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67.
유혹에 넘어가고서 며칠이 지났다.
꿀꺽.
유리아는 몇 번째인지 모를 갈증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났고 아무리 먹어도 허했다.
머릿속은 계속해서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답답했다. 이 답답함을 풀기 위해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하지만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살육 충동만 더해질 뿐.
‘그때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어!’
성벽에 선 유리아는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했다.
-죽여, 죽여, 죽여!
-힘을 얻었으면 써야 할 거 아니야?
환청 같은 게 계속해서 그녀를 충동질했다.
-심장을 뽑아 먹어! 그 심장 안에 가득한 생명의 원천을 먹어!
-그러면 이 갈증과 이 배고픔과 이 답답함이 사라질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충동은 커져만 갔고 유리아의 몸과 마음을 잠식해 갔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충동대로 하고 싶을 정도로.
-나약한 것들은 심장을 뽑아 먹고, 쓸 만한 것들은 너의 노예로 만들어.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군단을 소유할 수 있어. 불멸의 군단을 말이야.
-이 재미없는 요새를 시작으로 쭉쭉 올라가는 거야. 왕국의 수도까지, 쭉!
-아니면, 제국으로 가는 것도 나는 찬성이야. 날 보살펴 준 흑마법사가 곤란해 할 것 같지만 말이지.
키키키키킥!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웃긴 것이.
‘로안…… 로안 샬루트!’
당장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함에도 그녀의 머릿속 중심에는 언제나 ‘그 남자’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의 몸을 노리는 ‘알파’의 계략일지도.
‘그에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 버텨야 해! 이겨 내야 해!!’
유리아는 광휘의 기사를 떠올리며 끙끙 버텼다. 이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마법사에게도 가 봤고 사제에게도 가 봤다.
하지만 다들 유리아의 몸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살인 충동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강해진 힘도 보여 주지 못했다.
‘엘프들이라면 방법을 알지 않을까?’
그녀의 생각은 엘프에게까지 미쳤다. 마침 이 요새엔 엘프가 있다. 그들이라면 이 저주에 대해 알지 모른다.
-어림도 없지! 그 냄새 나는 귀쟁이들에겐 절대 가지 마! 근처에도 얼씬하지 마!
-역겨운 세계수! 역겨운 귀쟁이들! 지금은 무리지만 언젠간 기필코 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유리아는 엘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그녀가 엘프에게 가까이만 가려 하면 알파가 그녀의 몸을 속박했기 때문.
유리아는 서서히 자신의 몸을 빼앗기는 기분을 느꼈다.
‘이대론 안 돼!’
그녀는 성벽에 서서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파가각!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단단한 성벽이 부서졌다.
요 근래 바뀐 신체 변화 중 하나. 완력도 민첩성도, 그리고 오러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지금의 그녀라면 아버지 빼고 다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어쩌면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우읍!”
헛구역질이 나왔다.
힘의 대가 때문인지 최근 들어선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정상적인 음식을 먹으면 역겨움을 느껴 씹고 삼킬 수가 없었다.
사실상 굶다시피 했다.
밥을 먹으나 굶으나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저 생고기, 익히지 않은 고기, 피가 뚝뚝 묻어 있는 고기, 무엇보다 살아 있는 심장이 먹고 싶다.
‘죽자!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유리아는 자살을 결심했다. 아직까진 몸의 통제권은 그녀에게 있다. 엘프들에게 가려 할 때만 아니면 알파는 그녀를 강제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단검으로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캉.
“……!”
단검에 오러를 넣고 가슴에 밀어 넣었지만, 그녀의 피부와 근육도 강해져 있었다. 피부가 오러가 담긴 검날을 튕겨 냈고 간신히 생채기라도 나면 금세 재생되었다. 트롤의 재생력을 아득히 웃돌 정도.
그녀는 문득 성벽 아래를 쳐다봤다.
지금 그녀가 선 성벽은 유독 높았다.
‘머리부터 떨어지면 그래도 목은 부러지지 않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령 죽지 않더라도 제국으로 가자!’
몸을 빼앗겨 심장을 파먹는 괴물이 되더라도 사랑하는 고향 땅에서 그러긴 싫었다.
‘제국으로 가면 로안 경과 마주칠 일도 없겠지.’
연모하는 남자에게 그런 추한 몰골로 척살당하긴 싫었다.
‘뛰어내리자. 죽으면 그걸로 좋은 것이고, 살아도 제국에서 폭주하자!’
유리아는 침을 삼키고는 성벽 난간 끝에 올랐다.
키키키키킥~.
알파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 * *
고대의 데몬도 없겠다, 제국군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겠다.
볼카 요새는 빠르게 재건되기 시작했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
문라이트 후작은 재건 중인 볼카 요새를 둘러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영지를 너무 오랫동안 비워 뒀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군요. 알버트와 아돌프도요.”
후작의 말에 장남인 프리드리히가 동의한다.
“무엇보다…… 요즘 유리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으음…….”
장남의 말에 지크문트는 신음을 삼켰다.
광휘의 기사가 요새를 떠나고서 지금까지 유리아는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
후작이나 프리드리히가 잠시라도 시선을 거두면 성벽이나 창가에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다.
“유리아의 상사병이 보통 심한 게 아닌 모양입니다. 이러다 큰일이 나는 게 아닌지 염려됩니다, 아버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둘은 유리아를 생각하면서 안타깝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중에 폐하께 요청이라도 해 보지요?”
“말이 되는 소릴 하거라.”
프리드리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후작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는가?
“넌지시 의중이라도 살펴보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에도 장남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령 불호령이 떨어지더라도 가문에는 해가 안 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변경백이 지금까지 루한에 기여한 공을 생각하면 폐하께서도 그 정도 무례는 한 번쯤은 넘어가 주시겠지요.”
“으음…….”
프리드리히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문라이트 후작도 다소 고민이 되는 모양.
‘유리아는 뭘 하고 있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문득 성채를 둘러보면서 유리아를 찾았다.
사랑하는 딸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그러다가 저 위쪽 성벽 난간 끝에 서 있는 분홍 머리 여기사를 보았다.
“유리아!”
딸의 위태로운 모습에 깜짝 놀란 후작은 기함을 토했다.
“이런!”
후작의 외침에 뒤이어 유리아가 있는 곳을 본 프리드리히 또한 경악한 얼굴을 했다.
둘은 재빨리 유리아를 향해 달려갔다.
덥석!
“얘가 미쳤나!”
프리드리히가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그리고 떨어지기 직전의 동생을 성벽 뒤로 패대기치듯이 던졌다.
“유리아! 이게 무슨 짓이냐!”
문라이트 후작은 분노한 얼굴로 바닥에 엎어진 유리아를 노려봤다.
“…….”
유리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게…….”
아버지의 호통에 정신이 든 유리아는 악마에게 저주받았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네? 그냥 루한으로 가야겠다!
키득, 키득, 키득, 키득.
알파에 의해 저지당했다. 녀석은 영악하게도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을 때만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유리아라도 먼저 영지로 보내야겠다!”
“아버지! 그 전에…… 엘프들에게 유리아의 상태를 진찰하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프리드리히에게서 엘프가 언급되자, 유리아가 희망이 담긴 눈을 빛냈다.
“내가 그 생각을 안 했겠느냐? 진즉에 요청했고 진즉에 거절당했다.”
아들의 제안에 후작은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 또한 절망감에 눈을 꾹 감았다.
“거절을 말입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잘못이라도 했나요?”
“살다 살다 그렇게 꽉 막힌 놈들은 처음이다. 자신들은 제국군을 상대하러 온 것이지, 그 외의 일은 지시받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로뮤라는 하이엘프가 유별난 거였군요.”
“그래, 만약 그가 여기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엘프들은 로뮤가 사라지자 본래의 성격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오만하고 폐쇄적이었다.
“듣기론 단명종의 시간과 장수종의 시간이 얽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더군.”
그들은 볼카 요새에 머무르면서도 인간들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피했다. 심지어 보급도 볼카 인근 숲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정도.
때문에 함께 싸운 전우임에도 볼카 요새에서 엘프를 볼 수 있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유리아는 곧바로 침실에 갇혔다. 금세 소문이 퍼졌는지, 재건으로 들떴던 요새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자살 소동이 있은 직후부터 알파는 더욱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안심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난 너의 몸을 노리는 게 아니야.
-나는 본래 지성체의 감정에 기생하는 존재.
-너를 타락시키고 그 타락한 감정 속에서 살 뿐.
머릿속에 알파의 상념이 들렸다. 목소리도 텔레파시도 아닌 상념. 분명 유리아의 생각이지만 그녀의 생각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해……. 이상해…….’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아까 있었던 자살 소동도 기억은 하는데 자신이 겪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다.
‘내 생각이, 내 감정이…… 내 게 아닌 것 같아.’
침실에 갇힌 유리아는 평소 늘 입었던 기사 제복도, 그 위의 판금 갑옷도 모두 벗은 상태였다.
무기인 롱 소드와 단검 또한 아버지에게 빼앗겼다.
평소엔 거의 입지 않던 귀족 여식들이 입는 고급스러운 튜닉을 입고 있을 뿐이다.
침실 입구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그녀를 감시 중이다.
“…….”
유리아는 멍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오히려 밤이 깊어질수록 힘이 났고 머릿속 안개도 옅어졌다.
식욕도 더욱 커져서 당장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을 죽이고 심장을 뽑아 먹고 싶었다.
유리아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밤을 견뎠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여기사의 저항.
아침이 되자, 강렬했던 식욕도 힘도 잠잠해졌다. 반대로 힘이 다소 빠졌고 머릿속의 안개가 짙어졌다.
“유리아! 짐을 싸거라! 너라도 당장 영지로 보내야겠다.”
침실 문이 열렸고 그녀의 귀로 문라이트 후작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유리아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상태를 알리려 했지만.
“악……아아……!”
머릿속의 짙은 안개 때문에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리아의 영지행은 되도록 은밀히 진행됐다.
공간 이동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 마법을 할 수 있는 마법사와 마녀는 변경백에 없었다.
“왕도에 부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마차 안에 감금당하듯 들어간 유리아를 보면서 프리드리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뭘 말이냐? 공간 이동이 가능한 마법사를 보내 달라고?”
“유리아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마법사나 마녀를 말입니다.”
“딸내미가 상사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데, 이를 살펴 줄 고위 마도사를 보내 주십시오! 가급적 공간 이동이 가능한 고위 마도사를 말입니다……라고 마법 통신으로 요청하라는 거냐?”
“예! 우리 변경백이 지금까지 루한을 위해 희생한 것을 생각하면 해 줄 겁니다.”
“그래, 네 말대로 가능할 것이다. 폐하라면 재상이나, 섭정을 보내서라도 응해 줄 것이다. 하지만…… 상사병의 원인을 뭐라 말할 거냐? 요청하는 순간 폐하께선 바로 궁금해 하실 거야. 우리가 거짓으로 말해도 그분 곁에는 하이마 경이 있다.”
“…….”
“됐다. 유리아의 이름은 가능한 한 왕궁에 들려선 안 돼.”
후작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후 둘은 말없이 망루에 올라 유리아가 탄 마차를 보았다.
기사들로만 이뤄진 행렬이라 빠르고 안전하게 영지로 갈 수 있을 거다.
“너무 걱정 말아라. 안 그래도 저번에 영지에 있는 둘째에게 왕도에서 실력 좋은 마법사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어젯밤에 적합한 마법사를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보통 실력으론 안 될 겁니다.”
“걱정 마라. 왕도에서 아주 유명한 치료계 마법사가 온다고 했어.”
“유명하다고요?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름이 지하드라고 하더군. 왕도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치료계 마법사라고.”
“들어 본 것 같기도 합니다.”
후작의 말에 프리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 조금이지만.
* * *
유리아가 탄 마차가 볼카를 막 벗어났을 때.
“흐으으…… 으으…….”
마차 안에 있던 유리아는 작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신음과 함께 식은땀을 계속 흘렸고, 그러다 몇 시간 후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수 분의 적막이 죽음처럼 흘렀고 적막의 끝에서 유리아는 굳게 감았던 눈을 떴다.
“…….”
신음도 식은땀도 멍한 눈동자도, 더 이상은 없다.
유리아의 분홍색 눈동자와 분홍색 머리카락은 그 잠깐 사이에 더 진해졌다.
연분홍에 가까웠던 색이 지금은 붉은 느낌까지 드는 진분홍이 되었다.
그녀의 진분홍색 눈동자에 퇴폐미와 함께 색기가 어렸고 이어서 혀를 살짝 내밀어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적셨다.
잠시 벌린 입속에 유난히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