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70.
마녀복에 가린 로사리오가 크게 움직이며 그녀의 상의까지 떨게 만들었다. 루나는 괜히 심장이 철렁거렸다.
아무리 로뮤라도 이 그림자 핵은 다르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구기며 자신을 멀리할지도 모른다.
괜한 걱정에 루나시르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
로뮤는 울고 있는 루나와 가슴팍의 로사리오를 보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나는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담담한 눈으로 어느새 옷 밖으로 튀어나온 로사리오를 관찰할 뿐이다.
“아주 거대한 힘이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 거야.”
로뮤의 한 손은 루나의 어깨에 댔고, 다른 한 손은 루나의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네 엄마, 노아…… 텔미노아를 많이 닮았구나.’
눈물을 글썽이는 루나시르네를 멍하니 보던 로뮤는 자신의 옛 제자를 떠올렸다.
솔라시우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 아닌 비밀이기도 하다.
그는 찰나의 회상을 급히 접고는 자신의 붉은 눈동자에 소녀의 흑안을 품었다.
“나는 네가 그 힘을 올바른 곳에 썼으면 좋겠어. 단지 그것만 바랄 뿐이야.”
그는 여전히 밝게 웃으면서 루나를 대했다.
“안 무서워? 아니, 싫지 않아? 이거…… 되게 무서운 힘이야.”
로뮤의 태도에 루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목에 건 힘은 불이랑 다를 게 없어.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달라지지. 나는 오히려 내 동생이 이 힘을 가지게 돼서 든든하다고 생각해.”
“……??”
“나중에 나와 로안이 위기에 처하면 그 힘으로 우릴 구해 줄 테니까.”
이 이상한 하이엘프는 루나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만 할 뿐이다.
“그 힘,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써 봤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쓴 적 없어…….”
“그래?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그 힘을 사용하는 연습을 해 보자.”
“하지만 위험한데…….”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이래 봬도 정령술과 마법도 익힌 몸이야. 가르치는 데 소질도 있다고 생각하고. 로안도 내가 가르쳤었지. 그리고…….”
너의 어머니도. 로뮤는 마지막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니다. 여하튼, 나와 함께 하자. 그 힘은 이대로 썩히기 너무 아까워. 말에서 떨어질 게 무서워서 말을 타지 않는 꼴이야.”
“……!!”
루나는 로뮤의 그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의 말은 처음 듣는 조언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오빠 솔라시우스는 어떻게든 루나의 힘을 숨기려 들었다. 하지만 새로 생긴 큰오빠(?)는 반대였다.
두근, 두근, 두근.
어린 소녀의 가슴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고, 괜히 볼과 귀가 뜨거워졌다.
“응, 해 볼게! 로뮤 오라버니!”
루나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밝게 웃었다.
그날 이후 로뮤와 루나는 몰래몰래 만나서 그림자 핵과 사령술 연습을 했다.
결전 당시 루나가 쉽게 그림자 핵을 다룰 수 있던 것도 로뮤 덕분이었다.
몇 주 전의 회상을 마친 루나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큰 오라버니 로뮤의 뒷모습을 보았다.
로뮤는 요정 숲의 숲길을 말을 타고 걷고 있었다.
그때에는 그토록 넓고 든든해 보이던 그의 등이 지금은 어째 쓸쓸해 보였다.
* * *
무수한 경계 어린 시선이 있었지만, 솔라 일행은 마치 하이패스를 끊은 것처럼 곧바로 요정 숲 중심부로 향할 수 있었다.
아마도 세계수와 그 세계수의 무녀이기도 한 엘프 여왕 리리아의 독촉 덕분이겠지.
“여기가 요정들의 도시 엘펜!”
기껍지 못한 환대를 받았음에도 루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정도로 요정들의 수목 도시는 우아하고 웅장했다.
인간에게 마법과 문명을 전해 준 고대 종족답게 거주하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고귀해 보였다.
고목과 돌로 지은 건물이 빼곡했고, 각 집의 담장과 마당, 지붕에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과 풀, 묘목 등이 장식되었다. 이 정도면 벌레나 곤충이 꼬일 법도 한데 마법을 쓴 것인지 벌레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집 하나하나가 예술품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웠고 역사이자 박물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들의 집과 건물은 각각 작은 숲이며 정원이며 세계였다.
요정들의 도시는 작은 세계가 조화롭게 모인 숲속의 작은 우주 같았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숲의 정취와 아찔할 정도로 어우러졌다.
드워프의 지하 도시도 인간의 지상 도시도 눈앞의 수목 도시와 비교하면 평범할 것이다.
“근위대장 로뮤.”
일행이 도시 중심부 인근에 도착하자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엘프가 로뮤 앞에 섰다.
“장로 아이지, 회의는 끝났소?”
“아직이오. 단명종 국가와 동맹을 맺는 것은 신중해야 하니까.”
“그러시겠지.”
엘프의 시간선에서 로뮤의 볼카행은 잠깐의 외출 정도에 불과하다. 로뮤도 장로도, 딱히 오랜만에 본 티를 내지 않았다.
“볼카에서 제법 많은 형제가 겨울을 맞이했더군.”
대신 장로 아이지는 다른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소. 참으로 안타까운 희생이지.”
로뮤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카 요새에서 전사한 엘프 근위대를 생각한 모양.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귀중한 전력이 줄어든 것은 뼈아프다.
“암흑대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소. 그리고 그 암흑대공을 여기 로안 샬루트가 격퇴했지.”
로뮤는 몸을 살짝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솔라시우스를 가리켰다.
“으음, 로안 샬루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단명종의 성장은 아주 빠르다 들었지만…….”
솔라를 직접 본 장로 아이지는 눈을 크게 떴다.
“영혼이 더 강해졌군. 너무 강해져서 바뀐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진화했다고 표현해야 하나?”
영혼의 냄새를 맡을 줄 아는 엘프답게 솔라의 상태를 대략이나마 추정한 모양.
“그리고 바로 옆에는…… 으음, 죽음의 냄새가 나는군. 더불어 심연의 냄새도 나고…….”
이어서 장로는 솔라 옆에 있던 루나를 살폈다.
장로의 말에 루나는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어깨와 가슴을 당당히 폈다.
“위험한 거 아닌가?”
장로 아이지는 로뮤를 노려보았다.
“왜 이 아이에게서 그런 냄새만 맡으려 하는 거지? 리나의 본질은 빛이다.”
로뮤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리나 샬루트를 보증할 것이다. 그녀가 사고를 치면 내가 책임지지.”
“그 여자를 들여보낼 때처럼 말인가?”
장로는 묘한 표정으로 로뮤에게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닮았군.”
아이지의 눈이 잠시 루나를 훑었다.
“…….”
로뮤는 무표정한 얼굴로 늙은 엘프를 볼 뿐이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상관없겠지. 애초에 세계수 가호 중심부에서 그 힘을 제대로 쓰기도 힘들 테니. 어서들 들어가시오. 여왕께서 기다리시니.”
장로 아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을 마저 터 줬다.
요정 숲의 가장 중심부, 가장 깊은 수풀.
여왕이 기거하는 궁이자, 세계수가 있는 장소다.
“저 안에 세계수가 있어.”
“어디? 저 호수 속에?!”
솔라의 말에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는 오직 에메랄드빛 호수밖에 없었으니까.
“결계야. 하지만 실제 호수인 것도 맞지.”
이번엔 로뮤가 말했다.
“내가 상상한 세계수와는 많이 다를 거 같네?”
“리나가 상상한 세계수는 어떤데?”
로뮤가 루나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아~주 커다란 나무? 아니면 이 요정 숲 전체가 세계수라거나?”
“하하하하, 숲 전체가 세계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신선한데?”
루나의 말에 로뮤가 모처럼 웃었다. 요정 숲에 와서 처음 보이는 밝은 미소에 루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세계수는 생각보다 크지 않아. 오히려 작지.”
옆에 있던 솔라도 작게 웃으면서 루나에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세계수를 본 적 있어?”
“그래.”
솔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원작 게임 플레이에서도 보았고, 어릴 적 솔라시우스가 처음 요정 숲에 왔을 때도 한 번 봤었다.
“어땠어?”
“글쎄, 말로 설명하기엔 애매해. 어차피 곧 보게 될 거니까 조금만 참아.”
“빨리 보고 싶다! 세계수와 여왕님을 뵙고서 어머니 묘에 가는 거지?”
“맞아.”
루나의 말에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므으으!!”
루나시르네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다가 시즈 위에 앉아,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쥴리아를 끌어안았다.
“쥴리아~!”
쥴리아는 뭣도 모르고 루나의 품에 안겼는데 딱히 싫지 않은 모양인지 해맑게 웃었다.
“응! 리나 언니!”
쥴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루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둘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자매처럼 어울렸다.
“너도 기대되지 않니? 세계수도 그렇고 요정 숲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응!”
쥴리아 또한 당장 요정 숲 자체는 마음에 든 모양.
워낙 로뮤와 루나가 어그로를 끌어 줘서 쥴리아의 존재감은 일행 중 제일 없기도 했다.
엘프들의 경계 담긴 시선이 있지만 정령사인 쥴리아에겐 상대적으로 덜했다.
‘놀이공원에 온 자매 같군.’
솔라와 로뮤는 다소 부드러운 눈으로 루나와 쥴리아를 보았다.
세계수와 여왕 리리아가 있는 알현실로 가는 방법은 특이했다.
작은 나룻배를 타고 에메랄드빛 호수 정중앙까지 노를 저은 뒤 다이빙하듯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여기서 시즈와 맨카를 돌보고 있을게.”
호수로 향하는 배는 솔라와 쥴리아 그리고 루나만 타기로 했다.
로뮤는 시즈와 맨카를 뭍에서 돌보기로 했다. 애초에 드레이크인 시즈와 말 중에서 덩치가 큰 편인 맨카는 이 작은 나룻배에 탈 수 없었다.
“잘 갔다 와.”
“리리아에게 안부라도 전해 줄까?”
“굳이? 얼마 전에도 리리아와 만났었어.”
“장수종의 시간선을 잠시 잊었군.”
“로뮤 오라버니! 다녀올게!”
“다녀올게요.”
로뮤의 배웅을 받으며 셋은 나룻배에 올랐고 호수의 정중앙까지 이동했다. 노를 저을 필요는 없었다. 로뮤가 바람의 정령으로 배를 움직여 줬기 때문이다.
[…….]
리리아와의 만남이 가까워질수록 루시는 말이 없었다.
동기화 중인 루시푸르네의 몸은 잔뜩 굳어 있었다. 괜히 입술이 마르고 조마조마해졌다. 마치 중요한 시험을 보는 날의 아침 같았다.
“겁먹지 말고 따라 하면 돼. 결계라서 옷은 젖지 않아. 숨도 쉴 수 있고.”
호수 중심부에 도착하자 솔라가 제일 먼저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응! 알았어!”
“네!”
루나와 쥴리아가 잔뜩 긴장한 눈을 했다.
쑤욱.
이윽고 솔라가 나룻배에서 먼저 뛰어내렸다.
풍덩 하는 소리가 아닌 쑤욱 하고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간접적인 기억으로만 알고 있던 일을 실제로 직접 겪은 솔라는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익히 알고 있어서 익숙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아니었다.
나선형 튜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좀 드나 싶더니, 얼마 후 작은 정원이 펼쳐졌다.
이걸 정원으로 봐야 할지 숲으로 봐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에메랄드가 아닌 사파이어 빛 연못이 중앙에 있었고 그 연못 가운데에는 황금빛을 은은히 발하는 나무가 보였다.
바로 세계수다.
작은 나무라고 하지만 세계수치곤 작은 것이지, 크기와 둘레는 어지간한 고목의 크기다. 둘레부터 높이까지 작은 아파트 정도 되는 황금 나무가 연못 중앙에 있었다.
‘애들은?’
실물로는 처음 보게 된 세계수를 잠시 멍하니 보던 솔라는 루나와 쥴리아가 생각나 뒤를 보았다.
둘은 그가 이곳에 온 지 수 분 정도 지났음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괜히 걱정이 들려고 할 때였다.
“너와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어서 말이야. 둘은 좀 있다 도착하도록 수를 써 놨어.”
세계수의 뒤쪽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어는 요정어가 아닌 대륙 공용어.
“오랜만이야, 로안 샬루트.”
은빛이 감도는 백금발에 에메랄드를 박은 것 같은 녹염의 눈동자, 피부에서는 윤기가 은은한 달빛처럼 흘렀다.
복장은 세계수의 무녀이자 엘프 여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활동하기 편한 여성용 튜닉을 입고 있었는데 치마와 소매 곳곳에 흙이 묻어 있었다.
손에는 호미와 조그마한 삽이 들려 있었고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비스듬히 썼다.
농사보단 취미로 정원을 가꾸는 귀족 부인 같았다.
“세계수의 대리자를 뵙습니다.”
솔라는 원작과 옛 기억을 참고해 리리아를 대했다. 허리와 고개를 적당히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런데 오랜만이라고?’
그러다 문득 의아함을 삼켰다.
솔라는 무심한 눈으로 리리아를 보았다. 솔라가 요정의 숲을 떠난 것은 인간 기준으론 좀 길었을지 몰라도 엘프에겐 아니었다.
“응. 정말 오랜만이야, 로안 샬루트.”
여왕 리리아는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