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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65화 (65/212)

제65화

#65.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최근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보였다.

쥴리아는 서서히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화릇, 화르르.

아이의 의식이 희미해짐과 함께 그녀는 지켜 주던 애증의 화염도 사그라든다.

솔직히 삶의 의지를 불태우면 하루 정도는 더 버틸 것 같았다. 하지만 쥴리아는 더 이상 살기가 싫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죽기 전에 광휘의 기사님을 못 보는 것. 다시 만나게 되면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어린아이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급격히 추워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점점 의식이 깊어짐을 느낄 때.

화아아앗.

“……?”

냉기 가득했던 폐가가 더워짐을 소녀는 느꼈고, 익숙한 냄새, 익숙한 기운에 감기던 눈을 스르르 떴다.

눈앞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광휘가 보였다.

금발 금안의 눈부신 남자가,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빛의 기운이 너무나 포근하고 따듯하다.

이윽고 광명이 쥴리아를 품에 안았다.

쥴리아는 그의 품이 이상할 정도로 친숙했다. 그때 마을에서 자신을 안아 들었을 때와 변함이 없다.

엄마의 품이 이런 느낌일까? 너무나 좋은 품이라서 메마른 눈가에서 눈물이 났다.

의식이 희미한 와중에도, 쥴리아는 자신을 안아 준 기사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민했다. 여자였다면 주저 없이 엄마라 불렀겠지만. 그녀를 안은 기사님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아빠…… 아빠…….”

쥴리아는 몽롱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친부는 늘 자신을 자식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린 쥴리아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남자야말로…….

“아빠라고?”

쥴리아의 말을 들었는지 솔라시우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응, 아빠…….”

어린 쥴리아는 이분이 자신의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확실하다. 이토록 포근한 품속과 친숙한 냄새를 보라.

모두가 외면했던 자신을 유일하게 봐 주고 안아 주었고 이름까지 지어 줬다.

그럼 아버지가 맞다.

“…….”

시야가 뿌옇다. 그래서 자신이 아빠라 부른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 * *

“하루, 아니, 반나절만 늦었어도 아사할 뻔했어.”

로뮤가 뼈만 남은 어린 소녀를 살피며 말했다.

로뮤의 말에 솔라는 품 안의 쥴리아를 보았다.

솔라는 로뮤에게서 받은 나무로 된 병을 들고 있었고, 그 병을 기울여 줄리아의 입에 어떤 액체를 부었다. 엘프의 과일즙이었다. 듣기론 엘프의 과일즙은 영양소가 풍부하고 기력 회복에 좋다고 그랬다. 지금처럼 오랫동안 굶은 쥴리아에겐 최적의 음료였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정령사의 자질이 있다는 거야?”

로뮤 바로 옆에선 루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쥴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정령사의 자질은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도 딱히 와 닿는 게 없고.”

루나는 쥴리아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어린 소녀에게선 흑마법이나 악마의 기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정령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속으로 들어오는 엘프 과일즙을 잠결에 마시는 쥴리아의 얼굴은 평온했다. 기아에 질려 있던 소녀의 안색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이렇게 둘이 붙어 있으면 느끼기 힘들어. 이 아이의 속성이 로안의 마나에 묻혔거든.”

로뮤는 그렇게 말하면서 솔라와 쥴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로안, 아마 너라면 본능적으로 느꼈을 텐데?”

“뭘 말이지?”

뜬금없이 로뮤가 자신을 지목하자, 솔라가 미간을 좁혔다.

“마을에 고아가 이 아이만 있는 게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유독 이 아이만을 콕 찍어서 구원했지.”

“……제일 굶주린 거 같아서 그랬어. 그때도 죽기 일보 직전인 아이는 얘밖에 없었거든.”

“과연 그럴까? 이 아이에게선 로안, 너와 비슷한 냄새가 나.”

“나랑 비슷한 냄새?”

“너처럼 환한 빛은 아니지만. 강렬한 불의 냄새가 나. 으음…….”

로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얼마 후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딸? 이게 가장 정확한 관계군.”

입을 연 로뮤는 자신 말한 비유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까지 끄덕였다.

“실제로 이 쥴리아라는 아이도 너를 아버지로 느끼고 있어. 아까부터 너를 아빠라고 불렀잖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야.”

[뭐라고?!]

로뮤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푸른색 마검 루시였다.

그동안 조용히 이 모든 상황을 구경하던 그녀는 로뮤의 말에 화들짝 놀라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언제 그랬던 거야?! 일부 질 나쁜 귀족들이 평민 아녀자를 겁탈해 사생아를 만든다던데…….”

이어서 동생 루나시르네가 경계 가득한 눈으로 솔라를 쳐다본다.

“쥴리아의 금색 눈동자가 이상하긴 했어!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이 인간아! 도대체 몇 살 때……!”

“아니야.”

빡!!

“끼엑!!”

그런 동생을 향해 솔라가 무심한 눈으로 꿀밤을 때렸다.

“난 스무 살까지 요정 숲에서 구르고 있었어. 무슨 수로 이 멀리까지 와서 그런 사고를 치겠냐?”

“끼으으으, 아파라……!”

모처럼 오라버니에게 진심으로 맞은 루나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상하게 통쾌하군.’

루시푸르네는 머리에 난 혹에 아파하는 루나를 보면서 속으로 고소해 했다.

요 근래 많이 친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예전의 앙금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보다.

“제대로 설명해, 로뮤.”

솔라는 짜게 식은 눈으로 로뮤에게 말했다.

“당연히 이 아이와 로안의 관계는 생물학적인 관계가 아니야.”

로뮤가 상황을 진정시킬 겸 바로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그래. 요정 숲을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 나를 굴린 사람이 바로 너였으니까, 로뮤.”

그의 설명에 솔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쾌락 없는 책임을 질 뻔했기에 더욱 다행이라 여겼다.

“역시, 오라버니가 그럴 리 없지!”

[휴우.]

로뮤의 말에 루나와 루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일 먼저 의심했던 애가…….”

로안은 안도의 숨을 쉬는 루나를 보며 혀를 찼고, 다시 시선을 로뮤에게 돌려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둘의 관계는 육친보다 더 가까워.”

“……?”

“?!”

[!!]

하지만 이어지는 로뮤의 말에 다시 한번 그들의 얼굴은 의문에 빠졌다.

뜬금없는 로뮤의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종과 달리 엘프들은 육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우리에게 육신이란 영혼이 입는 옷 정도야.”

쥴리아와 솔라는 영혼과 마나가 비슷하다고 했다.

“마나는 영혼이 지닌 카르마의 결정체, 마나가 비슷하다는 것은 영혼이 비슷하다는 뜻이지. 이는 외모가 닮은 것보다 더 의미가 크고.”

“즉, 영혼으로 이뤄진 부녀 관계라는 거지? 전생이 둘이 무슨 관계였던 거야?”

로뮤의 설명에 루나가 눈을 빛냈다.

“득녀를 축하드려요, 로안 오라버니? 나 졸지에 조카가 생겨 버렸네?”

루나는 놀리듯이 솔라에게 말했고.

‘전생보단 지구에서 맺었던 인연 중에 있을지도?’

솔라는 복잡한 시선으로 품 안의 쥴리아를 보았다. 지구에서 대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인연을 맺었고 잃었다. 하나같이 소중했던 동료들.

어쩌면 그들 중 한 명이 환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억측일까? 어찌 되었든 신경은 쓰이는군.’

상황이 이렇게까지 흐르자 솔라는 품속의 아이를 마냥 외면하기 힘들었다.

본래엔 인근 도시의 신전에 맡길까 했는데 계획을 변경해야 될 듯싶었다.

“만약 마땅히 키울 곳이 없으면 요정 숲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펴 줄 수는 있어. 인간의 10년은 엘프에겐 한때에 가까우니까. 정령사는 엘프들도 싫어하진 않고.”

“육아에 대한 부담도 없어졌네? 나도 최대한 도울게, 오라버니!”

루나는 이미 쥴리아를 자신의 조카로 삼은 모양이다. 하기야, 애초에 쥴리아라는 이름도 그녀가 지어 줬다. 정이 안 갈 수가 없지.

“하지만 딸로 두긴 좀 그래. 결혼도 안 했는데 딸이라니.”

솔라는 쥴리아를 발견한 폐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딸이든 동생이든 제자든, 아무렴 어때?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아…… 별수 없지.”

‘당연하지만, 쥴리아는 원작에선 없던 캐릭터야. 본래라면 진즉에 굶어 죽었을 테니까. 히든 피스의 일종일까?’

결국 솔라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 쥴리아라는 아이의 입양, 나는 찬성이다.]

그때 조용히 있던 루시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솔라의 영적인 딸이라니……. 솔라와 영혼적으로 비슷하다니!’

여왕 루시푸르네는 괜히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솔라와 비슷하다면 나랑 가까이 있을 수 있겠지?’

이 아이라면 설원의 저주를 끝내 풀지 못해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원의 저주를 끝내 풀지 못해도 자식처럼 키울 아이가 생긴 것이다.

솔라와 육신으로 이어지는 자녀는 유리아에게 맡기고, 솔라와 영혼으로 이어진 아이는 루시가 키우는 거다.

참으로 숭고하고 멋진 모녀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나와 정반대의 속성이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루시는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왕궁으로 오면 정식으로 양녀로 거두는 거야.’

보아하니 솔라도 저 쥴리아라는 아이가 싫지는 않은 모양.

‘설령 설원의 저주를 해주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어! 저 아이는 솔라와 영혼으로 이뤄진 관계라고 했으니까!’

루시 또한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정령을 다룰 줄 알았다. 쥴리아와 정반대되는 속성이지만 말이다.

‘반대되는 속성이라도 문제없어! 아버지가 바로 화염의 대마법사니까!’

루시의 아버지 루카스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 것이다. 루카스는 불의 마법사이기도 하니까. 정령사에게 도움이 되는 화염 마법이나 마도구를 전수해 줄 법도 하다.

[나는 이 아이가 마음에 든다. 가슴으로 키우면 되는 게 아닌가? 나도 진심으로 돕겠다.]

“그래……. 루시, 고마워.”

딱히 이 마검에게까지 동의를 구할 생각은 없었지만, 솔라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푸른색 마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저 아이를 굳이 요정 숲에 맡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루한의 섭정 루카스가 화염 마법의 대가라고 들었다. 루한의 여왕도 나름 정령술에 일가견 있고.]

“그들에게 부탁을 하라고? 들어줄까?”

[당연히 들어줄 것이다! 이 루한에서 그대가 행한 업적을 봐라! 거절하면 인간도 아니지!]

루시는 간만에 솔라에게 열변을 토했다.

[인간의 시간과 엘프의 시간은 다르다. 요정 숲에서 자란 그대가 더욱 잘 알 테지. 인간은 인간의 품에서 커야 한다.]

“확실히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모처럼 루시가 그럴듯한 말을 한다. 솔라는 진심으로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요정의 숲에서 자란 그였지만 이걸 남에게 추천하진 못하겠다.

그 또한 로뮤라는 별종 엘프가 있었기에 무난히 성장했다고 생각했으니까.

솔라는 오랜만에 그녀의 푸른색 검 손잡이를 쓰다듬어 줬다.

[이 손길…… 으음, 오랜만이구나!]

루시는 오랜만에 솔라의 손길을 느꼈다.

양녀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쥴리아를 거두기로 결정한 솔라 일행은 잠들어 있는 쥴리아를 바라보았다.

키에에?

푸르릉.

사람뿐만 아니라 폐가 밖에 있던 맨카와 시즈 또한 창문을 통해 쥴리아를 구경 중이다. 놈들은 자신의 주인과 놀랍도록 유사한 냄새를 내는 소녀를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으응…….”

사람 셋과 탈것 둘의 시선을 받던 쥴리아는 엘프 과일즙으로 기력을 회복했는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선명하고 빛나는 세상이 쥴리아를 반겼다.

창가와 폐가 안에서 여러 시선이 그녀를 보고 있다. 시선에는 하나같이 호감과 따듯함이 담겼다.

“아빠……?”

쥴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안고 있는 솔라를 향해 말했다.

“…….”

솔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뭐라 할지 고민 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도 안 한 총각이 졸지에 애 아빠가 되는 건 좀 그랬다.

[로안 샬루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것이냐? 때론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본다.]

솔라가 망설이자, 그의 허리춤에 있던 마검 루시가 일갈한다.

“솔직히 거짓말이라고 보기도 애매해.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니까.”

루시의 일갈에 옆에 있던 로뮤가 거들었다. 약 올리는 것인지 아니면 진담으로 말한 것인지, 솔라는 헷갈렸다.

“얘, 고모라고 불러 보렴.”

루나는 한술 더 떠서 쥴리아에게 자신을 고모라고 소개했다.

“…….”

쥴리아는 이 상황이 낯선지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쥴리아의 시선이 문득 솔라가 허리에 찬 푸른색 마검으로 향했다.

자신을 안고 있는 아버지(?)와 정반대되는 시원한 기운.

반대의 기운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버지와 어울렸다.

덥석.

쥴리아는 홀리듯 손을 뻗어 루시를 만졌다.

[헉!]

솔라의 손길과 놀랍도록 비슷한 느낌을 주는 아이의 손길에 루시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엄마?”

이어서 쥴리아의 입에서 경악할 단어가 나왔다.

“누, 누가? 저 마검이?”

코앞에서 그 말을 들은 루나가 황당하다는 듯 쥴리아에게 물었고.

“역시, 인간은 재밌어.”

로뮤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는다.

[나……? 나 말이냐, 아이야?]

루시는 떨리는 정신을 진정시키며 쥴리아에게 되물었다.

“응, 엄마…….”

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의 뺨(손잡이)을 쓰다듬었다.

[그, 그래! 내가 네 어미다! 앞으로 어머니, 아니, 엄마라고 부르렴!]

여왕은 졸지에 생긴 딸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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