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57.
회귀 전, 루시가 솔라에게 내렸던 첫 번째 시련이자 임무.
“볼카 광산에서 태양샘 반지를 구해 오거라. 그 광산에는 고대의 데몬이 서식하고 있도다.”
누가 봐도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내렸다.
‘가증스러운 황족 주제에……! 뭐? 속죄를 하고 싶다고? 어디 목숨으로 속죄해 봐라!’
당시 루시는 황족을 증오했다. 눈앞의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 로안 샬루트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은 원래 따로 노는 법.
여왕은 재상의 제안이 너무도 좋다고 여겼고 이를 그대로 반영했다.
“알겠습니다.”
알현실에 있던 망명 황족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이를 수락했다.
“흥!”
그런 그를 루시는 코웃음 치며 배웅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몰라도 저 모습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일말의 관심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저 가증스러운 황족은 분명 죽을 것이고 지금 보는 저 모습이 마지막일 테니까.
그리고 반년 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로안 샬루트는 당당히 왕도 윈테라로 입성했다.
여왕이 내린 첫 번째 시련을 기어코 해 내고 만 것이었다.
볼카 광산으로 향한 지 불과 반년도 안 돼서 말이다.
“어떻게……?”
루시는 알현실에 부복한 로안을 보며 물었다.
“문라이트 변경백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로안은 자신의 공을 최대한 숨기며 문라이트 후작의 공을 높였다.
“……변경백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예, 변경백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짓말!’
로안의 겸손한 모습은 오히려 루시의 의심을 더욱 키웠다.
‘마법 통신으로 이미 변경백의 보고를 들었어! 볼카 광산으로 떠난 것은 로안 샬루트, 네놈 혼자뿐이라는 것을!’
편견이 의심을 낳았고, 겸손을 꿍꿍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심과 경계와 별개로 그녀는 강한 호기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알현실 끝에 무릎 꿇은 남자에게, 그리고 저 남자가 타고 온 드레이크라는 몬스터에게.
로안은 붉은색 드레이크와 함께 왕궁으로 복귀했고, 늘 왕궁 안에만 있던 루시에게 이는 참을 수 없는 흥미를 일으켰다.
뀨잉?!
솔라의 바로 뒤, 12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붉은색 드레이크가 보였다.
저 붉은색 몬스터는 살벌한 냉기를 뿜어 내는 루시를 조심스레 올려다볼 뿐이다.
“저 고대의 드레이크, 이름이 뭐지?”
결국 여왕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솔라가 데려온 드레이크에 대해 물었다. 경계심 가득했던 그녀의 어조도 이때만큼은 다소 누그러졌었다.
“시즈로 지었습니다.”
“시즈?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루시는 연신 힐끔힐끔 시즈라 이름 지어진 드레이크를 보았다.
나중에 침실에서 저 고대의 몬스터를 얼음 조각해 볼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폐하,”
정신없이 시즈를 보고 있던 루시의 귀에 로안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이것이 바로 태양샘 반지입니다.”
“!!”
그의 입에서 나온 ‘태양샘 반지’라는 단어가 드레이크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의 정신을 바싹 차리게 만들었다.
로안은 태양샘 반지를 품에서 조심히 꺼내 여왕에게 보였다.
“……!”
루시는 그가 꺼내 보인 반지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앞에 보이는 태양샘 반지를 본 순간.
“그래, 아주 잘했도다!”
‘저 반지라면……! 저주를 풀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로안에게 품었던 경계와 의심이 크게 녹아 없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강렬한 열기가 느껴져!’
저 반지만 있다면 이 끔찍한 저주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풀지 못하더라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반지를 폐하께 바치겠나이다.”
로안은 천천히 루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멈춰라! 그 이상 가까이 오면!”
이를 본 루시가 급히 외쳤지만 이 망명 황족은 멈추지 않았고, 이윽고 10미터였던 처음의 거리가 빠르게 좁아지더니 7미터까지 좁혀졌다.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군요.”
눈을 크게 뜬 루시를 바라보며 로안은 멈춰 섰고, 들고 있던 태양샘 반지를 알현실 바닥에 놓았다.
“안 추운가?”
“예, 버틸 만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추워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볼카 광산에서 얻은 화염의 가호 덕분입니다.”
현재 유일하게 재상만 접근 가능한 거리에 선 솔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화염의 가호?”
“예, 태양샘 반지를 손에 쥐면서 얻은 능력입니다.”
“뭐……?! 그 반지를 손에 꼈었나?”
루시는 그런 로안의 대답에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끼지 않았습니다.”
“…….”
로안의 결백한 대답. 하지만 루시는 여전히 미심쩍어했다.
“알았다. 일단 그 반지를…… 어서 나에게 던져라!”
미심쩍음도 잠시,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저 태양샘 반지를 끼고 싶었다.
“그럼, 무례를 무릅쓰고…….”
여왕의 명령에 로안은 반지를 던질 자세를 취했다.
“폐하! 잠시 기다려 주시옵소서!”
하지만 그때, 지금까지 알현실에서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여인이 루시와 로안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재상? 무슨 일이지?”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였다.
“로안 경, 그대를 의심해서 미안하지만.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반지를 폐하께 바로 드릴 순 없네.”
그녀는 로안이 반지를 여왕에게 던지려는 것을 막았다.
“…….”
로안의 금색 눈동자가 말없이 재상의 붉은 눈을 응시했고, 재상 또한 자신과 똑같은 거리에 선 망명 황족을 묘한 눈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 혹시 모르니 저와 마녀회에서 이 반지를 검사하겠습니다.”
“그래……? 으음, 혹시 모르니……. 윤허한다.”
아리아의 말에 루시는 잠시 갈등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의 결정을 바라보는 솔라의 금색 눈동자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루시푸르네는 손목에 낀 녹색 팔찌를 쓰다듬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이틀 후, 재상은 검사를 다 마쳤다고 전하면서 태양샘 반지를 루시에게 전했다.
“……효과가 없는 거 같구나.”
기쁜 마음으로 태양샘 반지를 낀 루시는 큰 실망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현실, 그녀와 9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얼어 죽은 쥐 한 마리가 눈에 밟혔다.
“아마 로안 경이 광산에서 가지고 오다가 훼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태양샘 반지로부터 화염의 가호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크게 실망한 루시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재상 아리아가 말했다.
“당장 그를 처벌하겠습니다.”
아리아는 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아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포상을 주지 않는 선에서 끝내도록.”
재상의 말을 들은 루시는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고, 처음으로 재상의 건의를 반려했다.
“……?”
그런 루시의 반응을 본 아리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저 태양샘 반지에 담긴 거대한 열기는 분명 무시할 수 없습니다. 폐하와 소신이 함께 구상 중인 대마법진! 이노센티아에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재상은 루시를 향해 은밀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노센티아가 있었지. 윤허한다! 이 반지를 대마법진의 재료로 사용하도록 하라!”
루시는 반색하면서 재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루시푸르네는 회귀 전의 상념을 애써 접고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회귀 전의 이야기. 답답하고 멍청했던 과거의 모습.
그때 솔라시우스를 믿고서 그 자리서 반지를 꼈으면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무의미한 생각이 짧은 여운이 되어 맴돌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 생을 살아갈수록 더욱 짙어져만 가는 트라우마가 아플 뿐이다.
“휴우…….”
급한 불을 끈 루시는 처음보단 많이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솔라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타이밍이다. 윈테이라와의 동기화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공간 이동 마법을 조금이라도 늦게 펼쳤더라면?
부르르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루시푸르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리나의 정체를 알고 멘털이 나갔던 루시는, 얼마 후 다시 윈테이라에 접속했다.
아직 남은 숙제인 발록과 태양샘 반지 그리고 도망친 암흑대공의 경과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접속을 하자마자.
‘솔라가 위험해!!’
그녀가 본 것은 어느새 고갈되어 버린 윈테이라의 설원의 권능과 목숨이 위험한 솔라시우스의 모습이었다.
“안 돼!!”
솔라시우스가 위기에 처하자, 루시는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동기화를 바로 끊고는 곧장 공간 이동 마법진을 발동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매우 위험하고 정신 나간 짓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행했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루시푸르네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솔라의 바로 옆 5미터 거리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이후의 일은 눈앞에 부서진 발록의 모습으로 추측 가능하다.
그녀는 발록을 죽였고 이곳 볼카 광산의 심층을 한순간에 설원으로 바꿔 버렸다.
‘내가 이렇게 강했었나?’
발록의 얼어 부서진 시체를 보면서, 루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이 만든 광경을 보았다.
‘어머니께선 늘 나에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얘기해 주시긴 하셨지…….’
그녀의 어머니이자, 전대 여왕 예나체리나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단 일격에 발록을 죽일 줄은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저 발록이 어디 보통 데몬인가? 그녀의 어머니 예나체리나는 물론, 그 이전의 여왕들도 죽일 엄두를 못 내고 봉인만 겨우 했던 존재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어쨌든 죽었으면 된 거고.’
그녀는 의아함 가득한 생각을 뒤로하곤 발록에서 시선을 거뒀다.
‘윈테이라의 설원의 권능이 다 충전됐군.’
루시는 솔라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푸른색 마검 윈테이라를 살폈다. 그녀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윈테이라의 설원의 권능은 순식간에 가득 차올랐다.
윈테이라를 관찰하던 루시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솔라를 보았다.
이렇게 육안으로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솔라를 보는 루시의 가슴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춤췄다.
“……?!”
솔라를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이어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하나 보였다.
“저게 태양샘 반지…….”
쓰러진 솔라의 검지 손가락 근처에 있는 태양샘 반지였다.
그녀는 그 반지를 가져갈까 싶었지만,
‘이 공간 이동 마법진…… 너무 급하게 만들었어. 저런 반지를 들고 귀환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이윽고 관뒀다.
‘그가 나중에 왕궁에 와서 나에게 직접 반지를…….’
어차피 저 반지는 솔라가 자신에게 줄 것이다.
그녀는 마치 결혼반지처럼 솔라가 자신의 손에 직접 끼워 주는 것을 상상해 봤다.
‘하지만…….’
그녀는 행복한 상상을 하다가 이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나를 만질 수 있을까?’
현재 솔라와 루시의 거리는 5미터의 거리.
걱정과는 다르게 이 정도 거리임에도 솔라는 멀쩡했다.
‘마지막에 솔라시우스는 내 곁에 3미터까지 다가올 수 있었어…….’
회귀 직전의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서 조금씩 솔라에게 가까이 다가갈까 싶었다.
‘지금이라면 3미터 정도의 거리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번 생에서의 그는 알 수 없는 저주로 더위를 아주 많이 타니까 말이다.
‘아니야……. 곧 공간 이동이 재개될 거야. 괜히 가까이 갔다가 그가 공간 이동에 휘말릴 수 있어.’
하지만 이조차 루시는 망설이다가 결국 관뒀다.
언제 자신의 몸이 왕궁으로 역소환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워낙 급하게 만든 마법진이라, 자칫 잘못했다간 그를 차원의 미아로 만들 수 있었다.
“…….”
루시는 그저 멍하니 아쉬움과 애틋함 그리고 아련함이 담긴 눈으로 솔라를 볼 뿐이다.
육안으로 그를 좀 더 오래 보고 싶었지만 워낙 장거리 이동이다 보니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아마 1분도 남지 않았을 터.
다음에 만날 때는 의식이 있는 상태서 어색하게나마 대화라도 나눴으면 좋으련만.
습관적으로 손목에 낀 푸른색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남겨 주신 유품을 만지작거리니 심란한 마음이 안정됐다.
그렇게 멍하니 솔라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끼우우웅?
문득, 그녀의 뒤쪽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놀라서 고개를 급히 돌렸다.
“어머! 시즈! 오랜만이구나!”
그곳에 있는 생명체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쿠웡?
그런 여왕의 반응에 시즈는 ‘넌 누구세요?’라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