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76.
원작에서 세계수 속으로 침투한 사람은 악황후 옥타나였다. 그것도 지금이 아닌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의 일이다.
본래부터 잔재주가 많던 그녀는 세계수의 가호와 여왕 리리아의 감시를 뚫고 세계수 속으로 잠입했다.
물론 수인족과 제국군의 침공으로 요정 숲 전체가 혼란스러웠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기도 대상도 달랐다.
훨씬 일찍, 전혀 예상도 못 한 존재가 상상 밖의 장소에서 침투한 것이다.
막 세계수 속으로 진입한 솔라는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원작의 솔라는 여기서 빛과 열의 힘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지.’
원작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가렸다. 등의 회색 마검도, 허리의 푸른색 마검도, 목에 건 두 개의 반지도, 그리고 자신의 얼굴도 가렸다.
그가 이토록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하나다.
‘이곳은 시공간을 아우르는 차원 속, 과거의 루한이다.’
지금 솔라시우스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이 과거의 타임 라인은 새로운 세계수, 세계수의 묘목을 식목할 수 있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세계수는 하나의 순환하는 우주. 세계수 속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차원이 펼쳐져 있다.
미래에서 온 솔라가 과거의 존재에게 인지를 주면 줄수록 그의 존재성이 위험해진다.
‘원작에서는 리리아가 주의점을 알려 줘서 무사했지.’
최대한 적은 사람이 그를 모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최대한 자신을 가리는 것이다.
‘악황제의 개입 외에도 원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 개의 마검과 태양샘 목걸이, 그리고 나 태광휘의 존재다.’
솔라는 무심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뻐끔뻐끔.
어항 속 붕어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역시나.’
이번에는 검집으로 바닥에 글을 써 보려 했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는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의 수하다. 그녀는 설원의 계승식을 망치기 위해 암약 중이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쓰려고 마음먹고는 들고 있던 검집을 움직였다.
부들, 부들, 부들.
이번에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모든 시도가 좌절당했다. 예상했기에 실망은 없다. 담담할 뿐.
그는 손목의 나뭇잎 팔찌를 보았다. 세계수의 잎을 엮어 만든 팔찌. 여기로 들어오기 직전, 리리아가 그에게 건넨 팔찌였다.
‘이 팔찌를 그녀에게 주면 제한적이지만 개입이 가능해.’
그의 금색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상황 체크를 마친 솔라는 고개를 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 겨울이 시작된 세상. 하늘은 검푸르게 어둡고, 대지는 백설을 품어 포근하다.
눈 쌓인 대지를 밟을 때마다 들리는 뽀득, 소리가 애틋하다.
‘장소도, 시간대도, 원작과는 달라.’
하긴, 악황제가 먼저 와 있다는데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터.
솔라는 원작에서의 기억을 미뤄 두었다. 이제는 참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어긋나 버렸다.
카앙, 카앙, 퍼억.
그렇게 멍하니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전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솔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이미 살육의 냄새를 맡았다.
‘여긴 루한일 텐데? 설원의 가호 안에서 살육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원의 가호는 대대로 루한을 지켜 주던 결계.
따라서 이런 살육이 대놓고 벌어지는 것은 이상하다.
원작의 ‘옥타나’도 저주와 중독을 이용해서 장난질을 쳤을 뿐이다. 물론 그 장난질이 결국엔 설원의 계승식을 망쳤었지만.
전투의 소리와 살육의 냄새가 나는 곳 가까이 솔라시우스의 걸음이 도달했다.
“아아악!”
“꺄악!”
기사와 마녀들의 비명 소리가 가까이에서 났다.
솔라는 이제 뛰듯이 움직였다.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도달하자, 저 멀리 왕도 윈테라의 전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솔라를 이끈 소란은 아름다운 설원 도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왕도 바로 밖이군.’
처참한 살육과 파괴의 향연이 막 끝나기 직전이었다.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마차가 반파되어 설원 위를 구르고 있었다.
어느 높으신 귀족께서 나들이 나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 같다.
호위하던 기사와 마법사, 시녀들 모두 죽은 모양.
애초에 설원의 가호로 살육 자체가 불가능한 동네다 보니, 호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화근.
‘…….’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차가움이 서렸고, 이내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얼마 안 가,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청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어린 소녀가 몸을 벌벌 떨면서 마차 뒤에 숨어 있었다.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는군.’
소녀를 본 솔라의 가슴이 뛰었다. 그가 이 순간, 이 장소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함일 것이다.
-쿠르르르르.
-키이이이이.
홀로 벌벌 떨고 있는 소녀 주위로 살육을 일으킨 주범들이 다가가고 있다.
생명체도 그렇다고 영체도 아닌 애매한 질감의 괴물들. 그림자 덩어리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석유를 뒤집어쓴 덩어리 같기도 하다. 놈들은 그런 가죽 위에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마석 박힌 갑옷까지 둘렀다.
숫자는 총 다섯 마리. 생김새는 둘은 사람의 형태였고, 셋은 네발로 기는 짐승의 형태였다. 크기는 대체로 4~6미터 정도.
‘상위 차원의 존재라서 설원의 징벌을 받지 않는 건가?’
솔라는 눈앞의 괴물들을 보며 눈에 살기를 머금었다.
지구에서도 지겹도록 상대했던 적.
‘A급 이상의 괴수들이군.’
그는 단번에 다섯 괴수의 수준을 파악했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와 마법사를 저렇게 죽일 수 있는 등급은 지구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A급이든 S급이든, 그에겐 태양샘 반지를 낄 필요도 없는 잡몹일 뿐.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일단 그녀와 접촉해야 한다. 이 팔찌를 건네야 해!’
솔라는 소녀를 향해 날았다.
타앗.
마차 주위를 포위해 오는 괴물들보다 먼저 소녀를 향해 나아갔다.
마검 윈테이라에 동기화된 여왕 루시푸르네는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전경에 숨을 들이켰다.
‘동기화가 해제되지 않아.’
또한 윈테이라와 동기화가 해제되지 않음을 느꼈다. 새삼 시녀장 베네사에게 미리 얘기해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는……?’
그녀는 리리아와 솔라에게서 세계수 묘목을 구하러 가는 여정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했다.
대강 시공간이 얽혀 있는 던전 같은 차원 정도로 이해했다.
루시는 솔라시우스를 보았다.
그리고 말을 하려 했다.
‘……!?’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아까 솔라가 윈테이라와 제노사이드를 붕대로 가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솔라는 주위를 차분히 훑기 시작했다. 금색의 눈동자와 무심한 듯한 표정.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루시는 그런 그의 얼굴과 분위기가 전혀 질리지 않았다. 볼수록 새롭고 설렜다.
얼마 후 여왕이 반한 남자는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점점 빠르게.
남자의 부츠가 순백의 대지에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저건?!’
저 멀리 익숙한 도시의 전경이 보였다. 늘 왕궁에 갇혀 있느라 많이 보지 못했지만, 어릴 적 옅은 기억에는 남아 있다. 왕도의 전경이다.
무엇보다.
‘저 마차는!’
저 앞에, 처음 보는 괴물들에게 포위당한 순백의 아름다운 마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찌 모를까, 루한의 공주들이 예로부터 타던 마차인 것을.
루시푸르네 또한 설원의 저주를 받기 전에는 종종 저걸 타고 왕도 밖으로 나들이를 가곤 했다.
‘세계수 속의 차원은 바로 과거였어!’
대강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됐다.
분명 과거의 시간대지만, 악황제의 개입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된 것이다.
당장 눈앞의 습격도 그녀의 기억엔 없었으니까.
그렇게 분화된 세계선을 품은 나무가 바로 세계수의 묘목으로 불리는 거였다.
‘나랑 솔라는…… 과거에 만난 적이 있던 건가?’
멀리서 보니, 어린 시절의 루시로 추정되는 청은발의 소녀가 마차 뒤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유년기의 루시일 것이다.
‘솔라가 말했던 그녀가 나였던 건가!’
여왕 루시푸르네는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렸다.
‘잠깐? 그럼 이 팔찌도 원래는 솔라가……?’
한편으론 지금 솔라의 손목에 있는 나뭇잎 팔찌가 걸렸다.
그녀의 것과 똑같이 생긴 팔찌. 하지만 루시는 이 팔찌를 솔라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
찝찝한 예감이 불현듯 스친다.
타앗.
하지만 루시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솔라가 대뜸 마차 중심부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후드를 깊게 쓴 솔라는 가볍게 착지 후 서둘러 마차 뒤로 향했고, 가까워지면서 청은발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루시푸르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니잖아?!’
마차 뒤에 선 청은발의 소녀는 분명 루시와 닮았다. 그러나 루시의 어릴 적과는 차이가 났다.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봤는데……?’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니다.
그녀는 기억을 뒤져 보았다. 여왕의 기억 속에 있는 왕실 초상화들을 꺼내 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말도 안 돼……!’
눈앞의 소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루한의 공주 예나체리나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설원의 가호가 가장 짙은 왕도 윈테라 인근이다. 루한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주인 자신이다. 암살의 위험은 0에 가까웠다.
루한의 왕가를 위협하는 존재는 오랜 악연인 ‘거짓의 대마녀’를 빼곤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거짓의 대마녀도 설원의 가호 안에서는 간신히 저주나 걸려고 시도할 뿐, 이마저도 예나체리나의 어머니이자 루한의 여왕 카르세리나에게 늘 가로막혀 실패했었다.
그래서 이번 왕도 밖 나들이에도 예나(예나체리나의 애칭)는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호위와 수행원을 소수만 데리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였다.
‘도대체…… 저게 뭐지?’
예나는 반파된 마차를 포위하고 있는 처음 보는 다섯 괴물을 보며 벽안을 떨었다.
눈동자와 어깨와 양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잘게 떨렸고,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언제쯤 오실까? 마녀들이 죽기 전에 왕궁으로 마법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설원의 씨앗을 북풍은 보호하리.”
청은발의 공주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문을 외워 결계를 펼쳤다. 아직 어리고 설원의 계승도 하지 않아 약하디약한 주문. 그러나 없는 것보단 낫겠지. 예나는 투명한 방어막을 간신히 펼쳤다.
하지만 왕실 기사와 마녀회의 마녀들을 무참히 학살한 놈들을 이딴 걸로 막을 수나 있을까?
파스스슷.
역시나, 다섯 괴물은 커튼을 치는 것처럼 수월하게 그녀의 결계를 넘겼다.
“……?!”
예나체리나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절망으로 탁해질 때였다.
타앗.
그녀 바로 앞에 누군가가 착지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집중하니 사람 형상의 투명한 누군가가 보였다.
‘은신 마법?’
혹시 비밀리에 그녀를 지키는 수호 기사인가?
예나체리나의 흐렸던 벽안에 다시 희망이 서렸다.
‘……저건 뭐지? 팔지?’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에 유독 선명한 녹색 팔찌가 보였다.
전신이 투명함에도 오직 그 팔찌만큼은 선명했고, 그래서 홀로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저벅, 저벅, 저벅.
피로 적셔진 눈 위로 발자국이 수놓아졌고, 어느새 예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공주는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저 괴물들과 다르게 눈앞의 존재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켜 주려 온 것 같았다.
처억.
“저한테…… 주는 건가요?”
눈앞의 투명한 존재는 그 녹색 팔찌를 다짜고짜 예나에게 건넸다.
소녀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그 팔찌를 손목에 걸었다.
파아아앗.
그러자 투명했던 사람의 몸이 급속도로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체형은 날렵하면서도 탄탄했다. 키도 컸다. 젊은 남자 같았다.
짙은 갈색의 후드 달린 로브를 입은 남자.
후드 속에 얼굴을 깊게 감췄고 복면까지 써서 눈동자만 간신히 보였는데, 그 눈동자는 황금이 박힌 것 같은 금색이었다.
허리와 등에 차고 있는 검 자루는 집요할 정도로 천으로 감아 원래 모양을 추정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누…… 누구……?”
예나체리나는 눈앞의 금색 눈이 인상적인 남자를 보며 떨듯이 물었다.
“…….”
남자는 금색 눈동자를 무심히 소녀에게 비추고선 등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았다. 회색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대로 몸을 돌려 코앞까지 다가온 괴수들을 향해 겨눴다.
화아아아.
적에게 겨눈 회색 검신 전체에 눈부신 태양 빛이 서렸다.
서거걱 서걱!
광휘가 핏빛 설원 위에서 춤을 췄다.
공주를 위협하던 다섯 괴물이 광휘의 칼날에 척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