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75화 (75/212)

제75화

#75.

로뮤의 표정은 너무나 아련하고 깊게 잠겨 있어서 멀리서 로뮤를 알아본 루나와 쥴리아도 함부로 부를 생각을 못 냈다.

“…….”

한편, 루나와 쥴리아를 안내한 리리아는 텔미노아의 무덤 앞에 선 동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엘프 여왕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착잡함이 고였다.

“저…… 여왕님?”

리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질문을 허락했다.

“로뮤 오라버니와 저희 어머니가 아는 사이인가요?”

“로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약 엘프였어.”

“……서약 엘프면?”

“그래, 제국 황실과 교류하던 엘프를 말하는 거야. 너의 어머니 텔미노아는 먼 방계지만 어쨌든 황족이었고,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여인이었지.”

서약 엘프인 로뮤가 그런 텔미노아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솔라 오라버니는?”

“아마 모를 거야. 로뮤는 서약 엘프 때의 일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싫어했거든. 저렇게 무덤 앞에 서는 것도 늘 로안 몰래 했었지.”

“아…….”

로뮤와 어머니가 사제 관계였다니.

루나는 새삼 큰오빠와의 세대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여왕님은 왜 로뮤 오라버니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별개로, 로뮤를 바라보는 리리아의 얼굴에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을 보며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 *

인간의 시간은 정말 빠르다. 무자비할 정도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소녀였던 제자가 순식간에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스승님…… 저 결혼해요.”

“?!”

성숙한 여인이 된 제자에게 익숙해지기도 전에, 로뮤는 제자의 더 큰 변화를 들어야만 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제자 텔미노아는 스승인 로뮤에게 자신이 곧 결혼한다고 얘기했다.

겨울이 막 시작되려던 어느 하루였다.

“……잘됐구나.”

로뮤는 이상하게 찌릿한 심장을 달래면서 말했다. 얼굴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누구지?”

“……황태자 전하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 스승 앞에서 제자 텔미노아는 힘없이 웃었다.

“저와 황태자 전하는 같은 황족이지만, 친척 간의 정략결혼은 귀족들에겐 흔한 일이니까요. 하물며 저는 친척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먼 방계고…….”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내성적이고 말도 제대로 못 했던 아이는 이제 없었다.

눈앞의 여인은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도 마다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니?”

로뮤는 조심히 물었다.

“네, 황태자 전하는…… 착하고 좋으신 분이에요. 우유부단하시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에요.”

“정령사인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확실하겠지.”

로뮤는 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가 기억하는 지금의 황태자를 떠올렸다.

황제의 자리에 어울릴까 싶은 여린 성정이 우려되었던 남자. 하지만 하이엘프의 눈으로 봐도 결코 나쁜 남자는 아니었다.

눈앞의 제자는 뚝심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황후가 되어서 황제를 잘 보필할 것이다. 함께 제국을 잘 통치할 것이다.

“축하한다, 황태자비가 된 것을. 미래의 황후가 된 것을.”

로뮤는 진심인지 위로인지 모를 축하를 제자에게 건넸다.

“그게…… 단가요?”

텔미노아는 그런 스승의 말에 슬픈 눈을 했다.

“아직 정식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스승님이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축하한다.”

로뮤는 이상하게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기분을 느꼈다.

“……예, 고마워요.”

인간은 겨울이 되어서야 따듯함을 느낄 수 있다지 않았던가.

당시 로뮤는 슬픈 눈으로 그게 다냐고 물어본 제자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정확히는 가슴으론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인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텔미노아와 황태자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인간이 아닌 엘프였던 그는 겨울이 다 지나고서야 따듯함을 그리워했다.

로뮤는 결혼식이 열리기 1주일 전에 요정 숲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단명종의 시간과 감정에 너무 크게 얽혔다는 것을 로뮤는 그제야 실감했다.

딱 10년 정도만, 아니, 이번엔 좀 더 오래! 요정 숲에 있기로 결심했다.

쭉 이어지던 로뮤의 회상이 더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

뒤늦게나마, 바로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노아?’

회상으로 잠시 뿌옇게 변했던 그의 시야에 참으로 그리운 여인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리나구나.”

이내 초점이 잡히면서 어머니와 놀랍도록 닮은 소녀가 눈에 담겼다.

비록 음영술로 인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했지만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영혼에서 나는 냄새가 유독 닮은 소녀.

루나시르네가 자신을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제국의 1황후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어느 엘프의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던 여인, 텔미노아의 무덤 앞.

딸인 루나시르네는 얼굴과 목소리조차 기억에서 희미한 어머니와 마주했다.

“그…… 안녕하세요, 어마마마? 그, 그냥 어머니라 부를게요.”

다 큰 소녀는 다소 긴장한 투로 미리 준비했던 인사를 했다.

“저는 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어요. 사고가 있어서 머리 색과 눈 색이 좀 바뀌긴 했는데 저는 크게 신경 안 써요. 에헤헤…….”

루나의 목소리는 대놓고 떨렸다.

“그때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서, 저는 천만다행하게도 훌륭하신 스승님을 만나 그분 아래서 크게 되었어요. 그분은 저를 친딸처럼 아껴 주셨고 덕분에 이렇게 마녀가 되었답니다.”

그냥 덤덤할 것 같았던 어머니와의 재회. 하지만 이상하게 소녀는 가슴이 미어지고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솔라 오라버니와는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고요. 오라버니가 절 자주 부려먹긴 하는데, 그냥 속 깊은 제가 어지간한 건 다 받아 주고 있어요.”

루나는 목에 건 로사리오를 꼭 쥐고서 말을 이었다.

그런 루나를 뒤에서 로뮤가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근엔…… 여기! 쥴리아라는 귀여운 여동생도 생겼어요. 로뮤 오라버니에게 듣기론 영혼의 냄새가 솔라 오라버니와 많이 비슷하다고 하네요? 마치 부녀지간처럼요. 신기하죠? 전생에 보통 깊은 관계가 아니었나 봐요.”

이어서 루나의 옷깃을 잡고 옆에 선 쥴리아도 소개했다. 쥴리아는 솔라를 닮은 금색 눈동자로 눈앞의 비석을 보았다.

“아! 그리고 루한에 유리아라는 여기사가 있어요. 그 언니랑 저랑 친한 편인데, 글쎄! 그 언니가 솔라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바람이 은은하게 불면서 어느새 눈물 흘리고 있는 루나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제, 제가…… 흐윽! 어머니를 대신해서 어…… 솔라 오라버니 장가는 책임지고 보, 보낼게요!”

어린 마녀는 이 바람이 마치 어머니가 내민 손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크흠, 여기 로뮤 오라버니랑도 의형제를 맺었어요. 방금 안 사실인데 어머니가 로뮤 오라버니 제자였다면서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소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마저 말을 이었다.

이후론 반쯤 생각나는 대로 뱉은 말이라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았다.

대강 ‘솔라 오라버니는 사람이 너무 착하고 헤프다’, ‘그런데 도대체 뭘 먹고 컸는지 싸움을 그렇게 잘할 수가 없다’ 등등 지금까지 함께 여행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듯 말한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뵙게 돼서 정말 기뻐요. 저는…… 저는 결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히 미안해 하지 마시고 편히 잠드세요.”

그래도 마지막에 어머니를 원망치 않는다는 말은 잊지 않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 * *

텔미노아의 무덤 앞에서 인사를 나눈 다음, 루나와 쥴리아는 로뮤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로뮤는 하이엘프답게 수목 도시 엘펜에 제법 괜찮은 집이 있었고, 그 집은 꽤 넓었다. 혼자서 살기엔 부담스러운 소저택 정도 되는 크기.

덕분에 쥴리아와 루나는 이 저택을 탐험이라도 하듯 종종 돌아다녔고, 다음 날에는 시즈와 맨카까지 저택 뒤뜰에 데리고 와서 함께 놀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리리아는 세계수의 대리자이자 요정 숲의 여왕이라 늘 바빴고, 로뮤 또한 요정 숲의 경계를 위해 종종 집을 비웠다.

때문에 하루 중 절반 이상을 루나와 쥴리아는 저택 안에서 단둘이서 보내야만 했다.

“심심하다아~.”

루나가 저택 뒤뜰에서 길게 외쳤다.

“심심하다아~.”

쥴리아도 이제는 친언니처럼 따르게 된 루나를 따라 외쳤다.

‘요정 도시에 한번 가 봐?’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지만, 루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엘프들이 자신을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옆에 대짜로 누워 있는 쥴리아는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다고 이 어린아이 혼자 나돌게 하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로뮤 오라버니가 그날 이후 날 좀 피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루나는 멍하니 하늘에서 잎사귀를 타고 내려오는 햇살을 느끼며 로뮤를 떠올렸다.

그날 무덤에서 우연히 로뮤와 만난 이후, 그가 어째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피하거나 어색한 관계라면 충격을 받았을 텐데, 자신을 보는 로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애틋함도 보였기에 루나는 더욱 헷갈렸다.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물어봐야지.’

로사리오를 악력기처럼 꽉 쥐고서 루나는 다짐했다. 로사리오를 꽉 쥐는 그녀의 행동은 어느새 반쯤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솔라 오라버니는 언제쯤 오시려나?”

루나는 뒤뜰에 누웠던 상체를 일으키고는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요정 숲 밖이었다면 ‘로안’이라고 부르겠지만, 이곳은 요정들의 도시 중심부. 그녀는 간만에 오라버니의 본명을 원 없이 불러 보기로 했다.

“코오오…… 코오오…….”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멍하니 보던 루나의 귀로 귀여운 숨소리가 들렸다.

언니를 따라 심심하다고 따라 외치던 쥴리아가 어느새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키에에에.

히이잉.

함께 뒤뜰에서 일광을 즐기고 있던 시즈와 맨카가 그런 쥴리아를 신기하다는 듯 관찰 중이다.

그렇게 뒤뜰에서 무료한 햇살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응? 로뮤 오라버닌가?”

저택 입구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쥴리아가 일어나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고선 저택 입구를 향했다.

“여왕님?”

저택 안으로 들어온 외부인은 로뮤가 아닌 리리아였다.

“잘 지냈니?”

리리아가 그런 루나를 웃으면서 반겼다.

“심심하지? 미안하구나. 원래라면 함께 요정 숲을 돌아다녔어야 했는데. 내가 바쁘면 로뮤라도 시켜서 말이야.”

“괜찮아요. 시국이 시국이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명색이 하이엘프인데 손님 대접을 이렇게 방치하니 부끄럽거든. 그래서 내일부턴 임시로 요정들의 고서를 볼 수 있게 해 줄게.”

“정말요?!”

“응. 장로들의 동의를 받느라 좀 걸리긴 했지만 말이야.”

시큰둥했던 루나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런데 로뮤 오라버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나요? 어제 점심에 나가서 아직까지 안 들어오고 있는데…….”

얼굴을 환하게 핀 루나는 이어서 로뮤에 대해 물었다. 물어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로뮤는 지금 요정 숲 남쪽 경계면에 있어.”

“남쪽이면 제국이요?”

“그래, 정확히는 제국에서 도망쳐 온 유민과 저항군이지.”

“위험한 건가요?”

“아직은?”

“곧 위험하다는 거네요?”

“그렇겠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너를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 로뮤가 급히 나랑 너를 찾더라고.”

“로뮤 오라버니가요?! 무슨 일 있어요?”

“자세한 얘기는……. 어? 그러고 보니……! 그걸 못 들었네?”

리리아는 허당끼 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요. 로뮤 오라버니가 부르는데 가야죠.”

루나는 엘프 여왕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의 도서관 출입은 이거에 대한 보상이었군요?”

그러다가 문득 미간을 좁히면서 리리아에게 물었다.

“후훗, 그래, 맞아. 어서 나랑 같이 남쪽으로 가자.”

“쥴리아를 혼자 두면…….”

“그래서 시녀들과 함께 왔단다.”

루나의 염려에 리리아는 뒤를 향해 손짓했고, 엘프 시녀 셋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정령술을 익혔으니까 쥴리아를 잘 돌봐줄 거야.”

엘프 중에 정령술을 익히지 않은 엘프가 존재하겠냐만은, 어찌 되었든 루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약 한 시간 후, 루나는 리리아와 함께 요정 숲의 남쪽 경계로 이동했다.

요정 숲 안에서만 쓸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을 이용했기에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로뮤 오라버니!”

그곳에서 루나는 마중 나온 로뮤를 보았고.

“리나.”

로뮤는 루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로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나와 루나를 급히 부른 거야?”

이어서 리리아가 마중 나온 로뮤를 향해 물었다.

“저기 보이는 제국 황족 때문이야.”

리리아의 질문에 로뮤는 대답 대신 손으로 숲 바깥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제국 황족으로 추정되는 금발 금안의 기사가 있었다.

금발 금안의 황족은 숲의 경계선 바로 앞에 서서 아까부터 계속 뭐라 외치고 있었다.

남자의 뒤에는 저항군으로 추정되는 수십의 기사들이 열을 맞춰 기립해 있었다.

“나는 마하 제국의 정당한 혈통! 1황자 솔라시우스 디 미테일 룬 마하다! 요정들은 아낙시아의 서약을 이행하시오!”

그 황족은 자신을 제국의 1황자 솔라시우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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