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54.
한편, 볼카 요새의 정문 쪽에서는 황금빛과 잿빛의 오러가 거칠게 어우러지는 중이다.
제국의 암흑대공과 루한의 광휘의 기사의 격돌!
싸움은 믿을 수 없게도 황금빛 오러가 회색 오러를 압도하고 있었다.
“……!”
꿈꿔 왔지만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광경.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쩍 하니 벌리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아아아……!”
유리아는 반쯤 울 것 같은 눈으로 저 앞의 광휘를 두른 남자를 보았다.
“……쿨럭, 쿨럭”
내상을 입어 여전히 입가에 피를 흘리는 문라이트 후작은 마른기침을 하면서도 눈앞의 격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광휘의 기사!”
“로안 샬루트!”
“신께서 그를 보낸 게 맞았어! 신께서 여왕을 보호하라고 그를 보낸 것이야!”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것도 모자라, 그 암흑대공을 압도하는 솔라시우스의 모습.
그 모습을 본 변경백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성호를 그으며 구원의 눈물을 흘린다.
“도대체 로안 샬루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리 단명종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엘프들 또한 전투에 개입할 생각도 못 하고 광휘의 향연을 바라봤다.
그들의 리더인 로뮤는 여전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엘븐레인저 셋이 그를 치료 중이었다.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모두가 승리를 넘어 희망을 예상했다.
빛의 오러가 회색 오러를 압도할수록, 밀어낼수록, 희망은 짙어졌다.
모두의 희망을 어깨에 진 솔라의 금색 눈동자에는 고요함과 무심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
반대로 도살자 대공의 표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굳어져 있었다. 탁한 눈동자에는 경악과 분노 그리고 불신이 번갈아 보였다.
이마에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땀이 촘촘히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황홀하게 싸우고 있는데.
까앙, 땡그랑!
모두의 희망을 박살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거…… 검이!”
“로안 기사님의 검이 부러졌어!”
바로 솔라시우스가 애용하던 드워프제 검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회색 대검과 수백수십 번을 부딪쳤던 검이 기어코 부서졌다.
태양의 오러를 두르고 암흑대공의 거대한 검을 받아 내다가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럴 것 같긴 했지.’
솔라시우스는 깔끔하게 절반으로 부러진 검을 보았다.
이름난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검답게 꽤 만족스러운 무기였다. 이렇게 부러지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하지만 암흑대공 정도 되는 적과, 딱 봐도 마검으로 보이는 검과 싸우다 수명을 다한 것이다. 이 정도면 녀석에게 명예로운 최후기도 하다.
챙그랑.
솔라는 미련 없이 부러진 검을 놓았다.
눈앞에 회색 대검을 든 암흑대공이 보였다.
“안 공격하나?”
“다른 무기를 들어라.”
대공의 말에 솔라는 피식했다. 밀리는 중에도 꼴에 자존심을 지키는 꼴이 재밌었다.
“그러지.”
솔라는 대공의 호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설마…… 설마, 설마, 설마!!]
허리에 있던 푸른색 마검, 루시를 꺼내려 했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로안, 나의 주인이여!]
불길함을 느낀 루시가 급히 솔라를 불렀다.
동기화 수치를 가장 아래로 낮추는 것도 동시에 했다.
“미안해, 루시. 하지만 당장 쓸 게 너밖에 없어.”
[이…… 이해한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투용이…….]
방랑 기사로 활동하는 솔라의 마검이 되었다. 루시는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 같긴 했지만, 그 첫경험(?)이 암흑대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내가 그런 격한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동기화를 잠시 풀어야 할까?’
루시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부러지진 않겠지?”
전투의 열기에 살짝 흥분한 것 같은 솔라가 루시를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잠들 수 있으면 잠시 자도 돼. 금방 끝낼 테니.”
[……!]
나름 루시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지만, 루시는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로안 경!”
그때, 뒤에서 솔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쿨럭! 그 마검을 휘두를 생각인가?!”
후작은 심하게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를 흘린다.
“아버지!”
유리아가 그런 후작을 옆에서 간호 중이다. 정작 아버지를 간호하는 그녀의 안색 또한 창백하긴 마찬가지지만.
“검이 없어서…….”
솔라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자 문라이트 후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검을 솔라에게 던졌다.
솔라는 능숙하게 검을 잡았다.
“빌려 주는 거요!”
솔라는 후작이 건넨 검을 보았다.
“좋군. 이름이 뭡니까?”
“스누마누스.”
과연 루한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가 쓰는 검.
전투에 적합한 마검이다. 에고는 없어 보이지만 암흑대공의 검격을 지금까지 수없이 막아 낸 녀석이기도 하다.
[휴우…….]
루시는 솔라의 손에 후작의 검이 들리자, 진심을 안도했다.
‘후작에게 너무 고맙군.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면 솔라에게 검을 구해 줘야겠어.’
생각해 보니 그에게 영지나 작위만 줄 생각을 했지, 가장 근본적인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이러고서 솔라를 도왔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괜히 부끄러웠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검 같은 거였을 텐데!
‘왕궁의 보고를 뒤져서라도 그에게 어울리는 검을 찾아야겠어! 볼카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선전관을 통해 전해 줘야지!’
여왕은 굳게 결심했다.
여왕의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작의 검 스누마누스를 손에 쥔 솔라시우스는 암흑대공 둠에게 검을 겨눴다.
‘빨리 끝내자.’
허리춤에 있는 마검 루시의 냉기가 벌써 절반 정도로 줄어든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어떻게 총량을 인지할 수 있는지 이유는 모른다. 그냥 자연스레 느껴졌다. 그가 이 마검의 주인이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타아앗.
솔라는 말도 없이 기습적으로 둠에게 돌진했다.
둠 또한 그의 행동을 관찰 중이었기에 바로 대응에 나섰다.
―!!
문자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충돌음이 다시 한번 공간과 순간을 채웠고, 거대한 회색 대검과 진한 빛의 장검이 공간과 순간 사이에서 춤을 춘다.
“재밌군.”
“마찬가지다.”
대결을 펼치는 솔라시우스와 둠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분명 밀리고 있음에도 암흑대공 또한 처음으로 살아 있는 자의 얼굴을 했다.
솔라시우스 또한 처음으로 전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피로가 느껴질 정도로 운동을 하고 있는 느낌. 이 운동을 끝내고 따듯한 물로 씻은 다음에 침대에 누우면, 정말 깊고 아늑한 숙면을 이룰 것 같다.
‘아깝군.’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이런 자가 적이라는 사실이. 또 오래 즐기지 못하고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군.’
이건 암흑대공 둠도 마찬가지였다.
파아앗!!
둘은 각자의 비기를 서서히 준비하면서 최후의 1합을 휘둘렀다.
고오오오.
무형의 에너지가 회색과 황금빛의 두 점으로 압축되었다.
“흐읍!”
“하앗!”
솔라와 둠이 동시에 숨을 참았고 기합을 내질렀다.
번쩍!
작지만 뇌리에 강렬한 작은 폭발이 터졌다. 빛으로 된 폭발.
섬광탄 같은 빛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서로 등을 맞대고 고고히 서 있는 두 기사의 모습.
그리고 이윽고.
서거거걱!
암흑대공 둠의 양 손목이 절단되는 것으로 승자가 결정됐다.
주르륵.
솔라 또한 등에 깊은 검상이 났다. 피가 제법 흘렀다. 피부에 빛의 실드를 펼친 덕분에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
“!!”
물론 이를 본 루시와 유리아는 경기를 일으키듯 눈을 떨었지만.
쿠웅!
둠의 양쪽 손이 절단되자, 그가 들고 있던 대검 또한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휘익, 처억!
솔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둠의 목에 검을 댔다.
그의 발은 바닥에 떨어진 대공의 검을 꾸욱 밟았다.
“크흐흐흐…… 흐하하하하핫!!”
양손이 절단되었음에도,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암흑대공은 당황하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오히려 광소를 내지를 뿐이다.
“이…… 이겼어?”
“저 도살자 대공이 진 거야?”
“맙소사…… 이게 정말…… 꿈은 아니겠지?”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특히 변경백인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소망해 온 바람이 눈앞에서 이뤄지자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 모양.
“……내가 졌다. 비록 상성에서 불리했다고 해도 이 또한 실력이라고 봐야 하지. 흐흐흐……. 인정하겠다. 광휘의 기사여, 아니…… 제국의 유일한 적…….”
“그냥 로안 샬루트라고 불러.”
솔라는 대공의 입에서 자신의 본래 신분이 나오려는 느낌을 받자마자 바로 말을 끊었다.
‘제국은 내 정체를 알고 있군.’
제국이 알게 된 상황에서 숨길 필요가 왜 있냐 싶겠지만, 솔라는 가급적이면 숨기고 싶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괜히 마왕을 없애고 지구로 갈 때 귀찮아질 수 있었다.
‘세계각성자협회장도 거절한 내가 미쳤다고 황제가 될까?’
이 세계의 황제보다 지구의 각성자협회장이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닌다.
인구가 1억도 안 되는 중세 판타지 세계의 황제 VS 대전쟁으로 많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수십억의 발전된 인류가 있는 지구의 수장.
대충 보아도 견적이 나온다. 하지만 그걸 고사한 것이 태광휘였다.
“그래, 광휘의 기사 로안 샬루트여! 인정한다. 그대는 진정한 광휘로다.”
암흑대공은 그렇게 웃더니 이윽고 표정을 굳혔다.
“흐읍!”
그리고 힘을 팍 주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악.
잘렸던 그의 양손에서 새로운 손이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
그런 대공을 본 솔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하나? 루시의 냉기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는 또 다른 전술을 고민했다.
피슝―!
그가 막 다른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볼카 요새의 중심부가 있는 쪽에서 마법 신호로 보이는 불빛이 높이 날아올라 터졌다.
“이만 가 봐야겠군.”
암흑대공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대뜸 요새 중심부로 튀었다.
“?!”
솔라가 급히 둠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뿌우우우.
쿵쿵쿵쿵.
대공이 중심부로 사라지자마자, 암흑군단이 빠르게 몰려오기 시작한다.
이를 막을 볼카의 병력은 대공과의 싸움에서 괴멸한 상황.
“…….”
솔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우우웅.
그때, 그의 발 아래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들렸다.
‘대공의 마검?’
도살자 대공이 도마뱀 꼬리처럼 남기고 간 양손에 쥐어진 거대한 대검. 그 대검이 그의 발아래서 공명 중이다.
솔라는 한 손으로 공명 중인 대공의 거대한 대검을 잡았다.
칼자루를 쥐고 있던 대공의 잘린 양손은 그가 검을 만지자마자 재가 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
어지간한 사람은 휘두르기는커녕 들지도 못할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반쯤 기울여 들었다.
촤아아아.
그러자 거대한 대검이 빛을 내면서 순식간에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3미터를 거뜬히 넘었던 대공의 대검은 어느덧 일반적인 롱 소드 크기의 회색 검으로 변했다.
“암흑대공의 마검, ‘제노사이드’네.”
옆에서 문라이트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제야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인지 몸을 잘게 떨면서 솔라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잘 썼습니다.”
솔라는 그런 후작에게 그의 마검 스누마누스를 건넸다.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광산으로 가시오, 광휘의 기사여!”
검을 돌려받은 후작이 결의가 선 눈으로 말했다.
“태양샘 반지를 빼앗기면 이 모든 희생이 의미 없어지니까.”
그의 말에 솔라는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히 아직 의식을 못 차린 로뮤에게 시선이 좀 더 오래 갔다.
반대쪽에선 암흑군단이 성벽을 넘어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거대한 그림자의 물결이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파도 속에서 그림자를 입은 언데드들도 중간중간 보였고, 그 중심에 서핑 보드 타듯 빗자루를 밟고 있는 마녀가 있었다.
‘죽음의 군단!’
솔라는 이것의 정체를 잘 알았다. 바로 원작에서 보았던 죽음의 대마녀의 죽음의 군단.
‘벌써 이렇게 활용 가능하다고? 완성된 로사리오 덕분인가?’
솔라는 파도처럼 다가오는 자신의 여동생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도우러 왔어!”
“리나, 혹시 오면서 암흑대공을 못 봤어?”
“암흑대공? 모르겠는데? 어떻게 생겼어?”
솔라의 물음에 루나가 되물었다.
“아니야. 엇갈린 모양이군.”
솔라시우스는 동생의 금발과 금안을 보면서 대충 짐작했다.
“그나저나…… 다친 거야?!”
루나가 문득 솔라의 등에 난 상처를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
“기다려 봐.”
그리고 자신의 아공간 인벤토리를 뒤지더니 포션을 하나 꺼낸다.
“지난번 트롤의 피로 만든 포션이야!”
“고마워.”
등에 부어지는 포션을 느끼면서 솔라는 루나에게 추가적인 부탁을 했다.
“리나, 여기를 부탁한다. 나는 볼카 광산으로 갈 거야.”
그는 동생에게 이곳을 맡기기로 했다. 사령술사 루나라면 불안했지만, 죽음의 마녀 루나는 믿을 수 있다.
“나 혼자?!”
솔라의 부탁에 루나는 멈칫했다.
“……알았어!”
하지만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로뮤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로뮤와 등에 검상을 입은 솔라를 본 루나의 얼굴에 살기가 은은히 담긴다.
“그나저나……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구나.”
솔라는 그런 동생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보면서 말했다.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나는 루나시르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음영술을 해제하면 다시 검은색이 될 거야.”
루나는 살기를 거두곤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모처럼 솔라시우스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
한편, 이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듣던 루시푸르네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