를 아는 모양. 그는 솔라시우스를 감탄 서린 눈으로 관찰했다.

“그 어리던 분이 이렇게 장성하시다니……. 처음으로 진심으로 싸워 볼 수 있겠습니다.”

둠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궁극기 ‘태양의 후예’를 발현한 솔라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태양검을 둠에게 겨눴다.

파앗!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둠에게 달려들었다.

―! ―! ――!!

빛의 기사가 잿빛 기사를 몰아붙인다.

검의 합이 다섯 번 이뤄졌다.

“……?!”

흥미와 광기에 차올랐던 둠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

처음으로 당혹과 경악이 얼굴에 어렸다.

처음으로 암흑대공이 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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