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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69화 (69/212)

제69화

#69.

시간을 잠시 뒤로 돌려서, 볼카 요새에 솔라와 루나가 머물렀을 때로 가 보자.

때는 제국군과 결전을 치르기 훨씬 전, 엘프 근위대가 막 볼카에 도착하고 하이엘프 로뮤가 회의장에서 여왕이 솔라에게 작성한 편지를 요정어로 낭송한 직후의 늦은 밤.

루나시르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으음, 뭐지……? 그 엘프는?”

처음 로뮤와 만난 그날 밤부터 루나시르네는 이상하게 로뮤를 의식하게 되었다.

-장의사에 가까운 냄새야. 아늑하고 따듯하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서러운 삶을 살았을 것 같구나.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너의 오라비 로안과 함께 너를 진심으로 대하겠다.

그날 밤, 루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괜히 기분이 뒤숭숭했는데, 새벽까지 로뮤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되새김하기 바빴다.

사령술을 익힌 자신을 진심으로 봐준 사람은 솔라와 스승님 이후로 그 하이엘프가 처음이다.

‘엘프들은 다 그런가?’

인간이지만 인간 사회에서 배척받았던 그녀다.

‘어쩌면…… 나는 엘프들과 어울리는 것일지도?’

괜히 가슴이 설렜다.

우우우웅!

그녀의 설렌 감정을 읽은 것인지 가슴에 있던 로사리오가 진동하며 울기 시작한다.

“이게 요즘 잠잠하더니!”

루나는 옷 속에서 로사리오를 꺼냈다. 그림자 핵이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힘이 봉인된 목걸이다. 솔라 오라버니의 말에 따르면 보주로도 쓸 수 있다고 했지.

하지만 아직까지 이 힘을 제대로 써 본 적은 없다.

‘우리 오라버니가 보통 강해야지.’

그림자 핵은커녕 사령술도 제대로 써 본 적 없다.

‘오라버니도 내가 이 힘을 쓰는 걸 원하지 않는 거 같고.’

솔라는 평소에 루나가 사령술을 쓰는 것을 만류했다. 그림자 핵을 쓰지 말라는 말은 없었지만 사령술이나 음영술이나 둘 다 거기서 거기니까.

“가만히 있어!”

꽈아악!

루나는 계속해서 진동하는 로사리오를 악력기처럼 꽈악! 하고 움켜잡았다.

“스승님의 원수!”

로사리오를 보는 루나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다.

어떻게 보면 이건 스승님의 원수기도 했다.

물론 제일 큰 원흉은 스승 이자벨에게 그림자 핵을 건넨 재상이다.

루나는 언젠간 기필코 재상 아리아 데스모를 죽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녀의 오라버니 솔라시우스 또한 찬성한 사안이다.

“이걸 버릴 수도 없고…….”

아공간 인벤토리에 처넣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림자 핵을 살아 있는 생명으로 인식한 모양인지 도저히 들어가지지가 않았다.

“무작정 안 쓰기엔 또 아깝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깝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그녀의 손에 있는 그림자 핵은 정말이지 매력적인 힘이었으니까. 특히 사령술을 익힌 루나에겐 궁합이 잘 맞았다.

‘나는 사령술사 이전에 황족이었어. 황족은 대대로 빛과 열 속성을 지녔고.’

사령술을 익힐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황족의 피가 그림자 핵 앞에서는 타락을 막아 주는 안전장치가 되었다.

우우웅.

한 시간 정도 악력을 주기적으로 주니까 그림자 핵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싱숭생숭한 기분에 달밤에 악력 운동까지 하니까 잠은 더더욱 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루나는 날이 밝자마자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엘프들의 병영으로 향했다. 뜬눈으로 밤을 샜지만 설렘에 피곤하지 않았다.

엘프들은 전부 로뮤라는 엘프처럼 친절할까? 사령술을 익힌 자신을 평등하게 반겨 줄까?

빠른 걸음이 그녀의 기대감을 표현해 줬다.

엘프들이 머물기로 한 병영 근처에는 병사들은 물론, 전쟁 상인과 기사 그리고 마법사, 마녀까지 요새의 온갖 군상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엘프들은 폐쇄적이라고 하더니, 사실이었어.”

“아주 문전박대를 당했지 뭐야?”

“엄청 아름다운 외모면 뭐 해?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데!”

“정말이지 무례하더군! 후작 각하의 명령만 없었다면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오!”

“그 로뮤라는 흑발의 하이엘프가 유별난 거였어.”

곳곳에서 엘프들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루나는 빠르게 걷던 발을 천천히 했다.

‘괜히 갔다가 나도 저들처럼 까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다를지 몰라!’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제 로뮤라는 엘프가 자신에게 보였던 호의를 믿었다.

마침내 루나는 엘프들이 머무는 병영으로 용기 내어 도착했다.

입구에는 중무장한 엘븐나이트 넷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엘프들은 대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했는데 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 하는 인간이지?”

“썩 꺼져라! 우린 단명종과 섞여선 안 된다.”

그들은 루나가 도착하자 귀찮다는 표정으로 진입을 막았다.

“정지! 더 이상 가까이 오면 공격하겠다.”

엘프들은 언제 익혔는지 모를 대륙 공용어로 차갑게 말했다.

‘괜찮아! 이건 예상했어!’

역시나 폐쇄성이 짙은 엘프답게 처음부터 좋은 소리가 나진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저들은 영혼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까.

“어…… 음……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나는…….”

루나는 웃으면서 엘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이 냄새…… 사령술사의 냄새군!”

그러자, 한 엘븐나이트가 코를 흡흡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예! 저는 사실 사령술을 익혔어요.”

이에, 루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에서 죽음의 악취가 진동한다!”

“사람보단 사신이 어울리는 인간아!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는 엘프다.”

“시체 냄새를 풍기는 너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선 안 된다!”

“썩 꺼져라!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악취가 난다는 듯 손으로 코를 막으며 루나를 대했다.

“…….”

루나의 기대감은 단번에 박살났다.

‘그럼 그렇지. 엘프도 똑같았던 거야. 그 로뮤라는 하이엘프는 내가 솔라 오라버니 동생이라서 친절하게 대해 준 거였어.’

“알았어요! 가면 될 거 아냐?!”

루나는 급격한 실망감을 느끼며 홱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아까부터 아주 가관이더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그리고. 막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 엘프 병영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명종과 어깨동무하고 술이나 마실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아! 하지만 도와주러 와서 욕을 먹는 건 피해야 될 것 아닌가?”

바로 어제 요정어로 편지를 낭송하던 이의 목소리.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인간들과 가급적 협조하라고.”

로뮤라는 이름의 하이엘프는 엄한 표정으로 입구를 지키던 엘븐나이트들에게 요정어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근위대장이자 하이엘프다.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

“크음…….”

로뮤의 차가운 물음에 엘프들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딱 봐도 진심으로 반성한 태도는 아니었다.

“너희의 태도로 인해 방침을 추가하겠다. 보급도 인간들의 것 중 일부를 쓰겠다.”

“……!”

루나는 멍하니 갑자기 나타난 로뮤를 보았다. 요정어로 말하는 거라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조만 들어도 무슨 의미를 담아 말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았다.

눈앞에서 자신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 엘프들을 혼내는 것이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다.

‘저 흑발의 하이엘프만 다른 건가? 어째서?’

한편으론 일반적인 엘프와 전혀 다른 로뮤에게 의구심과 호기심이 갔다.

“그리고! 너희가 방금 적대했던 저 마녀는 로안 샬루트의 동생이기도 하다. 적통 황족이란 말이지. 방금 너희의 행동은 ‘아낙시아의 서약’을 훼손하는 행동이었어.”

그러다가 이어진 로뮤의 엄포.

“!!”

그제야 엘프들이 기겁한 눈으로 루나를 보았다.

루나가 뭘 보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그들은 시선을 급히 돌리곤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숙였다. 반성보단 후회에 가까운 기색이다.

“이 영혼도 제대로 못 보는 반푼이들 같으니! 이것들을 근위대라고 데려온 내가 바보지.”

로뮤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찰 뿐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 만약 앞으로 똑같은 행위가 발각된다면 처벌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루나는 요정어를 몰랐기에 로뮤가 엘프들에게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요정어 좀 배워 둬야겠어.’

그대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로뮤의 엄포가 요정들에게 통했다는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적대적이었던 그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어느덧 로뮤의 훈계가 끝났다.

“……알겠습니다.”

“받들겠습니다.”

병영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엘프들은 처음과 달리 많이 수그러든 태도로 루나를 보았다. 분명 수그러들었지만 눈빛에선 여전히 찝찝함이 가득했다.

루나는 그런 시선이 익숙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저 씁쓸했을 뿐이다. 엘프나 인간이나 다 똑같구나 싶었다. 오히려 마나의 냄새를 잘 맡는 엘프가 오히려 루나에게 더 적대적이었다.

“무례를 용서하렴, 리나 샬루트. 요정을 대표하여 내가 사과하마.”

엘프 중 유일하게 로뮤만이 루나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낼 뿐이다.

“아니에요, 하이엘프 로뮤 엘펜리트. 당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니지.”

“……예?”

“하이엘프 로뮤 엘펜리트라니. 그건 너무 정 없어. 로뮤 오라버니라고 부르렴.”

“……그, 로뮤 오라버니?”

“그래! 오빠라고도 한번 해 보겠니?”

“……?!”

오히려 어지간한 인간보다 더 적극적인 로뮤의 태도에 루나는 황당함마저 느껴야 했다.

좋지 못했던 두 번째 만남에도 불구하고, 루나시르네와 로뮤는 빠르게 친해졌다.

보통은 적극적이고 활달한 루나가 먼저 다가가는데, 이번만큼은 정반대로 위축된 루나를 로뮤가 달래듯이 다가가 친해졌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루나가 로뮤라는 하이엘프에게서 묘한 친근함을 느낀 것이.

“요정들에게 실망했니?”

“네…… 솔직히 말해서.”

엘프들이 있는 병영에서 좀 떨어진 곳.

로뮤는 루나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런 대우 익숙하니까.”

“……너와 나는 어쩌면 비슷할지도 몰라.”

“……네?”

“아니다. 말이 헛나왔다. 아직 대륙 공용어가 익숙지 않거든. 그리고 편하게 말을 놔도 돼. 로안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야.”

“응…… 로뮤 오라버니.”

“로뮤 오빠라고 불러 주면 더 좋을 텐데…….”

“솔라, 아니, 로안 오라버니한테도 어지간해선 오빠라고 잘 안 부른다고.”

“그래? 그럼 일단 이거로 만족해야지!”

루나가 자신을 편하게 부르자 로뮤는 진심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줘서 고마워, 리나.”

비단결 같은 긴 흑발에 루비를 박은 것 같은 보석 같은 눈동자.

루나는 솔라 오라버니와 맞먹는. 어쩌면 살짝 위일 수도 있는 하이엘프의 미모에 잠깐이지만 넋을 놓았다.

“고맙긴, 뭘…….”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화들짝 시선을 돌렸다.

괜히 가슴이 뛰었고 얼굴과 귀가 뜨겁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 붉어졌을 것이다.

‘그냥 잘생겨서 그래. 거기다 모처럼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서 기쁜 것뿐이야!’

루나는 애써 마음의 벽을 쳤다.

단명종과 장수종의 깊은 관계는 비극뿐이기에 당연한 수순이다.

척, 척, 척, 척.

그때, 10인대로 보이는 엘프 근위대가 발맞춰 요새를 순찰한다.

엘븐나이트는 보이지 않았고 무장이 비교적 가벼운 엘븐레인저들이다.

“이제야 바깥에 좀 싸돌아다니는군.”

로뮤는 그런 근위대를 보며 조소했다.

“단명종과 섞이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다니. 쯧.”

그는 자신의 동족들이 많이 답답했는지 혀를 작게 찼다.

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엘프들이 자신의 옆을 막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움츠리더니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리나.”

그런 루나를 본 로뮤는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내 동생이라면 앞으로 절대! 저런 시선에 움츠러들지 마. 그럴수록 더욱 당당하고 씩씩해져야 해.”

턱.

로뮤는 루나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은은한 하이엘프의 풀 내음이 어린 마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마찬가지로 루나의 냄새가 로뮤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꿀꺽.

이를 본 루나시르네는 긴장했다.

엘프들은 루나의 영혼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며 인상을 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하이엘프만큼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아.’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우웅.

하지만 그때, 루나의 목에 걸려 있던 로사리오가 갑작스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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