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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61화 (61/212)

제61화

#61.

병사는 괜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다.

“뭐지? 어서 말해라.”

솔라는 의아함을 느끼며 늙은 병사를 재촉했다.

그러자.

“로안 기사님! 감히 제가 이 미천한 목숨을 바쳐 부탁드립니다!”

병사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솔라에게 말했다.

“오늘! 죽은 병사들의 합동 장례식이 있습니다. 부디…… 가시기 전에, 아니면 갔다 오셔서라도 좋으니! 요새에 묻힐 병사들의 추모사를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장례를? 내가? 나는 사제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 수는 적지만 이곳에도 교단의 사제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예상치 못한 부탁에 솔라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압니다. 하지만…… 이 늙은 놈의 욕심이지만…… 기사님 같은 분이 추도사를 해 주시면 참으로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엎드려 부탁하는 병사의 눈에는 이윽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묻힐 병사 중에 그대와 친한 병사가 있었나?”

신분제가 엄격한 세계다. 일개 병사가 기사, 그것도 솔라 정도 되는 자에게 이렇게 부탁하는 것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

솔라의 물음에 늙은 병사는 잠시 말이 없다가,

“……제, 제 아들놈이 있습니다요. 흐으으으윽!”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안내해라.”

솔라는 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 * *

결국 볼카 요새를 떠나는 것은 늦은 오후로 미뤄졌다.

“로안 기사님이 직접 장례를 치러 주시다니!”

“새끼들 더럽게 운 좋네. 로안 기사님이 추모사를 읽어 주면 분명 천국으로 가겠지?”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이를 반기는 눈치다.

“그대는 나를 늘 부끄럽게 만드는군. 기사도의 화신이야, 화신.”

소식을 들은 문라이트 후작은 직접 솔라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했다.

“일개 방랑 기사인 제가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후작에게 솔라는 살짝 부담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이 본래 이번 장례식을 진행할 예정이었던 사제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로안 경의 이름과 업적은 이미 교단에서도 인정한 사안입니다. 제가 듣기로, 현재 교국에서는 로안 경을 루한의 성자로 임명할지 말지에 대한 의논이 한창일 겁니다.”

사제는 오히려 영광이라는 듯 기쁜 표정이다.

“성…… 성자?!”

사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린 말에 솔라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네! 어쩌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 루한에 성자가 탄생하다니! 신께서 여왕 폐하와 루한을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사제는 감격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호를 그었다.

‘성자라니……. 갈수록 일이 커지는군.’

솔라는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병사들이 내게 추모사를 부탁한 건가? 성자 정도 되는 자가 장례를 치러 주면 확실히 위안이 되긴 하겠지.’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추모사를 부탁한 늙은 병사가 떠올랐다.

아들의 장례를 성자 후보자가 추모해 준다라. 목숨을 걸 만한 부탁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듣기론 나베트 마을에서 행했던 일이 워낙 충격적이긴 했나 봐, 오라버니. 성자 얘기가 돌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하던데?”

옆에서 루나가 솔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볼카 요새로 오기 전에 잠깐 들렀던 마을에 대한 얘기였다. 도적들을 무찌르고 사재를 털어 식량을 뿌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요정 숲으로 가는 길이면 그 마을에 다시 들리겠네? 쥴리아가 잘 있는지 가기 전에 한번 확인하고 오자.”

루나의 입에서 쥴리아라는 아이의 이름이 언급됐다.

헐벗고 굶주리던 여자아이였는데 루나가 직접 이름을 지어 줬었지. 그 마을에 있는 교단의 신전에 금화와 함께 맡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솔라는 루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후딱 장례를 치르기 위해 볼카 요새 뒤편으로 향했다.

뒤편으로 가니 사제들과 병사들, 기사들이 바글바글하다. 엘프들도 나와서 인간들의 장례식을 구경 중이다.

참고로 엘프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따로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듣기론 볼카 요새 인근 숲에다가 수목장을 치른 모양이다.

(참고로 제국군 시체는 이렇게 매장하지 않고 요새 바깥에다 한데 모아 태우고 방치했다.)

“로안 경께서는 그냥 준비하신 추모사만 읽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묘지에 도착하니 사제들과 기사, 병사들이 각각 삽을 들고서 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 중에는 아까 용기 내서 추모사를 부탁한 늙은 병사도 있었다. 아마 그 앞에 놓인 관이 전사한 아들의 관일 것이다.

“…….”

솔라는 성자로 소문난 것도 모자라, 졸지에 장례식까지 치러 주게 된 지금 상황이 황당했다.

하지만 황당함과 별개로 이왕 하기로 한 일, 최선을 다해 해 주기로 했다.

‘추모사야 지구에서도 몇 번 해 봤으니까.’

애초에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지구에서 태광휘로 있을 때가 얼핏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격렬한 전투가 끝나면 그가 나서서 전우들의 추모사를 낭송했었지.

쏴아아아.

먼저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태양 이능을 은은히 발현했다.

광역 버프 스킬인 ‘새벽의 등불’을 약하게 펼쳤다.

그의 몸에서 신성한 오러가 펼쳐지자, 병사들은 물론 기사와 사제들까지 감동한 눈으로 성호를 그었다.

가까이서 이를 보는 문라이트 후작과 프리드리히 또한 성호를 그었다.

장례식장 멀리서는 분홍 머리가 인상적인 여기사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은은한 광휘가 한 줄기 한 줄기 뻗어 나가 묘지의 관들을 쓰다듬는다. 관뿐만 아니라 이미 묻혀 있던 묘들 또한 쓰다듬었다.

광휘의 손길에 이어, 솔라시우스의 입이 열렸다.

그가 지구에서 종종 사용했던 추모사 구절들을 이세계에 맞게 응용한 것이 낭송됐다.

“먼 훗날, 너희는 이름 없는 영웅이 되어 들판에 있겠지.

비석 하나 없는 들판에서, 기약 없는 세월의 흐름 속 작은 일부가 되겠지.

허나, 영웅들이여, 슬퍼하지 마라.

너희의 함성이 역사의 물결을 만들었고, 너희의 피가 가족을 지켰고, 너희의 희생이 후손들의 운명을 세운 것이니.

들판의 아들들이여, 산맥의 아버지들이여, 물 위의 남편들이여, 설원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도다.

너희는 천국에서 평화를 누릴지어다.”

훗날 대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될 ‘로안 추모사’의 탄생이었다.

높은 제국어와 요정어 억양이 섞인 그의 대륙 공용어는 추모사를 읽을 때에도 절묘하게 어울렸다.

배움이 짧은 병사들은 운명과 역사, 물결과 같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귀에는 헛되지 않은 희생과 천국에서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솔라의 축복만이 강하게 뇌리에 박힐 뿐이다.

짧지만 강렬한 추모사가 끝났다.

“흐으으으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추모사를 마친 솔라의 귀에 추모사를 부탁했던 늙은 병사의 흐느낌이 들렸다.

병사는 엉엉 우느라 들고 있던 삽으로 아들을 묻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옆에 있던 비슷하게 늙은 병사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대신 삽을 움직였다.

장례식이 끝나니 밤이 되었다.

어둠이 대지와 창공의 경계에 똬리를 틀었다.

“이제 진짜 가자!”

날이 어두워짐을 확인한 솔라가 루나와 로뮤를 불러 말했다.

“그냥 오늘 밤까지 지내고 내일 떠나면 안 돼?”

루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렸다.

‘유리아 언니랑 인사는 하고 가고 싶은데…….’

루나시르네는 유리아와 이렇게 찝찝하게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아니, 여기 더 있다간 계속 무슨 일에 휘말릴 거 같아.”

하지만 그런 동생의 생각을 모르는 솔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유리아 언니랑 작별 인사는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결국 참다 못한 루나가 무심한 오라비에게 따지듯 말했다.

“책임지지 못하는데 여지를 주는 것만큼 나쁜 짓은 없어.”

동생의 투정에 솔라의 금색 눈동자가 무심히 빛났다.

“…….”

루나는 오라비의 태도에 입을 삐쭉 내밀었으나, 이후론 더 반발하지 않았다.

“로뮤, 너는?”

동생이 해결되자, 솔라는 고개를 돌려 하이엘프 로뮤를 바라보았다.

“난 아무 때나 가도 상관없어.”

로뮤는 언제나처럼 물 흐르는 듯한 반응이다. 장수종인 엘프답게 매사가 여유롭다.

그렇게 솔라와 로뮤, 루나는 늦은 밤 볼카 요새 후문을 나섰다.

후문을 지키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의아한 눈을 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앞을 막지 않았다.

세 사람은 요새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볼카 요새의 몇 남지 않은 망루 중 한 곳에서 한 분홍 머리 여기사가 말없이 요새를 나서는 이들을 바라본다.

달빛과 별빛이 축복이라도 하듯 세 사람을 비췄다.

“…….”

유리아는 멍한 분홍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특히나 금발 머리를 한 방랑 기사가 하염없이 담겼다.

그의 모습이 점으로 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음에도 새벽 내내 유리아는 솔라가 떠난 방향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밤하늘이 차게 울었다.

* * *

온갖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거대한 성.

성은 어찌나 거대한지 웬만한 도시 하나 크기다.

대륙 최강이자, 제국의 중심부인 황궁은 제국이 타락한 지금에도 위엄이 드높았다.

이 찬란한 황궁의 중심부. 한 소년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임하고 있었다.

15세 정도로 보이는 나이. 하지만 실제 나이는 10세를 갓 넘긴 소년.

백금발의 머리 색이 소년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줬다.

번뜩.

오랜 명상에 잠겨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떠졌다.

백금발의 머리 색과 달리, 소년의 눈동자는 진한 회색에 금빛이 은은히 묻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군……. 솔라시우스!”

결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소년의 입이 열리고. 퇴폐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높은 제국어가 황궁을 음울하게 메아리쳤다.

“가만, 솔라시우스가 아니라…… 지구의 EX급 헌터 태광휘인가?”

혼잣말하는 소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유희에 실패한 또 다른 차원의 나와, 이를 지켜본 마계의 본신이 여기로 폭탄을 돌렸군.”

소년은 가부좌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색에 가까운 백금발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휘날린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옥타나가 계획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실패했던 것이 말이지.”

그림자 핵도, 태양샘 반지도, 루한에 심어 둔 마녀들도, 최근 들리는 상황을 보아하니 영 신통치가 않았다.

흑태자 세피로스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고, 깊고 긴 명상에 임했다.

명상을 통해 11차원에 접속한 그는 마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본신에게 따졌다.

그리하여 그는 방금 막 그 이유를 알았다.

“핵을 쓰다니. 아니지, 버그가 더 정확한가? 어쨌든, 이래선 밸런스가 맞지 않아. 암, 그렇고말고.”

명상을 마친 흑태자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자신의 기억이 들어와 있었다.

지구에서 태광휘라는 헌터에게 죽은 또 다른 마왕 세피로스의 기억이.

그래서인지 이 세계에선 생소한 단어들을 자연스레 사용했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대비를 해야 할 차례.

“흐흐흐흥~♬ 흐응~♪.”

제국의 흑태자이자, 훗날 마왕이 될 세피로스는 사뿐사뿐 맨발로 황궁을 걸었고.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다.

너무나 강력했던 부하들과 너무나 순탄했던 계획들로 그에게 이번 유희는 무료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변하니까 드디어 유희를 즐길 맛이 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황궁을 거닐던 세피로스는 황궁 지하 어딘가에 위치한 밀실 앞에 섰다.

그는 염력으로 밀실 문을 열고 부드럽게 입장했고 지하 밀실의 중심부에서 섰다.

그리고 양손을 뻗은 뒤, 거대한 암흑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흑태자가 양손에 펼친 검은 마력이 응축되더니 블랙홀처럼 생긴 구멍이 생성된다.

“버그든 핵이든, 이를 상대하려면 치트키 정도는 써야지.”

흑태자의 몸에서 봉인된 권능이 깨어났다.

11차원, 흔히 마계라 불리는 곳에 존재하는 진짜 마왕의 권능이 강림했다.

파치지직!

블랙홀처럼 생긴 심연의 구멍 주위에 검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끼아아아.

꺄아아아아.

아아아악.

세상의 모든 비명을 믹스해 놓은 듯한 끔찍한 소리가 심연의 문틈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황궁의 지하에서 마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구식 용어로 게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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