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55.
[솔라시우스가 암흑대공을 무찔렀어! 그 도살자 대공을……!]
솔라시우스가 암흑대공을 격퇴했을 때, 루시푸르네는 속으로 얼마나 큰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그의 등에 깊은 검상이 난 것은 아찔했지만 말이다.
[아아……! 솔라, 솔라시우스! 나의 기사, 나의 남자!]
회귀 전. 그에게 암흑대공을 암살해 오라는 마지막 시련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솔라가 유일하게 실패했던 임무.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돌아왔던 그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대조되듯 떠올랐다.
그녀가 솔라에게 가진 가장 큰 부채 중 하나, 트라우마 중 하나.
그것이 마침내 해소된 기분이었다.
[그 암흑대공을……! 그 제국군을 무찔렀어! 솔라가, 루한의 변경백이!]
세계수의 개입 덕분에 솔라가 회귀 전보다 더 강해진 것인지, 암흑대공이 아직 완성되기 전이라 약했던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번엔 진짜 이길 수 있어! 설원의 저주는 몰라도…… 제국과 마왕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솔라가 거뜬히 암흑대공을 압도했다는 사실!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어쩌면 솔라가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만 되면 차라리 내가……!]
솔라를 루한의 국서로 들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솔라의 황비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왕의 국서가 아닌 황제의 황비가 된다면, 유리아를 2황후로 앉히는 것도 가능했고. 루시 또한 유리아 정도면 기꺼이 허락할 생각이었다.
‘자식은 낳아야 할 테니까……. 내가 설원의 저주를 결국 풀지 못하면, 유리아라도……!’
이렇게나마 변경백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모든 희망찬 가정이 솔라가 암흑대공을 무찌르면서 펼쳐졌다.
여왕은 진심으로 흥분했고 기뻤다. 심장이 쉬지 않고 뛰었다. 동기화 상태만 아니라면 당장 침실에서 미친 듯이 춤을 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라버니! 도우러 왔어!”
루시가 가장 질색하는 마녀 리나 샬루트가 오면서부터, 루시는 혼란에 잠겨야 했다.
‘뭐야? 쟤, 머리 색이랑 눈 색, 왜 저래?!’
저 검은 마녀가 그림자 군단을 조종하는 것은 크게 놀라지 않았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 루시푸르네가 놀란 것은 다른 거였다.
“그나저나……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구나.”
“응! 나는 루나시르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음영술을 해제하면 다시 검은색이 될 거야.”
금발 금안을 한 검은 마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 크게 경악하고 만 것이다.
‘리나 리버스가…… 1황녀 루나시르네였다고?!’
여왕 루시푸르네는 눈앞에서 오가는 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불길했던 설마가 진짜가 되었다. 결국.
루시는 심장이 철렁했고 머릿속이 백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아…… 나는…… 그렇다면 나는……!’
뒤이어 밀려오는 회귀 전의 과오가 백지가 된 그녀의 심상을 채운다.
-로안 샬루트! 당장 왕도를 침공한 죽음의 대마녀를 죽여라!
-사천왕 리나 리버스를 죽인다면…… 그대의 충정을 조금은 믿어 보겠다.
-왜지? 이건 갈등되느냐? 그렇다면 순순히 인정하고 루한을 떠나라! 아니! 이 설원의 저주로 내가 친히 너를 벌하마!
회귀 전, 그녀가 뱉었던 말들이 떠오른다.
유독 죽음의 대마녀에 집착했던 과거의 솔라시우스가 떠오른다.
늘 그녀가 내린 시련을 불만 없이 수행하던 그였지만,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적에는 처음으로 망설였었다.
‘나는…… 솔라가 동생을 찾는 것을 방해했었어.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동생을 죽이라고 명령까지 내렸었다니!’
그리고 그 이유를…… 루시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또 다른 과오를 뒤늦게 깨달은 여왕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그녀는 윈테이라와 동기화도 끊고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퍽, 퍽, 퍽.
루시는 절규하며 얼어붙은 침대 기둥에 머리를 찍었다.
“나는…… 나는……! 아아아아!”
그리곤 한참 동안 소리 없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침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장 베네사가 그런 루시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걱정스레 불렀다.
* * *
갑작스러운 그림자 물결, 그림자 군대.
사람인 이상 꺼려질 수밖에 없는 광경.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두렵다는 듯 몸을 떨었고, 엘프들은 혐오과 불쾌함을 담은 눈으로 루나를 노려보았다.
“…….”
그들의 시선을 받은 루나는 괜히 위축되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로안 샬루트가 내 영혼과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한다!”
그때, 루나 옆에 있던 솔라가 광산으로 가기 전에 모두에게 외쳤다.
“나의 동생 리나 샬루트는 음영술사다! 이 아이가 펼치는 음영술을 두려워하지 마라!”
솔라시우스는 말을 이었다.
“태양이 있으면 달이 있는 법,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그의 외침에 루나를 향했던 모두의 시선이 점차 누그러진다.
“그 누구라도 내 동생을 핍박한다면! 빛과 그림자의 징벌을 죽어서도 피하지 못하리!”
감히 빛의 화신이자 광휘의 기사의 선포다. 그 누가 이에 의문을 품고 반박할 수 있겠는가!
“나,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또한 검은 마녀 리나 샬루트를 보증한다. 그녀는 정의로운 음영술사이니! 누구든 그녀를 차별한다면 변경백의 공적이 될 것이다!”
솔라 옆에 있던 문라이트 후작도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는 간신히 회복 중인 몸임에도 마나를 활용해 목소리를 냈다.
솔라시우스에 이어 변경백의 존경받는 영주인 문라이트 후작도 보증을 섰다. 적어도 이 변경백 땅에서 루나는 냉대받지 않을 것이다.
“……!”
루나시르네는 자신을 변호해 주는 솔라를 보면서 말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뿐이다.
“끄으…… 의식을 잃은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군.”
그리고 때마침, 의식을 잃었던 로뮤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로뮤 오라버니!”
루나가 의식을 차린 로뮤를 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다가 자신의 상태를 의식하곤 멈칫한다.
과연 로뮤 오라비는 바뀐 자신을 어떻게 봐 줄까?
다른 엘프들이 앞서 그녀에게 보였던 반응들, 불쾌함과 두려움이 담겼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리나? 그 머리 색과 눈 색도 예쁜데?”
하지만 로뮤는 그런 루나의 모습에 개의치 않는 모양.
오히려 반가움과 그리움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스쳤다.
“이 그림자 군단도…… 멋있어!”
로뮤는 오히려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루나의 그림자들을 관찰했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너에겐 로안 못지않은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그리곤 루나의 황금색 머리를 솔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쓰다듬었다.
“……으응! 고마워! 내가 이렇게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로뮤 오라버니 덕분이니까.”
루나는 그런 로뮤를 바라보며 그 어느 때보다 더 힘을 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솔라가 신기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그가 루나의 오빠라고 해도 하루 종일 옆에 있지는 않았다. 루나 또한 애가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요새 안을 돌아다녔었고. 아마 그 과정에서 둘이 친해진 모양이다.
“나, 여왕의 근위대장이자 하이엘프 로뮤 엘펜리트 또한 세계수에 맹세코 선언한다!”
루나와 대화를 마친 로뮤는 이어서 자신의 엘프 근위대에게 외쳤다.
“나의 의동생 리나 샬루트는 선한 영혼을 가진 인간 소녀이며, 그녀의 힘은 오직 정의를 수호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서 솔라와 문라이트 후작의 외침을 얼핏 들은 모양이다.
그러자 마지막까지 꺼림칙해 하던 엘프들도 루나를 향한 불쾌한 시선을 거뒀다.
교통 정리가 급하게나마 끝났다.
성벽을 넘어 내성으로 진격하려던 암흑군단은 루나의 그림자 군단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여길 부탁하지.”
“응! 오라버니 맡겨만 둬! 내가 어떻게 싸웠는지 이따 얘기해 줄게!”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도 지면 살 가치도 없지. 잘 다녀오게.”
“여긴 우리에게 맡겨라. 무너진 요정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회복할 테니.”
솔라는 로뮤와 루나 그리고 문라이트 후작에게 등을 맡기고는 그의 애마 맨카를 타고서 대공이 나간 방향으로 달렸다.
* * *
말을 몰고 솔라시우스가 도착한 볼카 광산의 입구는 그의 기억과 다소 달랐다.
“결계가 없어……?”
일단 광산 앞에 있어야 할 결계가 없었다.
싱크홀처럼 깊게 뚫린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아마 암흑대공은 저 아래로 냅다 뛰어들었겠지.
“…….”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암흑대공이 먼저 광산으로 향했음에도 그가 여유를 부렸던 이유는 바로 광산 입구에 있을 결계 때문이었다.
일정 수준의 덩치를 가진 생명체라면 시공간의 미로 속에서 헤매게 만드는 결계들.
그 결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원작 게임에서 수십 번의 리트라이를 했던 솔라시우스뿐이었으니까.
타앗!
그는 심각해진 눈으로 냅다 광산으로 뛰어내렸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심연의 구멍 속으로 작은 태양이 나타나 어둠을 거두기 시작했다.
볼카 광산의 제일 깊은 곳.
한참을 추락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쿵!
그곳으로 회색으로 이뤄진 장신의 기사가 묵직하게 착지했다.
“덥군.”
광심 심층에 도달한 둠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그 마녀는…… 어떻게 된 거지?”
아리아가 보낸 신호를 보자마자 광산으로 달린 그였다.
뒤에 솔라시우스가 있었지만 이런 때를 대비해 데려온 것이 암흑군단이었다.
적어도 그의 발목은 잡아 줄 것이리라.
처억, 촤앙.
대공은 그의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또 다른 검을 꺼냈다.
“으음…….”
그러곤 아쉽다는 눈을 했다.
그가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마검 제노사이드와 비교해서 살짝 모자란 마검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꺼낸 마검 또한 평소 그의 전투 스타일에 맞춰 3미터 이상의 기다란 장도였다. 하지만 폭은 좁았다. 제노사이드가 변했던 대검은 30센티의 폭이지만 이건 기껏해야 10센티 정도.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듯하다.
볼카 광산의 심층은 매우 더웠다.
실제로 발 주위로 용암이 드문드문 흘렀다.
그래서인지 어둡지는 않았다.
“저게 고대의 데몬 ‘발록’이군.”
얼마나 걸었을까? 대공은 고대의 데몬으로 보이는 존재를 발견했다.
일어서면 족히 15미터는 되어 보일 것 같은 거대하고 붉은 악마가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었다.
어찌나 깊게 잠들어 있는지 숨소리조차 깊었다.
그리고 그런 데몬의 바로 옆에는 금색 링에 붉은색 보석 두 개가 박힌 반지가 놓여 있었다.
저것이 바로 태양샘 반지일 터.
“끄응…….”
대공은 처음으로 신음을 흘리며 태양샘 반지가 있는 곳으로 조심히 걸었다.
“빌어먹을…….”
걷고 있는 그의 얼굴에 땀이 유독 많이 흘렀다.
“악황후는 분명 날 골탕 먹이려고 이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해.”
‘내가 불과 빛 속성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본래 암흑대공 둠의 속성은 어둠과 냉기였다.
그가 설원의 징벌을 무수히 받으면서도 죽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
한편으론 그가 그동안 설원의 가호가 매우 옅은 볼카를 침략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겐 전쟁과 전투는 유흥이었고 그 유흥에 불쾌함이 끼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니까.
파칙, 파칙, 파칙.
태양샘 반지를 향해 걷는 그의 발걸음 한 번 한 번이 매우 힘겨워 보였다.
마치 태풍이 오는 날 거대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허억…… 허억…… 허억…….
대공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태양샘 반지 바로 앞에 섰다.
그는 슬쩍 잠들어 있는 발록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잠들어 있다.
조심히 아까 막 재생된 손을 태양샘 반지로 향했다.
쏴아아아―!
하지만 그때, 뒤에서 빛 덩어리가 쏘아져 대공을 공격했다.
둠은 급히 들고 있던 장검으로 솔라시우스의 원거리 공격 ‘빛의 추적’을 막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한 둠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암흑군단을 벌써 없앤 건가?”
“나도 동료는 있어. 그쪽보다 훨씬 믿음직한 동료지.”
대공의 물음에 솔라가 무심한 눈으로 답했다.
‘그 그림자를 몰고 다니던 마녀인가?’
둠은 문득 광산으로 오면서 보았던 어린 마녀를 떠올렸다. 광산으로 진입하는 게 급해서 내버려 뒀던 것인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 검은?!”
그러다가 둠은 솔라의 손에 있는 회색 롱 소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NTL은 취미가 아니지만…… 이 검은 못 돌려줄 것 같군.”
솔라는 피식 웃으며 마검 제노사이드를 흔들었다.
“…….”
처음으로 대공의 눈에 분함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