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63.
솔라와 루나, 로뮤가 볼카 요새를 떠난 지 3일째.
단출한 인원으로 이동하다 보니 속도는 아주 빨랐다.
중간에 들리기로 한 나베트 마을까지 어느덧 하루 거리를 남긴 상황.
중간중간 멈춰서 식사를 할 때면 루시가 루나에게 자잘한 마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스승이 참으로 뛰어났나 보구나. 기초가 아주 잘 잡혀 있어.]
“정말?!”
[그래.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리나 샬루트. 그대의 스승은 참으로 뛰어난 마녀였음이 분명해.]
“흠흠! 내 스승님이 뛰어나시긴 하셨지.”
루시는 루나에게 점수를 따기로 작정이라도 한 모양인지 온갖 립 서비스를 루나에게 선사했다.
‘이자벨이라는 사령술사, 제법이야. 하긴, 이 정도 실력이니까 아리아의 눈에 띄었겠지만.’
루시 딴에는 7할쯤은 진심으로 말한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둠과 사령술에 치우쳐 있구나.]
“그건…… 어쩔 수 없지. 스승님은 흑마법사니까.”
[사령술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흑마법이 될 수도 있고 평범한 마법이 될 수도 있어. 리나 너를 보니까 네 스승은 결코 흑마법사가 아니다.]
“!!”
[일단 속성 밸런스를 맞추는 데 집중해 보자. 어둠과 냉기 마법은 대강 익힌 거 같으니 빛 속성 마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애초에 너는 빛속성에 가까우니.]
“응, 알았어! 잘 부탁해!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스승으로 모시진 않을 거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선배 정도로 여길게!”
[마음대로 해라. 지금부터 빛 속성 마법 중 하나인 ‘정화’의 수식을 알려 주겠다.]
“네. 루시 선배님!”
루나는 솔라 옆에 가까이 앉아서 루시의 마법 강의를 들었다.
처음의 떨떠름한 반응과 달리 이 푸른색 마검이 지닌 마법 지식은 굉장히 넓고 깊었기에 루나의 흥미를 크게 자극했다.
본래 단순한 성격이라서 그런지 루나는 어느새 루시와 꽤 친해져 있었다.
사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가을에 접어든 루한의 공기는 차가웠다.
솔라는 애초에 더위를 많이 탔고 루나와 로뮤는 마나를 익힌 데다 옷도 날씨에 맞춰 입었기에, 다들 몸을 떨거나 하진 않았다.
하이엘프 로뮤는 루나 반대편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내가 듣기론 변경백 외곽은 도적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조용하군.”
나름 경계를 서고 있는 모양.
“도적으로 의심되던 자들도 먼발치서 우릴 보다가 그냥 가는 것 같고. 아무리 리나가 인지 저하 마도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평화로운데?”
경계를 서던 로뮤가 혼잣말을 흘리듯 했다.
“……!”
“…….”
그런 로뮤의 혼잣말에, 솔라와 루나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면서 로뮤를 째려본다.
“……왜 그러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눈초리에 로뮤가 뭘 실수했나 싶어서 괜히 흠칫했다.
“로뮤 오라버니,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절대 해선 안 될 말을 했어, 방금.”
루나와 솔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따지듯 말했다.
구르르르.
동시에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싸우는 과정에서 솔라가 눌러쓴 후드가 벗겨진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기서 광휘의 기사님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풍채가 좋아 보이는 상인이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상단과 솔라 일행 주위에는 시체 여러 구가 널려 있었는데 뭣 모르고 솔라 일행에게 덤비다 털린 도적들이었다.
“로뮤 오라버니! 다음부턴 절대 조용하다느니, 평화롭다느니 같은 말을 하지 마!”
감사와 찬양을 하는 상인들 옆에서는 루나가 로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그런다고? 미신 같은데?”
“미신도 이 정도 되는 미신이면 믿을 수밖에 없다니까!”
로뮤는 또 하나 알게 된 인간세계의 상식(?)에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지?”
로뮤와 루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솔라는 상인들에게 물었다.
“예, 저희는 볼카 요새로 가는 중입니다.”
“볼카 요새로? 전쟁 상인들인가?”
가는 길이 정반대였다. 아쉽게도 동행은 못 할 듯하다.
“그렇습니다, 광휘의 기사여.”
“전투는 끝났어.”
‘소문이 아직 안 퍼졌나?’
마법 통신으로 어지간한 도시에는 알려졌을 텐데? 솔라는 의아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광휘의 기사님께서 암흑군단과 도살자 대공을 무찌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요새 복구를 위해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광휘의 기사는……. 아니, 그보다 전쟁 상인이라면서 호위가 왜 없는 거지?”
“호위가 있긴 합니다. 저기 있는 자들이 용병들이지요.”
상인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확실히 가죽 갑옷에 검과 도끼를 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솔라의 금색 눈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깔았다.
“용병들이라고? 상단 직원인 줄 알았다.”
험상궂고 무장을 했다고 해도 무조건 용병은 아니다. 적어도 변경백 외곽에서는 말이다. 어지간한 상인들도 대부분 저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요새 볼카 지역은 광휘의 기사님 덕분에 도적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상행에선 호위를 줄였습니다. 그러다가 재수 없게 규모 있는 도적단을 만나게 된 것이고요. 확실히…… 저희가 방심한 탓이지요.”
“나랑 도적단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당연히 상관있지요! 광휘의 기사님의 활약은 이미 변경백을 넘어 루한 전역에 퍼졌습니다.”
“…….”
“기사님이 활동하시는 지역은 일시적이지만 도적들의 씨가 마릅니다. 너도나도 척살당하기 싫어서 짐을 싸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히 솔라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신기한 것이 솔라 뒤에 있는 붉은색 드레이크에 시선이 갈 법함에도 상인과 용병 모두가 이상할 정도로 시즈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적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아하니…… 기사님께서는 볼카를 떠나시려는 것이군요.”
“맞아. 안타깝지만 너희를 호위해 줄 수는 없을 거야.”
“괜찮습니다! 저희가 뭐라고 광휘의 발걸음을 막겠습니까?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정의를 펼치셔야 합니다, 로안 기사님!”
그놈의 광휘와 정의라는 말이 참으로 낯 간지러웠지만, 솔라는 애써 한 귀로 흘렸다.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사님, 이건 약소하지만…….”
그러는 중에 상인이 품에서 은화가 든 주머니를 솔라에게 건네려 한다.
“……됐다. 차라리 그 돈으로 호위나 더 고용하도록.”
솔라는 상인이 건네려는 은화 주머니를 거절했다.
“역시나……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정의를 행한다는 소문이. 나베트 마을의 성자님이 분명하십니다!”
그러자 더더욱 상인 일행들이 솔라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솔라는 피곤한 눈을 했다.
“업보라고 생각해, 오라버니.”
옆에서 동생 루나가 놀리듯 속삭인다.
“부담스러울 것 같긴 하지만 전부 좋은 일로 생긴 소문이군. 로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야?”
옆에선 로뮤가 신기하다는 듯 솔라와 상인들을 훑었다.
“……어쨌든 무사히 볼카까지 가길 바란다. 우린 갈 길이 멀어서 이만.”
솔라는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로안 기사님! 이대로 보내게 되면 저희 상단은 값을 치르지 못한 상단으로 소문나게 됩니다! 부디 저희의 성의를 받아 주십시오!”
소문대로(?) 광위의 기사가 금전을 거절하자, 상인은 안절부절못한 안색으로 길을 떠나려는 솔라의 앞을 막았다.
“하아.”
상인의 말에 솔라는 한숨을 쉬면서 그 상인이 바칠 은화 주머니를 기다렸다. 저렇게 주고 싶어 하는데 안 받을 수는 없다.
“허억! 죄, 죄송합니다. 금전을 계속 권유하는 것도 기사님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는 행동이었을 텐데…….”
그런데 상인은 솔라의 한숨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
“돈이 필요 없으시다면…… 그래! 그렇다면 이거라도 바치겠습니다! 광휘의 기사에겐 역시나 명예만 한 것이 없겠지요! 요한! 음유시인들을 불러와라!”
“예! 상단주님! 테크나 악단은 광휘의 기사님 앞으로 나와라!”
상인의 외침과 함께 상단 뒷열에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광휘의 기사님을 뵙습니다!”
“루한 제일의 영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기사님의 이번 무용도 노래로 만들어 널리 알리겠습니다!”
음유시인 셋은 솔라 앞에 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신을 향한 경배라도 하듯 말했다.
실제로 음유시인 주위에 있던 상인 중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며 성호를 그었다.
“가관이군.”
이를 본 로뮤가 짧게 말했고. 로뮤의 말을 들은 루나가 푸흡 하고 웃음을 애써 참았다.
“…….”
솔라는 이제는 반쯤 해탈한 얼굴로 이 상황을 넘겼다.
“그래서 뭘 바치겠다는 거지?”
그는 힘없이 상인과 음유시인에게 물었다.
“이들은 테크나 악단이라고 요즘 변경백에서 가장 뛰어난 음유시인들입니다. 볼카 영웅들의 무용담을 조사하기 위해 저희 상단에 합류했습지요.”
상인이 대표로 음유시인들을 소개했다.
“요즘 변경백은 물론 루한 전역에서 제일 인기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를 기사님 앞에서 공연할까 합니다.”
“노래라.”
상인의 제안에 솔라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로 와서 음유시인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했다. 궁금했다. 이 중세 판타지에서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
“오오오! 나도 들을래!”
“인간종의 노래는 어떤지 궁금했는데 잘됐군.”
루나와 로뮤 또한 눈을 빛내면서 자리를 잡더니 자연스레 앉았다.
“이 노래만 듣고 가지.”
솔라 또한 요즘 루한에서 가장 유행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시즈와 함께 길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얼마나 후회할지 모르고서.
“광휘의 기사님 앞에서 광휘의 기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다니! 일생일대의 영광입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음유시인 중 대표로 보이는 자가 감격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비록 저희가 만든 노래는 아니지만, 이 루한에서 저희 악단보다 이 노래를 잘 부르는 악단은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기사님의 명예를 찬양하기엔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
그 말에, 솔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띠리링~♬”
류트와 피리 연주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었다.
“잠, 잠깐……!”
솔라의 목소리는 연주 소리에 묻혔다.
“그대, 그거 아는가? 광휘를 휘날리는 방랑 기사님 말일세.
금발 금안에 누구보다 고귀한 피가 흐르는 기사님 말인가?
그래! 여왕님도 관심 가지시는 방랑 기사님이지.
신분을 초월한 혜안은 그림자를 다루는 마녀를 의동생 삼았고, 뜨거운 정의와 빛나는 명예로 동쪽에서 도적들과 사령술사를 무찌르셨지.
그뿐인가? 이번엔 남쪽에서 사악한 제국군을 물리치셨지.
그것도 무적의 암흑군단을!
도살자 대공도 그분의 광휘 앞에서 검을 거두고 등을 보였으니.
드디어 루한에 봄이 오고 있네!
여왕께서도 늘 그분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계시니, 어쩌면 순백궁에도 봄이 왔을 수도 있겠지.
추운 겨울의 나라 루한에 광명을 품은 기사님이 봄을 가져다주셨네.”
음유시인들이 부른 노래는 광휘의 기사 로안 샬루트를 찬양하는 노래였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솔라는 수치사당할 뻔했고, 옆에 있던 루나는 박장대소하면서 단번에 그 노래를 외워 버렸다.
로뮤 또한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음유시인에게 은화를 건넸다.
* * *
상인들과 헤어지고 솔라 일행은 쉬지 않고 이동했다.
덕분에 지금 그들은 나베트 마을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도달했다.
솔라는 아까보다 더욱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반면 루나와 로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어떤 노래를 흥얼거렸다.
“추운 겨울의 나라 루한에~♬”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인데, 동생 루나시르네는 의외로 노래를 잘 불렀다.
“광명 품은 기사님이 봄을 가져다주셨네~♪”
“……하지 마라.”
솔라는 빗자루에 올라타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 마라~♬”
하지만 루나시르네는 솔라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 오히려 솔라의 경고를 흥얼거리던 노래의 멜로디에 맞춰 부를 뿐이다.
“그대, 그거 아는가~♪”
그때 옆에서 또 다른 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이엘프 로뮤였다.
로뮤 또한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루나가 부르던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
솔라는 로뮤와 루나 사이에 껴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고, 루나와 로뮤는 심심할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다.
“광휘를 휘날리는 방랑 기사님 말일세♬”
이제는 루나가 한 소절을 부르면
“금발 금안에 누구보다 고귀한 피가 흐르는 기사님 말인가?♪”
로뮤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소절을 불렀다.
[그래! 여왕님도 관심 가지시는 방랑 기사님이지♬]
허리춤에 있던 루시도 어느새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푸른색 마검 루시마저도 자신을 배신(?)하자, 솔라는 루시 대신 등에 맨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만지작거렸다.
‘멜로디는 왜 쓸데없이 좋아서.’
가사만 빼면 참으로 듣기 좋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다.
문제는 왜 그런 좋은 음률에 이딴 가사를 처넣느냐는 것이다.
작곡가는 몰라도 작사가를 찾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솔라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