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62.
마왕 세피로스의 본신은 마계에 있다.
마왕의 진정한 군세도 마계에 있다.
마계는 11차원, 심연과 혼돈이 가득한 아스트랄의 세계다.
물질세계가 아닌 영체로 이뤄진 세계이기에 마계의 존재들은 모두 영체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마나’가 아니면 이들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과학으로 무장한 지구의 군대가 마왕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반대로 이런 이유로 마계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영체로 이뤄진 세계는 늘 투쟁의 연속이고 즐길 것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마계는 푸른 하늘도, 맑은 공기도, 녹음의 대지도 없다.
거대한 가스 행성 속 같은 차원이다.
마계는 약자에겐 생존 지옥이지만, 강자에겐 더욱 무료한 지옥이다.
이 무료함을 극복하기 위해 마왕과 마계의 고위 데몬들은 그들의 본신을 여럿 복제했다. 그리고 복제한 아바타로 무수한 하위 차원들을 침공했다. 마치 유희를 떠나듯.
그들의 유희에 셀 수 없이 많은 물질세계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날, 지구라는 차원으로 유희를 나갔던 마왕의 아바타가 죽었다.
역소환도 아닌 영원한 소멸이었다.
마왕은 놀랐다. 역소환은 종종 있어 왔지만, 자신의 아바타가 소멸했던 경우는 없었으니까.
마계에 있던 마왕의 본신은 급히 지구라는 차원을 살폈고, 그 세계에 항성의 힘을 가진 필멸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11차원의 군주는 그 필멸자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운명을 가늠해 봤다. 잘하면 이 무료한 불멸자에게 큰 즐거움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거 위험하군.
기대감은 부서졌다.
-대응에 나선 건가?
마계의 유희에 대응하기 위해 11차원과 반대되는 12차원에서 움직인 것 같다.
즐거움은 둘째치고 저 태광휘라는 존재를 이대로 뒀다간 마왕의 존재가 위험했다. 마계 또한 무사하지 못하리. 마왕은 직감했다.
마왕은 급히 방법을 찾았다. 유심히 자신의 아바타들이 진출해 있는 무수한 차원을 뒤졌다.
-이 세계면 되겠군.
그리고 어떤 한 차원에서 지구의 태광휘와 싱크로율이 가장 비슷한 용사를 찾았다. 솔라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필멸자가 발악하는 세계.
마왕은 그 세계로 태광휘를 유인했다.
그리고 솔라시우스라는 용사와 육신과 영혼을 합쳤다.
마침내 전 차원에서 마왕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 태광휘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놈이 자랑했던 항성의 힘은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약해지고 약해진 녀석은 결국! 스스로 불타 죽을 것이다.
설령 버틴다고 해도 이 차원에 있는 마왕의 아바타가 쉽게 없앨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왕의 본신은 뭔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불타 죽어야 할 태광휘는 죽지 않았다. 멀쩡했고 더 강해진 것만 같았다.
-설원의 대마녀가 다른 시간선에서 회귀했다!
파악한 결과,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 때문이었다.
설원의 대마녀, 이 차원에서 유일하게 마왕의 아바타를 이길 수 있는 존재.
때문에 마왕을 신봉하는 마녀를 이용해 미리 조치를 취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세계수가 아주 영악한 짓을 했어. 내가 지구에 있는 태광휘를 옮길 때를 이용해 회귀를 감행했구나!
그리고 그런 여왕을 회귀시킨 존재는 바로 그 차원의 수호신이기도 한 세계수였다.
때마침 이 세계에서 유희를 즐기던 자신의 아바타로부터 연락이 왔다.
흑태자 세피로스, 예정된 시간선의 흐름대로라면 악황제가 되어 파괴의 유희를 즐겨야 할 또 다른 자신.
그 아바타는 좀 특이한 방식으로 만든 아바타였다.
자신을 신봉하는 마녀의 뱃속에 깃든 태아를 토대로 만든 아바타였다.
필멸자의 육신을 가졌기에 어떤 아바타보다 더욱 즐거운 유희를 누릴 것이라 기대했던 존재.
녀석의 경험과 감정은 훗날 자신에게 돌아와 의미 있는 양분이 될 것이다.
-필멸자의 육신에 나의 화신을 빙의시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 흑태자 세피로스를 지켜야 한다!
지구에서 끝내 소멸된 마왕과 중요도가 다르다. 마왕은 좀 더 이 차원에 관여하기로 결심했다.
-잘 들어라, 또 다른 세피로스여.
일단 흑태자 세피로스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 줬다.
-본신의 권능 중 일부를 풀어 주겠다. 마음 같아선 전부 주고 싶지만, 균형이 크게 틀어지면 12차원에서 개입할 것이다.
유희의 즐거움과 차원의 균형을 위해 봉인했던 마왕의 권능도 일부이지만 풀어 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흑태자! 아니, 악황제 세피로스여! 이제부턴 너의 몫이다. 부디 태광휘를 죽이고 아바타 중에 가장 강한 마왕이 되어라!
11차원의 군주는 군침을 흘렸다. 태광휘를 무찌른 악황제 세피로스가 훗날 자신과 합쳐진다면, 자신은 또 얼마나 강해질까? 얼마나 짜릿한 신화를 누리게 될까?
그때쯤이면 마계는 12차원 천계의 눈치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 * *
악마 문, 심연의 문, 마계의 문 혹은 게이트.
다양한 이름을 가진 차원의 문이 지하 밀실에 생성됐다.
적어도 지구인들이 이 문을 본다면 비명을 지르고 오줌을 지리면서 휴대폰으로 각성자협회에 신고를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흑태자 세피로스가 연 차원의 문은 지구에서처럼 몬스터와 악마가 쏟아져 나오진 않았다.
이곳에 생성된 게이트는 반대다.
무언가가 나오는 대신에 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이트였다.
‘아쉽군.’
세피로스는 눈앞의 게이트를 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지구처럼 마계의 군대가 몰려왔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 세계를 지키는 수호신인 세계수가 마계의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뭐, 제국을 장악했기 때문에 군대는 딱히 필요 없지만.’
이에 대항하며 제국을 장악한 것이지만 말이다.
‘군대의 양과 질은 넘치고도 남아.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흑태자는 게이트에 고정되었던 묘한 시선을 거두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두 존재에게 짤막하게 명했다.
“들어들 가.”
“저기가 어딘데요, 흑태자 전하?”
갑작스러운 세피로스의 불음에 달려온 두 존재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계. 너희를 각성시켜 줄 11차원의 공간이지.”
세피로스의 입에서 나온 낭랑한 대답.
두 존재, 옥타나와 둠은 눈을 크게 떴다.
“가서 강해져서 나와.”
“다짜고짜 마계라니요? ……마왕님?”
이어지는 세피로스의 말에 회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마녀는 멍하니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그녀가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잉태했을 때부터 아들로는 절대 생각지 않았던 존재.
“알겠습니다.”
옥타나가 머뭇거리는 사이, 암흑대공 둠이 성큼성큼 게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솔라시우스와 싸우다 입은 부상은 회복된 지 오래였지만 자존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둠에게 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눈앞의 게이트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슈욱.
게이트 앞에 가까이 다가가자, 둠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검은 구멍 안으로 흡수되었다.
“옥타나? 너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선 거야?”
둠이 사라지고서 흑태자는 시선을 돌려 회색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악황후를 보았다.
“물론~ 가고 싶지요, 마왕님. 하지만 지금 당장 제가 사라진다면 루한에 있는 저의 아바타가 힘을 못 쓸 거예요.”
악황후이자 거짓의 대마녀가 회색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요즘 들어 루한에서 아리아의 입지가 많이 약해졌거든요…….”
회색 머리에 핏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 말끝을 흐린다.
악황후의 얼굴은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아리아 데스모는 이제 필요 없어.”
“……네?”
세피로스의 말에 처음으로 옥타나의 표정이 굳었다.
“필요 없다니요? 세상은 제가 인형술사라는 사실을 몰라요~. 이를 이용해 루한에 데스모 공작가라는 마녀 가문을 오랜 시간을 들여 심어 놓은 것이고요. 이제 활용할 일만 남았는데…….”
그녀는 애써 루한에 심어 놓은 데스모 여공작의 효용성을 설명하려 했으나.
“시간 없어. 일단 들어가라고. 아무리 나라도 마계의 문을 이렇게 오래 유지할 수는 없으니.”
이미 뒤틀려 버린 상황을 알고 있는 흑태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휘이익.
“잠, 잠까안~ 마왕님! 아들아? 이 엄마는 아직 준비가!!”
“설명은 거기서 알아서 듣든가 하고.”
세피로스는 염력을 사용해 악황후를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옥타나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마계의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지하 밀실에서 흑태자는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제 해야 할 것이…….”
11차원의 본신이 전해 준 다른 시간선의 기억과 지구에서 죽은 또 다른 아바타의 기억을 뒤졌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 뒤.
“세계수! 그 앙큼한 세계수부터 불태워야겠어.”
세피로스는 주먹을 꽉 쥐고는 다짐했다.
“죽음의 대마녀를 대체할 사천왕도 필요하고…… 옥타나가 전에 말한 그 키메라가 대체제로 좋겠어. 파괴왕 가오이도 솔라시우스가 선점하기 전에 포섭해야겠군.”
흑태자는 혼잣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솔라시우스가 세계수 묘목을 손에 넣는 것을 막아야 해……. 태양샘 반지와 세계수 묘목이 합쳐지면 루시푸르네의 저주는 물론, 태광휘의 저주도 해주될지 몰라.”
흑태자의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만약에 여왕과 용사의 저주가 해제된다면?!
‘못 이긴다!’
11차원의 본신이 나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선순위를 정한 흑태자는 사뿐사뿐 맨발로 황궁을 걸었다.
계획을 세웠다면 이제 진행해야 한다.
그는 드넓은 황궁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제국의 황제가 신하들을 맞이하는 알현실.
끼이익.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알현실 끝에는 황금 옥좌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노인이.
바로 현 제국의 황제였다.
“…….”
황제는 숨만 간신히 쉬고 있었다. 금색이 분명했던 눈동자는 탁해져 있었고, 금발이었던 머리 색도 푸석푸석한 백발처럼 변해 있었다.
“으어…… 아아…….”
황제는 유아 퇴행이라도 된 듯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권능도 되찾았겠다, 이제 살려 둘 필요도 없지.”
흑태자 세피로스는 손에 검은 마나를 끌어 올리고는 천천히 황제 가까이 접근했다.
알현실 좌우로 기립한 황실 기사들이 그런 흑태자와 황제를 가만히 구경만 한다.
“원래 이 상황에선 당신이 내게 이런 말을 해 줘야 하는데…….”
황제 앞에 선 세피로스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따악!” 하고 마나를 일으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자 탁한 눈으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황제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세피로스가 원하던 말을 뱉었다.
“황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
황제의 외침에 만족한 미소를 지은 세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대사를 말했고.
푸욱!
이어서 맨손으로 황제의 가슴을 꿰뚫었다.
피가 황금 옥좌를 적셨고, 짧은 연극이 끝났다.
며칠 후, 황제가 죽고 흑태자 세피로스가 황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졌다.
원작과 회귀 전보다 훨씬 이른, 악황제의 탄생이다.
* * *
장소를 돌려서 루한의 변경백 외곽.
“마, 마법?!”
무료하게 길을 걷던 솔라 일행 안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네가? 나한테……? 왜에?!”
루나시르네는 뭔가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사람처럼 괴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법이다. 네가 원한다면 마법을 전수해 줄 수도 있다. 나는 리나 너에게 마법을 알려 주고 싶도다.]
바로 뜬금없이 자신에게 마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말한 저 푸른색 마검 때문이다.
[나는 마검, 오랜 세월 존재한 무구. 제법 많은 마법을 알고 있지. 어리고 재능 많은 마녀야, 분명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다.]
“……?”
갑작스러운 마검 루시의 제안. 루나시르네는 이 마검의 주인인 오라버니를 벙찐 얼굴로 쳐다보았다.
“루시가 너와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야.”
동생의 시선에 솔라시우스는 부드러운 눈으로 말했다.
‘루시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쁘지 않아. 오히려 칭찬하고 싶군.’
그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늘 서로 떽떽거리는 것이 어찌나 짜증 났던가.
“리나, 루시의 제안을 받아줘. 너는 아직 견습 마녀잖아. 루시가 어떤 마법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솔라는 루시의 바뀐 행동을 응원했다.
오라버니까지 그렇게 말하자 루나는 이어서 시선을 로뮤에게 돌렸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저 마검에게서 불길한 느낌은 들지 않으니.”
로뮤마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검 루시의 손을 들어 줬다.
“너…… 나 싫어하잖아?”
두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하자, 루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푸른색 마검을 보았다.
[오해가 있었을 뿐, 딱히 너를 싫어하진 않았다.]
“미친…….”
[미, 미친?! 지금 나한테……! 아니, 아니지. 그래! 욕하고 싶다면 해라. 더 욕해도 된다.]
“오라버니! 얘 이상해!!”
결국 참지 못한 루나가 빗자루를 타고 솔라에게서 멀리 달아난다.
[루…… 아니, 리나 샬루트, 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다. 나는 진심이야! 어떻게 하면 믿어 주겠니? 어떤 마법이어야만 네가 만족할까?]
멀리 달아나는 루나를 마검 루시가 구애라도 하듯 애타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