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66.
그날 밤.
루한의 수도 윈테라, 여왕의 침실 앞.
“어린 귀족 영애가 입을 옷이랑 인형…… 말입니까?”
시녀장 베네사는 여왕은 갑작스러운 요구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이는 10살 정도다. 귀족가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책도 있으면 최대한 수배하거라. 장난감 중에 마도구로 만든 장난감이 있으면 그것도 준비하고. 또…… 그래! 몸에 좋다는 음식이랑 영약도 알아봤으면 좋겠어!”
루시푸르네는 베네사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지시를 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베네사는 조심스레 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요 근래 제일 밝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로안 경과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뜬금없는 지시였지만 그 지시의 원인은 대강 짐작했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요?”
“딱히 더 떠오르는 건 없다. 늦은 밤에 불러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폐하. 바로 가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편으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베네사는 생각했다.
볼카를 위협하던 암흑군단과 암흑대공이 패퇴했다.
여왕을 위협하던 재상은 폐관 수련을 핑계로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더니 이제는 감감무소식이다.
광휘의 기사라는 칭호로 더 유명한 로안 경은 고대의 데몬을 무찔렀고, 태양샘 반지를 얻었다고 했다.
원래라면 태양샘 반지를 얻고서 바로 왕궁으로 가야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요정 숲에 들린 후에 왕궁으로 오기로 했다고 들었다.
‘폐하의 저주가 풀리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침실 문을 닫은 베네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서둘러 방금 주군께서 지시하신 일을 할 생각에 머릿속이 바빠졌다.
타다다다닷.
그때, 침실과 연결된 알현실 문 쪽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는 게 들렸다.
“시녀장님! 하이마 경과 루카스 공이 폐하를 뵙기 청합니다!”
이윽고 알현실 문 앞에 있던 시녀들이 방문한 이의 신원을 알렸다.
느낌상 급한 일인 모양.
“폐하께 말씀드리겠다고 전하렴.”
베네사는 시녀들에게 말하고 급히 발을 돌려 여왕의 침실 문을 두들겼다.
“폐하! 하이마 경과 루카스 공이 급히 폐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베네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여왕께 알렸다.
‘부디 안 좋은 소식이 아니면 좋을 텐데…….’
하지만 보통 저런 경우는 늘 좋지 못한 소식이었지.
“알았다!”
여왕의 기쁨 어린 목소리가 베네사의 가슴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네, 알현실 끝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베네사는 뛰듯이 알현실 끝으로 이동했고 알현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각한 표정의 하이마와 루카스가 서 있었다.
“폐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알겠네.”
“늦은 밤에도 수고가 많구려, 시녀장.”
“그나저나 무슨 일 때문에 그렇습니까?”
베네사는 벌렁거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요 근래 너무 좋은 일만 생기긴 했다.
“제국의 흑태자 세피로스가 황제로 즉위했소.”
‘역시나!’
안 좋은 소식이었다.
* * *
악황후 옥타나의 아들 흑태자 세피로스.
아버지 황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따로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제국의 새 황제를 ‘악황제’라 불렀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마법 통신을 타고 대륙 전역에 퍼졌다.
“서둘러야겠군.”
솔라가 굳은 눈으로 짐을 챙기면서 말했다.
방금 폐가 인근을 지나던 상인들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폐가에서의 하룻밤 노숙을 끝내고 너도나도 일어나 짐을 챙겼다.
“흑태자가 황제가 되었다니…….”
1황녀이기도 한 루나시르네도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솔라를 힐끔 보았다.
‘오라버니는 괜찮을까?’
본래 지금 황제의 자리는 1황자인 자신의 오라비에게 가야만 했다. 제국 태양궁의 황금 옥좌에 어울리는 남자는 오직 솔라시우스뿐이다.
그와 함께 생활한 지는 길지 않았다만 루나는 이를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황위를 찬탈당한 오라버니의 심정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로안, 네가 요정 숲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이유가 이거였어?”
하이엘프 로뮤가 노숙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솔라에게 물었다.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대군을 요정 숲과 대초원으로 집결시키고 있다고 들었어. 예지라도 한 거야?”
로뮤의 표정도 솔라와 루나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고향 요정 숲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얻어걸린 거야. 이걸 예상하진 않았어.”
로뮤의 물음에 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악황제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진짜 몰랐어.’
이 또한 분명 원작과 다른 부분이다.
[…….]
마검 윈테이라와 동기화 중인 루시 또한 말이 없었다. 그녀도 어제 루카스와 하이마로부터 이 소식을 접했기 때문.
‘회귀 전과 너무 달라졌어. 악황제의 이른 즉위, 재상이 조용한 이유와 연관이 있나? 어쩌면 세계수와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여왕 또한 마음이 심란하긴 마찬가지.
부스럭부스럭, 땡그랑!
모두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짐을 정리 중인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쥴리아?”
소리의 지원지는 바로 쥴리아였다.
아이는 시키지도 않은 짐 정리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그릇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린 거고.
“뭐 하는 거니?”
루나가 대표로 쥴리아의 지금 행동을 물었다.
“도, 도와 드리려고…….”
그릇을 바닥에 떨어트린 쥴리아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아마도 혼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
“어쩜!”
그런 조카(?)의 모습에 루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소녀는 구타나 욕설 대신 따듯한 손길이 오자 놀란 눈을 했다.
밤사이 아이는 루나와 로뮤의 마법으로 깨끗한 상태가 되었고, 옷도 나베트 마을에서 사온 새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만 아니면 어제의 쥴리아와 지금의 쥴리아는 알아보기 불가능할 정도다.
“이런 거 언니랑 오빠들이 다 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루나가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
하지만 쥴리아는 그런 루나의 말에 더욱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저, 뭐든 할 수 있어요! 뭐든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부디 절 버리지 마세요!”
쥴리아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절대 안 버린다! 누가 널 버린다고?!]
그러자 루시가 발악하듯 외쳤고.
“걱정 마, 그럴 일은 절대 없어!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알았지?”
루나도 괜히 가슴이 짠해졌는지 쥴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루나의 위로에도 아이는 여전히 불안해 했다.
“쥴리아, 이쪽으로 와라.”
그때 솔라가 불안해 하는 쥴리아를 불렀다.
하늘 같은 아버지(?)의 부름에 쥴리아는 루나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쪼르르 솔라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너는 이 수건으로 이것들을 닦으렴.”
솔라는 쥴리아에게 자신의 견갑과 검집, 신발 등을 넘겼다.
쥴리아의 손에는 수건이 쥐어졌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기사님.”
아버지라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던 줄리아는 솔라를 기사님이라 불렀고, 솔라는 늘 짓는 무심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깨끗이 닦을 때마다 이 동화를 한 닢씩 주마.”
물론 공짜로 시키진 않았다. 그는 쥴리아에게 동화로 된 동전을 보였다.
이번에 마을에서 아이의 옷을 사고 받은 거스름돈이었다.
“하지만 검은 절대 손대지 마라. 알았지?”
그러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쥴리아는 비로소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할 일이 생겼다. 쓸모가 있다.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소녀의 어린 생각은 이러한 알고리즘으로 이어졌고, 자신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솔라가 맡긴 것들을 닦기 시작했다.
쥴리아에게 신발과 검집, 견갑 등을 넘긴 솔라는 인벤토리에서 여분의 장비를 꺼내 다시 입었다.
“너희도 쥴리아에게 간단한 심부름 정도는 시켜 줘. 대가로 음식이나 동화 같은 걸 주고.”
“그러지.”
“응! 오라버니의 방식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만약 지구였다면 아동 학대니 같은 논란이 생겼겠지만.
이세계에서는 오히려 이게 맞다.
[로안, 나도 해당되는 건가?]
그때 잠잠히 있던 루시가 불쑥 솔라에게 물었다.
“뭘 말이지?”
[그…… 쥴리아에게 심부름 말이다.]
“……?”
[검날은 위험하지만 손잡이 정도는 닦아도 되지 않을까……?]
솔라가 의아한 눈을 하자 루시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대가는 내가 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으로 하겠다. 이야기책, 아니, 알고 있는 이야기가 제법 된다. 으음, 위험하려나?]
말을 이을수록 루시는 괜히 자신감이 떨어졌다.
[농담이다, 하하하……. 위험할 수도 있지. 괜히 저 아이에게 냉기의 저주가 서릴 수도 있고 베일 수도 있으니.]
결국 루시는 아쉬움을 안고 자신의 주장을 접으려 했다.
“아니. 너를 관리하는 것도 심부름에 포함하지. 단, 내가 옆에 있을 때만이야.”
하지만 솔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루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라는 쥴리아가 처음 루시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루시에게 엄마라고 그랬지.’
마검에게 엄마라니. 루나와 로뮤는 이를 어린아이의 실수로 치부한 모양이지만, 솔라는 아니었다.
‘한번 지켜보자.’
그는 둘의 관계를 지켜볼 생각이다.
[정말인가? 고맙다, 정말 고마워!]
의외로 허락이 쉽게 떨어지자, 루시는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나저나 솔라와 나랑 쥴리아가 붙어 있으면…… 정말 가족 같겠군.’
여왕의 상상이 거기까지 미치자 루시는 막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느꼈다.
악황제의 즉위와 제국군의 진격으로 심란했던 기분이 지금만큼은 싹 사라졌다.
* * *
문라이트 변경백 최남단 볼카.
볼카 요새.
성벽의 높은 망루. 유리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
유리아는 근래 미칠 것만 같았다.
단순히 실연의 이유로 이런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아니다.
그녀 또한 볼카 요새에서 자신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지는지 잘 알았다.
이미 병사들이건 기사들이건 유리아의 이상함을 눈치챈 상태.
소문은 그녀가 광휘의 기사에게 고백했다가 차여서 정신이 나갔다는 정도로 퍼져 있었다.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병사는 문라이트 후작이 직접 처벌했기에 공공연히 나돌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소문은 완전히 틀렸다. 실연의 아픔이 있던 건 맞았으나, 지금 그녀의 상태는 단순히 실연 때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건 뭔가 이상해.’
때문에 그녀는 억울했다.
어느 날부터 목이 계속해서 따끔했다.
-안녕? 내 이름은 알파야. 본래 이름은 따로 있는데 나를 거둔 흑마법사가 알파로 부르더군?
-나이는 세어 본 지 오래됐어. 그래도 못 해도 수만 년은 됐을까?
-그나저나 아가씨, 참으로 깨끗한 몸을 지녔잖아?
-힘, 힘을 얻고 싶지 않아?
그리고 유리아의 머릿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인지 의지인지, 아니면 악마의 유혹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광휘의 기사가 죽였다는 고대 데몬의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당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아?
-기사도? 그건 강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거야.
-너는 약해. 너에게 기사도는 어울리지 않아.
이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떤 의지, 상념에 가까웠다.
-네가 약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거야.
-네가 약해서 눈앞에서 빼앗긴 거야.
-네가 강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 남자도 너를 좀 더 가치 있게 대했을 테고.
유리아는 망상을 하는 느낌으로 머릿속을 차지한 사념에 시달려야 했다.
‘그만…… 제발 그만해!’
이 사념은 유리아에게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마약을 접해 보진 않았지만 마약을 접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릿속의 상념은 최근 유리아가 유독 심하게 느꼈던 콤플렉스를 집요하게 헤집었다.
단순히 텔레파시를 주는 게 아닌, 치명적이면서도 달콤한 환상을 유리아에게 보였다.
“나는…… 나는……!”
그녀는 밤마다 꿈을 꿨다.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 로안 샬루트와 함께 대륙을 떠돌면서 기사도를 행하는 꿈을.
꿈속에서 로안 샬루트는 여왕을 뿌리치고 자신을 선택했다.
꿈속 세계에서 유리아는 아주 강했고 여왕보다 가치 있었으니까.
둘은 함께 제국군을 막고 암흑대공을 무찌르고 악황후와 악황제를 죽였다.
그리고 늘 마지막에는 로안이 유리아에게 청혼하는 것으로 꿈이 끝났다.
그가 자신의 손에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껴 주며 깊게 키스를 하면 유리아는 꿈에서 깨어났다.
참으로 행복한 꿈.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순간, 일그러진 현실이 유리아를 맞이했다.
매일 아침마다 유리아는 행복과 절망을 동시에 느껴야 했으니, 이보다 비참할 순 없었다.
그 꿈은 악몽이었다.
-꿈은 현실의 그림자 같은 거야.
-나와 손을 잡자. 그럼 현실도 꿈처럼 바꿀 수 있어!
-가장 고결한 심장, 가장 순수한 피를 너에게 줄게.
상념과 꿈은 하루 종일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었고, 유리아는 점점 멍해지고 피폐해졌다.
“할게. 내게 힘을, 힘을 줘! 내 남자…… 오직 나만의 남자! 로안 샬루트를 차지할 수 있는 힘을!”
그녀는 결국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