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68.
솔라 일행은 빠르게 요정 숲으로 향했다. 소수 인원이었고 어지간한 도적들은 마녀인 루나를 보고서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에 속도는 거침없었다.
어린이 쥴리아가 있었지만 드레이크 시즈는 쥴리아와 솔라를 둘 다 태우고도 자리가 남았다. 또 승차감도 좋아서 아이에게 큰 피로를 주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요정의 숲 바로 앞에 도달했다.
변경백과 맞닿은 숲, 세계수의 가호가 결계처럼 뻗어 있는 숲, 허락받지 않은 인간은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숲.
요정의 숲 인근에는 작은 마을조차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하지. 정령으로 도착 소식을 전해야 해서.”
숲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로뮤는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더니 숲 안으로 보냈다.
‘솔라시우스의 어머니도 이렇게 했었지.’
이를 본 태광휘는 문득 솔라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요정 숲에서 답변이 오기까지 일주일 정도 걸렸었다.
‘일주일 동안 악황후가 보낸 추적자에게서 몸을 피해야 했지. 그 과정에서 동생 루나시르네를 잃어버렸고 1황후도 큰 부상을 입었었지.’
엄밀히 따지면 장소는 달랐다. 그때는 루한의 변경백이 아닌 제국과 맞닿은 숲 남쪽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온 건가?’
솔라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요정 숲과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우와……! 여기가 요정의 숲?!”
루나는 곧 요정의 숲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흥분한 표정이었다.
그때 잃어버렸던 동생, 원작에서는 끝끝내 이어지지 못했던 동생이 눈앞에 있다.
솔라시우스의 애틋한 감정이 태광휘의 가슴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깊어진 눈으로 동생과 요정 숲을 보고 있는데,
“제가, 제가 할게요!”
문득 옆에서 조그마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쥴리아가 재빠르게 노숙을 돕고 있었다.
아직 어린 몸이지만 아이는 눈치가 빨랐고 손재주도 야무진 편이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빠릿빠릿하게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로안, 쥴리아에게 나를 좀 닦아 달라고 해 다오.]
언제 깨어났는지 쥴리아를 보던 루시가 솔라에게 부탁했다.
“쥴리아, 그건 로뮤와 리나에게 맡기고 여기로 오렴. 루시가 너랑 놀고 싶다고 하는구나.”
그는 그녀의 부탁대로 쥴리아를 불렀다.
“네!”
솔라가 자신을 부르자 쥴리아가 하던 일을 멈추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키으으응?
거대한 덩치의 시즈가 자신의 주인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어린 소녀를 반겼다.
마찬가지로 시즈 옆에 있던 검은색 말 맨카도 쥴리아를 반겼다.
“시즈, 맨카! 히히!”
아이는 솔라에게 달려오다가 잠시 멈춰 시즈와 맨카의 목을 쓰다듬었다.
하나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모습이 또래 아이스러워 오히려 보기 좋다.
[정령사의 자질이 확실한가 보구나. 영물들과 친한 것이.]
그런 쥴리아를 보던 루시는 알 수 없는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루시!”
시즈와 맨카를 한 번씩 쓰다듬은 쥴리아는 곧바로 솔라의 허리춤 앞에 섰다.
[흠흠!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 쥴리아.]
쥴리아가 자신을 루시라고 부르자 그녀는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루시의 말에 쥴리아는 슬쩍 솔라를 보았고, 솔라는 아이의 금색 눈동자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
허락이 떨어지자 쥴리아는 바로 푸른색 마검을 향해 엄마라고 불렀다.
[그래! 엄마다!]
“엄마, 내가 깨끗이 닦아 줄게요!”
솔라는 돗자리를 깔고 바닥에 앉았고, 쥴리아는 그런 솔라 옆에 쪼그려서 루시를 닦았다. 그녀를 닦는 천은 일반적인 천과 다르게 아주 고급스러운 손수건이었다. 동방에서 들여온 비단손수건이다.
“엄마, 옛날이야기 마저 해 주세요.”
쥴리아는 이미 광택이 나는 루시의 검 자루를 더욱 박박 닦으면서 이야기를 졸랐다.
아이는 유독 이 말하는 마검을 좋아했다. 깨끗이 닦아 주면 답례로 옛날이야기를 해 줬기 때문이다.
솔라와 루나 그리고 로뮤가 주는 군것질도 좋았지만, 아직 어린 쥴리아에겐 루시가 얘기해 주는 옛날얘기가 더 반가웠다.
[그래야지. 저번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질풍의 기사 제프가 공주님과 만나는 거까지요!”
쥴리아의 호응에 루시는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책의 내용을 말했다.
[그래, 거기까지였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면…… 둘은 서로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단다. 제일 먼저 기사 제프가 용을 죽이고 얻은 반지를…….]
베네사에게서 받은 이야기책이었다. 귀족가의 어린 자녀를 위한 이야기책이었는데, 눈을 감고 윈테이라와 동기화해야 하는 루시는 쥴리아를 위해 이야기책의 내용을 달달 외웠다.
“아주 잘들 노네?”
노숙 준비를 마친 루나가 그런 쥴리아와 루시를 보며 말했다.
비꼬는 의미는 아니었다.
솔라의 옆에 앉아 저 푸른색 마검이 해 주는 얘기를 듣는 조카(?)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평화로운 기분을 주었으니까.
“질풍의 기사 제프 일대기, 나도 스승님이 잘 때 읽어 줬었는데…….”
그저 이 세상에 없는 스승 이자벨이 떠올라 아련한 감정이 들었을 뿐이다.
야영지에 작은 모닥불을 하나 피우고 일행은 둘러앉아 불멍을 때렸다.
귀로는 이야기책을 암송 중인 루시의 목소리와 정신없이 이를 듣고 있는 쥴리아의 감탄사가 들렸다.
“요정 숲에서 답장, 얼마나 걸리지?”
그러다 불쑥 솔라가 로뮤에게 물었다.
“리리아에게 보냈으니 다음 날 올 거야.”
“그렇군.”
우리 때는 일주일이나 걸렸는데……. 태광휘가 아닌 솔라시우스의 안타까운 감정이 살짝 일었다.
당시 엘프들이 조금만 빨리 반응해 줬으면 루나를 잃어버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적막이 흘렀다.
루나는 쥴리아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모닥불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일 것이다.
“그거 아나? 내가 요정 숲까지 안내를 맡게 된 이유.”
적막 속에서 로뮤가 솔라와 루나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하네? 로뮤 오라버니가 왜 직접 안내하는 거야? 하이엘프면 지휘관일 텐데?”
로뮤의 질문에 불멍을 때리던 루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
솔라는 답을 아는 듯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근위대의 엘프들은 나를 진심으로 존중하진 않거든. 나는…… 요정 숲에서도 별종이었지. 어떻게 보면 단명종의 시간에 오염된 놈으로 보였을 거야.”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를 입에 담는 로뮤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래서 내가 자연스레 너희의 안내를 맡게 되었어. 내가 가고서 요새에 남은 엘프들은 속이 시원했을 거야. 그나마 인간들에게 협조적이었던 태도도 지금쯤이면 완전히 지워졌을 테고.”
“그런…….”
로뮤의 말을 들은 루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을까?’
한편으론 볼카 요새에서 보았던 로뮤를 떠올렸다. 엘프들 사이에서 유독 겉도는 느낌이었지.
‘그랬기에 나와 친해진 것일지도 몰라.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워…….’
첫 만남부터 유독 자신에게 친절했던 로뮤의 태도도 다시 한번 이해가 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기 무섭게 요정 숲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답신이 왔다.
일행은 로뮤를 선두로 하여 요정 숲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요정 숲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그 분위기가 이번 솔라 일행의 방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이엘프 로뮤가 또 단명종을 데려왔어!”
“그것도 둘이나 더!”
“저게 로안 샬루트라고? 잠깐 못 본 사이에 엄청 달라졌어.”
요정어가 노래처럼 숲 바람을 타고 불었다.
“저건 드레이크인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멸종된 줄 알았거늘.”
호기심과 경계가 섞인 시선과 대화가 입장하는 솔라 일행을 휩쓸었다.
“그나저나 새로 들어온 두 어린 단명종이 문제야. 또 단명종 때문에 원로원 장로들과 여왕께서 또 싸우시겠군.”
“한 명에게선 불의 정령 냄새가 나고…… 다른 하나는, 으음, 좀 위험한 거 아냐?”
하지만 대다수의 엘프들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감을 보인다.
“쯧! 하이엘프 로뮤는 이제 완전히 단명종의 시간에 물든 모양이야.”
“애초에 흑발과 붉은 눈동자부터가 장수종과 어울리지 않는 영혼임을 증명했지.”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제국으로 파견 보낸 것이고.”
“제국으로 못 가다가 모처럼 인간세계에 갔다 오니까 얼굴이 피었군.”
“하이엘프 로뮤의 시간은 단명종의 시간과 너무 깊게 얽혔어. 저런 자가 요정 숲에 있으면 좋지 않은데…….”
“저쯤 되면 근위대장직을 박탈하고 추방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귀는 안 자르더라도 말이야.”
“여왕과 원로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숲의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엘프들이 너도나도 웅성거렸다.
그들의 요정어는 호기심이 2할, 경계심이 3할, 무엇보다 로뮤를 헐뜯는 말이 5할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요정어로 대화를 나눴기에 루나와 쥴리아는 듣지 못했다.
“…….”
로뮤는 익숙하다는 듯 이를 한 귀로 듣고 흘러넘겼다.
“…….”
솔라 또한 원작 게임과 솔라시우스의 기억으로 로뮤의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불쾌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저 엘프 중 상당수는 훗날 제국과의 전쟁에서 죽을 것이다. 신경 쓸 가치도 없다.
[…….]
마검 루시는 깨어 있음에도 큰 반응은 없었다.
‘이제부터 긴장해야 해! 리리아 그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세계수가 회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세계수의 대리자인 그녀도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래서 왕도부터 들리자고 했던 것인데…….
윈테이라와 동기화 중인 루시는 속으로 잔뜩 긴장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연적과의 간접적인 만남. 그녀는 괜히 손에 땀이 났다. 머릿속으론 다양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바빴다.
“……딱 봐도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네?”
루나는 예상보다 더 각박한 엘프들의 인심에 괜히 위축되었다.
요정어를 잘 몰라도 저들의 눈빛과 기세에 대강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얼핏 해석하니까 로뮤 오라버니도 요정 숲에선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루나는 요정어를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아직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들리는 단어로 대화의 맥락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 세계수 가호 안에선 사령술과 음영술을 쓰기 힘들 거 같아.’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를 압박해 오는 무형의 기운도 한몫했다.
‘그나저나 로뮤 오라버니…… 전에는 제국 황족과 교류하는 서약 엘프였나 보네?’
한편으론 어쩌다 듣게 된 로뮤의 또 다른 과거에 관심이 쏠렸다.
서약 엘프라고 해서 과거 제국이 타락하기 전에 황족과 제한적으로 교류했던 엘프들을 말한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존재다.
‘쥴리아는 괜찮을까?’
요정어를 모른다고 해도 나무 위에서 쏘아지는 살기는 어린아이에게 좋지 못하다.
루나는 문득 걱정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쥴리아는 시즈의 등에 솔라와 함께 올라타 있었는데, 솔라가 맡긴 견갑을 닦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이는 엘프들이 내보이는 살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솔라의 견갑을 소중히 꼭 끌어안고 수건으로 깨끗이 닦는 것에 열중할 뿐이다.
‘오라버니가 보호 중이었구나.’
자세히 보니 솔라가 새벽의 등불을 은은하게 펼쳐 요정들의 살기로부터 쥴리아를 보호 중이었다.
루나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어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제일 선두에 있는 로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검은색 말 맨카를 타고 숲길을 걸었는데, 고대하던 고향에 온 사람치곤 딱히 밝아 보이진 않았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로뮤 오라버니와 나는 닮았구나.’
그의 뒷모습을 본 루나는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볼카 요새에서부터 로뮤에게 느꼈던 동류의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불현듯 로뮤와 친해지게 되었던 계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