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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74화 (74/212)

제74화

#74.

잠깐이나마 들떴던 루시는 다시 한번 크게 실망해야 했다.

“설원의 저주가 좀 나아지는가 싶었더니…….”

고작 며칠이었지만 정말 기뻤는데……. 루시는 알현실의 의자에 앉아 우울해 했다.

고작 며칠에 불과했지만 세계수 묘목 덕분인지 설원의 저주는 확실히 약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 주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날이 갈수록 길어졌고. 접근할 수 있는 거리도 조금씩이지만 가까워졌다.

매일 아침마다 침실 앞에 있는 세계수 묘목을 관찰하고 말을 걸며 놀았던 것이 루시였다.

하지만 그랬던 즐거움과 희망이 하루아침에 소실됐다.

오늘 아침, 시들어 죽어 버린 어린 세계수가 루시푸르네를 반겼기 때문이다.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가 알현을 청했습니다.”

멍한 기분으로 알현실 의자에 홀로 앉아 있던 루시의 귀로 베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장의 목소리 또한 주군의 심정처럼 잠겨 있었다.

“오늘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루시는 퉁명스레 알현실 문 너머로 말했다.

하지만.

“폐하, 기사 로안 샬루트 들어가겠습니다.”

그녀의 외침에도 알현실 문밖의 남자는 돌아가지 않았다.

“안 됩니다! 로안 경!”

저 멀리서 이를 저지하려는 베네사의 외침이 들렸지만.

덜컥.

이윽고 알현실 문이 열리고 금발 금안의 망명 황족이 입장했다.

“무엄하다!”

가뜩이나 우울했던 루시는 그런 망명 황족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능력을 인정해 오냐 오냐 해 줬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루시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우웅.

그녀는 마나를 운용하여 자신 앞에 방어 결계를 펼쳤다.

혹시 모를 원거리 암살을 대비한 것이다.

루시는 여왕 이전에 설원의 대마녀다. 어지간한 원거리 공격은 마법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근접 공격은 설원의 저주로 막을 필요도 못 느꼈고.

“…….”

루시의 태도가 어떻든 말든,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는 성큼성큼 걸었고.

둘의 거리는 10미터를 넘어 7미터까지 가까워졌다.

“?!”

하지만 눈앞의 망명 황족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머, 멈춰! 세계수의 묘목은 이제 여기 없어! 더 가까이 왔다간!”

여왕 루시는 오히려 당황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7미터를 넘어, 6미터, 5미터까지 좁혀 오자.

“!?”

루시푸르네의 얼굴은 당혹을 넘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기까지인가 보군요.”

그는 딱 5미터의 거리에서 발을 멈추곤 루시푸르네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재상보다 가까이, 오래 있게 되었습니다.”

여왕이 자신을 경악 가득한 얼굴로 보든 말든 솔라시우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5미터의 거리, 설원의 저주 역사상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재의 마녀이자 루한의 재상인 아리아 데스모도 7미터가 한계였으니 말이다.

“어, 어떻게?!”

루시푸르네는 이젠 경악을 넘어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눈앞의 방랑기사를 보았다.

“세계수 묘목을 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능력 같습니다.”

여왕의 질문에 답하는 솔라의 얼굴은 어째 쓸쓸해 보였다.

“화염의 가호에다가 세계수에게서 받은 축복까지.”

하지만 당시 루시는 경황이 없어 그의 얼굴에 담긴 쓸쓸함을 읽진 못했다.

“이 둘이 합쳐져 가능한 것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루시푸르네는 자신도 모르게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그날’ 이후 처음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은 적도 ‘그날’ 이후 처음이다.

10미터와 7미터, 그리고 7미터와 5미터.

얼마 안 되는 차이지만 루시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은 것 같은 흥분을 줬다.

“이번 일로 상심하신 것에 유감을 표합니다, 폐하.”

솔라는 진심을 담아 루시를 위로했다. 여왕은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느꼈다.

“아, 아니다! 상심하기는!”

그의 진심이 담긴 위로에 루시는 괜히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가슴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세계수 묘목은 비록 시들었지만 훌륭한 재료가 될 것이다. 재상과 마녀들이 망가진 태양샘 반지와 시든 세계수 묘목으로 마법진을 만드는 중이다. 나도 참여 중이고.”

루시푸르네는 어깨와 가슴을 폈다. 눈은 힐끔힐끔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방금까지 보였던 짜증과 분노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만약을 대비해 캐스팅했던 방어 마법도 거둔 지 오래.

“그…… 그럼 얼마나 이 거리에서 버틸 수 있지?”

루시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적어도 하루에 2시간 이상은 폐하의 친구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친, 친구?!”

예상치 못한 솔라의 답변. 그녀는 2시간이라는 말보다 친구라는 말에 놀랐다.

“그래……. 그대는 몰락했지만 황족이지. 나와 친구가 될 격은 될 터.”

여왕은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털썩.

여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솔라는 알현실 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폐하, 무슨 대화부터 시작할까요?”

“나…… 나는 아무거나 좋다! 상관없다!”

“그렇다면 제가 처음 루한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루한 땅이라고 해도 변경백 외곽은 많이 다르니까요.”

솔라가 바닥에 앉자, 루시 또한 옥좌에 앉았다. 상체를 앞으로 크게 숙이곤 눈앞의 남자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귀로는 그가 말하는 모험담을 열심히 경청했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대체로 공무와 관련된 얘기만 할 뿐이었다. 공무와 관련된 이야기였음에도 루시는 이마저도 즐거웠었다.

하지만 눈앞의 방랑기사는 공무와 전혀 상관없는 사적인 대화를 주로 해 줬다.

책이나 보고서로 들을 수 없는 모험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또래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

루시에겐 매 순간, 매 순간이 새로웠다.

차갑게 닫혔던 여왕의 마음이 서서히 녹아 열리기 시작했다.

알현실의 입구에서 그런 여왕과 방랑 기사를 시녀장 베네사가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시녀장! 무슨 일이오? 급히 불러서 달려왔네만?”

그런 베네사 뒤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쉿!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이마 경.”

시녀장은 급히 왕실기사단장 하이마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그게 무슨……? 어?!”

베네사의 말에 미간을 좁힌 하이마 또한 이어서 알현실 내부를 보았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여왕은 매일매일 솔라시우스와 대화를 나눴다.

하루 2시간, 유일한 친구와 함께 나누는 대화는 당시 그녀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 * *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인사도 없이 가 버리다니! 너무해, 정말!”

루나시르네는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

루나 옆에 있던 쥴리아 또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먼저 입수(?)한 오라버니를 믿고 루나는 쥴리아와 함께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품 안에 쥴리아를 안고서 꽤 길다고 느껴지는 미끄럼틀 속을 나왔다. 시간은 체감상 대략 3분 정도 걸렸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소녀를 반긴 것은 커다란 황금색 나무와 그 앞에 선 엘프 여왕님이었다.

“워낙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둘 다 이해해 주렴. 대신 나랑 로뮤가 곁에 있어 줄게.”

입을 삐쭉 내민 루나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봄 향기처럼 들린다.

“꼭 오라버니 혼자만 보내야 했나요? 여왕님? 저도 같이 갈 수 없었나요?”

리리아가 달래듯 말했음에도 루나는 여전히 구긴 미간을 펴지 못했다.

“너에겐 따로 맡기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래. 로뮤에게만 맡기기엔 위험하고 버거운 임무지만, 루나, 너와 함께라면 안심될 것 같아서 말이지.”

“…….”

리리아의 입에서 로뮤가 언급되자, 그제야 루나의 미간이 펴졌다.

“무슨 일인데요?”

“요정 숲을 지키는 일이란다. 현재 요정 숲의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네, 알긴 하는데…….”

“당연히 공짜로 부탁하는 건 아니야. 일이 다 끝나면, 루나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도록 할게. 물론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말이야.”

“……저는 비싼 몸이에요.”

“노화를 억제하고 수명을 늘려 주는 세계수 열매는 어때? 마하 대제도 딱 하나밖에 먹지 못했던 열매 말이야.”

“?!”

“아니면~ 세계수 잎으로 만든 장신구는 어떨까? 그것도 하이엘프 여왕인 내가 직접 만든 장신구란다? 세계수의 축복까지 내려 줄게.”

“!!”

리리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루나의 얼굴이 점차 펴지기 시작했다.

“요정들만 알고 있는 고대의 마법과 고대의 서적은 어때?”

“…….”

루나는 어느새 구긴 표정을 풀고 몽롱한 눈과 상기된 볼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요정 숲을 지켜야만 세계수가 무사하고, 세계수가 무사해야 솔라 오라버니도 무사하겠죠?”

“당연하지.”

어린 마녀를 설득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었다.

“저, 리나 샬루트! 아니, 제국 1황녀 루나시르네는 요정 숲과 황실의 서약을 충실히 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래?”

너무 쉬워서 리리아는 속으로 당황했을 정도다.

“저도! 저도 열심히 할게요!”

루나 옆에 있던 쥴리아도 외쳤다.

어린 꼬마 숙녀의 얼굴도 잔뜩 상기된 것이 루나와 별다를 게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을 글썽이던 꼬마가 맞나 싶다.

“여왕님, 저도 요정 숲 지키는 거 도우면…… 소원 이뤄 줄 수 있나요?”

쥴리아는 리리아를 조심스레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저 비록 어리지만…… 최근에 많이 연습해서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쥴리아는 자랑하듯 양손에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요정 숲까지 오면서 틈틈이 로뮤가 쥴리아에게 알려 준 정령술이었다.

“쥴리아! 숲에선 함부로 쓰면 안 된다, 그랬지?”

이를 본 루나가 식겁해 쥴리아를 나무랐다.

“괜찮다. 엘펜의 식물들은 불에 대한 내성을 지녔으니까. 그나저나 대단하구나. 로뮤가 알려 줬니?”

나이를 생각하면 아주 대단한 재능이지만 하이엘프 리리아와 그림자 마녀 루나시르네에겐 귀여운 정도.

“네! 로뮤 님도 알려 줬고…… 엄마도 알려 줬어요.”

“……엄마?”

쥴리아의 대답에 리리아가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리리아의 귀에다 입을 대곤 짧게 설명해 줬다.

“그래에~?”

마검 루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리리아는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여 쥴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서 어떤 소원인데?”

과연 이 어린아이의 힘까지 빌릴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리리아는 일단 웃으면서 소원이 뭔지 들어주기로 했다.

“로안 기사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

쥴리아의 소원을 들은 리리아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가 이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쥴리아? 그게 소원이야?”

옆에 있던 루나도 그런 쥴리아를 당혹스레 보았다.

“좋아! 재밌겠구나. 나중에 내가 한번 설득해 보마.”

아이의 뜬금없는 소원. 묘한 미소를 짓던 리리아는 이내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히히!”

리리아가 수락하자, 쥴리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답게 웃으면서 그 자리서 쫑쫑 뛰었다.

“너도 참. 그렇게 좋니?”

루나가 그런 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대강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리리아는 루나에게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일단, 루나의 어머님부터 보자꾸나?”

“……네!”

여왕과 세계수도 보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솔라와 루나의 어머니가 잠든 묘지를 찾는 것이다.

마침내 어머니를 볼 때가 다가오자, 루나 또한 다소 가라앉은 표정을 했다.

“그나저나 로뮤 오라버니는 어디로 간 거야?”

한편으론 막상 호수 밖으로 나왔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로뮤가 걱정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즈와 맨카는 근처 요정 숲 들판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루나와 쥴리아 그리고 리리아는 로뮤의 행방을 궁금해 하면서 요정 숲 외곽의 묘지로 향했다.

작은 숲처럼 조성된 엘프들의 묘지에 도착했다.

“어……? 로뮤 오라버니?!”

그리고 그 안에서 루나는 그토록 찾았던 남자를 발견했다.

바로 흑발 적안의 하이엘프 로뮤 엘펜리트였다.

그는 이 수목장으로 이뤄진 묘지에서 유일한 비석으로 된 묘 앞에 서 있었다.

루나시르네는 본능적으로 저 비석 아래에 어머니가 잠들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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