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77.
루한에서 가장 실력 높은 왕실 기사들도 어찌하지 못했던 괴물들인데, 마녀회의 마녀들도 비참하게 피를 뿌리게 만든 괴물들인데,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는 태양을 담은 검을 휘둘러 눈앞의 괴물을 척살했다. 무참히, 순식간에.
쉬이이이.
남자가 휘두른 태양은 뜨거웠다.
눈으로 가득 찬 설원이 녹았고, 눈에 물들었던 피 또한 증발되었다.
수증기가 안개처럼 주위를 감싼다.
저벅, 저벅, 저벅.
“…….”
예나체리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복면을 쓰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금색 눈의 남자.
얼핏 보니 머리 색도 금발 같았다.
아직 여운처럼 남은 광휘가 그의 회색 검과 어깨, 허리에 은은하게 서렸다.
‘제국…… 황족?’
예나체리나는 불현듯 눈앞의 남자가 제국 황족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국 황족은 금발, 금안을 했고 빛과 화염의 마나를 사용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저어…….”
예나는 자신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에는 어쩐지 슬픔이라는 얼룩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열 번째 생일을 맞이한 루한의 공주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저, 저는 루한의 공주 예나체리나예요! 당신은 누구죠? 보답을 하고 싶어요!”
어린 소녀는 당당하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
하지만 소녀의 인사에도 눈앞의 남자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건 원작과 똑같군.’
시간 여행의 제한 때문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어마마마!?’
이는 마검 윈테이라에 동기화 중인 루시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릴 적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솔라가 말한 그녀가…… 어마마마라니…….’
한편으론 이 복잡하고 기묘한 상황에 머릿속이 얼얼했다.
“저기…… 제 말을 못 알아듣나요? 분명 높은 제국어로 말했는데…….”
예나체리나는 솔라시우스가 말이 없자, 조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일, 일단…… 그러면! 곧 왕궁에서 지원군이 올 테니까…… 그러니까…….”
어린 소녀는 순수하고 착했다. 그녀는 몸짓으로 감사를 표했고 여기에 있으면 보상을 하겠다고 전하려 노력했다.
“…….”
솔라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주님!!”
“예나! 예나야!! 무사하니?!”
그때, 왕도 쪽에서 일련의 무리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핀을 탄 기사들과 빗자루를 탄 마녀와 마법사들이 하늘 위에 보였다.
“아! 저기 보세요! 오셨어요! 어마마마~ 아바마마~.”
이를 본 예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하늘 위로 손을 크게 흔든다.
“은인이시여, 저와 함께 이제 왕궁으로…….”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자신을 구해 준 남자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녀의 손목에 녹색 나뭇잎 팔찌만이 남아 있을 뿐.
시야가 암전된다.
몇 초 후 환한 빛과 함께 회색으로 가득한 아공간이 펼쳐졌다.
‘…….’
루시푸르네는 비현실적인 꿈을 꾼 기분이다.
자신의 어릴 적이 아닌 어머니의 어릴 적 시간대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함과 심란함이 그녀를 적셨다.
‘…….’
루시는 혹시나 하고 입을 열었다.
‘그…….’
그리고 목소리를 냈다. 아까와 달리 이곳에선 말을 할 수 있었다.
‘그으…….’
하지만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루시는 끝끝내 언어를 완성시키지 못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도 몰랐으며, 하물며 그렇게 해서 듣게 될 진실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중에도 솔라가 선 회색 아공간은 계속 꿈틀거렸다.
파아앗.
이윽고 다시 한번 세상이 암전되기 시작했다.
* * *
왕도 외곽에서 있었던 습격은 설원의 대마녀와 오래전부터 척을 지던 거짓의 대마녀가 벌인 짓으로 잠정적으로 결론났다.
그 일이 있은 후, 왕궁의 경비가 더욱 엄중해진 것은 덤이었다.
루한의 공주 예나체리나는 자신을 구해 준 남자를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10살이었던 예나는 늘 그 의문을 품고서 자랐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구해 준 정체불명의 방랑 기사, 그가 휘날리던 광휘의 검무가 밤마다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준 녹색 팔찌는 언제 어디서나 착용하는 분신 같은 액세서리가 되었다.
단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워낙 충격적이고 워낙 극적인 만남이라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날 이후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예나체리나는 사춘기에 들어섰고 설원의 계승을 받았다.
설원의 계승은 대대로 루한의 공주들에게 성장통 같은 절차였다.
설원의 권능은 워낙 강대한 힘이기에 이를 완전히 소화하려면 긴 시간과 고통이 수반됐다.
예나체리나는 15세의 나이에 설원의 계승식을 받았고, 지금 이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신의 작고 가녀린 몸에 세상의 차가움을 욱여넣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
“흐으으으…… 흐으으윽…….”
너무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에 예나는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원의 힘을 흡수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녀 곁에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든 마나를 다루는 초인이든 지금의 예나에게 가까이 오면 치명적인 동상을 입었다.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위험하다.
예나의 어머니이자 루시의 할머니기도 한, 여왕 카르세리나는 설원의 권능을 물려준 이후 평범한 마녀(?)로 돌아갔기에 가까이 있어 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것과 별개로 멀찍이서 응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나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카르세리나뿐만 아니라 예나의 아버지도, 마녀회의 마녀들도, 시녀들도 누구도 감히 그러지 않았다.
매정한 전통 때문이다. 초대 루한의 여왕인 베아트리체 이후로. 역대 루한의 공주들은 대대로 이를 혼자서 이겨 내야 했다.
예나는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공터에 홀로 남겨졌고, 이 근처로는 그 누구도 얼씬하지 않았다.
예나체리나는 세 가지와 싸워야 했다.
극심한 몸살처럼 전신을 쑤시는 고통과 싸워야 했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으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했다.
‘아파……. 너무 아파!’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고, 이러다 미쳐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외로웠다.
고통에 질끈 감긴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으나 이내 얼음 조각으로 변해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어머니 카르세리나도 예나의 상태가 역대 계승식 후유증 중 유독 심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소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르고 두 달이 흐르고 반년이 흘러,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예나체리나는 아직 설원의 권능과 싸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제일 길었던 기간이 6개월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예나의 1년은 루한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러자 왕궁은 물론 루한 전역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왕궁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슬그머니 나오고 있었다.
루한의 여왕과 국서는 당장이라도 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저 좀 오래 걸릴 뿐이라고 애써 믿었다.
매정한 전통이지만 여왕의 고결함과 강인함을 증명하는 전통이다. 카르세리나는 자신과 딸의 대에서 그 전통이 훼손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애초에 공주를 보러 간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었다.
성장통을 홀로 감내하는 예나체리나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굉장히 많이 지났을 것 같다고 느꼈다.
“…….”
그녀는 마치 얼음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어깨와 고개를 살짝 움츠리곤 가만히.
눈물은 이제 나지 않았다. 눈물은 그녀의 볼과 턱에 고드름만 만들어 더 우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가 고팠다. 설원의 계승식으로 그녀의 몸은 영체화되었기에 먹고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어쩌면 심리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손목에 있는 녹색 나뭇잎 팔찌를 쓰다듬으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이 팔찌에는 착용자의 심리를 안정시켜 주는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이 팔찌만큼은 시들지 않았다.
* * *
아무것도 없던 회색 세계가 암전되고, 얼마 후 빛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한의 왕궁이군.’
‘순백궁이야……!’
전환된 세상을 본 솔라와 루시는 동시에 이곳이 어딘지 알아챘다.
솔라는 원작에서의 기억으로, 루시는 자신이 현재 갇혀 있는 곳이기에.
‘원작에선 여기서부터 시작했었지.’
솔라의 금색 눈동자가 왕궁 내부를 훑었다.
왕궁 내부 깊숙한 곳, 뚫린 천장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대체로 답답한 느낌을 줬다.
왕궁이고 설원의 저주가 시작되기 훨씬 전임에도 그가 선 곳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왕궁 내 분위기는 어둡고 적막했다.
“흐으으윽…… 흐윽.”
멀리서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점이군.’
그 흐느낌을 들은 솔라는 바로 깨달았다. 원작의 세계수 편에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었다.
‘이건 어마마마의?!’
루시 또한 지금의 상황을 인지했다.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 예나체리나는 역대 설원의 대마녀 중 가장 긴 성장통을 견뎠었다지.
솔라시우스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냉큼 향했다.
그의 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의 허리에 매달린 루시 또한 긴장된 마음으로 과거의 왕궁을 거닐었다.
얼마 후 서리가 가득한 공터에 도착했다. 그 공터 중심부에는 청은발의 한 소녀가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솔라는 짙어지는 추위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인기척을 느낀 예나체리나가 그런 솔라시우스를 인지했다.
사파이어색 눈동자에 놀람과 반가움이 메아리쳤다.
“……!!”
하지만 이윽고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를 두려운 눈으로 보았다.
남자가 입은 망토와 후드에 서리가 강하게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지 마세요! 지금의 저는 위험하다고요!”
소녀는 입으론 오지 말라고 외쳤지만 눈으로는 애타게 남자를 불렀다. 당신이라면 이 설원의 지옥에서 나를 꺼내 줄 수 있을까요?
‘…….’
루시푸르네는 숨을 멈추고 이 상황을 구경했다.
어머니의 소녀 적 모습, 그런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솔라시우스.
현재 루시가 품고 있는 설원의 저주만큼은 아니지만, 어머니 예나체리나의 상태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죽지 않을 뿐이지 사람에게 큰 부상을 입혔으니까.
이를 통해 지금의 솔라가 루시에게 얼마나 가까이 올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솔라는 회귀 전보다 더 강해. 무엇보다 태양샘 반지도 있고.’
딱히 걱정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대와 설렘이 더 컸다.
‘그런데 회귀 전의 솔라는 어떻게 해결했지?’
한편으론 궁금증도 생겼다. 태양샘 반지도 없고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회귀 전의 솔라는 이 상황을 어떻게 버틴 것일까?
루시의 궁금증과 별개로 솔라는 점점 어머니를 향해 나아갔다.
“오지 마세요! 오면 안 된다고요!”
그럴수록 예나체리나의 애절한 외침이 적막한 공터를 채웠다.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어느덧 둘의 거리가 5미터 안으로 좁혀졌다.
그의 몸을 덮은 옷과 후드가 딱딱하게 얼었다.
“……!”
하지만 정작 솔라의 피부에는 얇은 서리만 묻었을 뿐,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몸 또한 굳거나 느려지지 않았다.
3미터까지 솔라와 예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화아아앗!
2미터를 넘기자, 솔라의 몸에서 광휘가 일었다.
싸늘했던 공간이 따듯함으로 채워졌다.
“!!”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경악과 환희가 반반씩 섞였다.
볕에 눈이 녹듯이, 그녀를 옭아매던 모든 것이 눈앞의 남자 앞에서 녹아 내린다.
눈물이 자신의 볼을 타고 내려옴을 설원의 공주는 느꼈다.
눈물은 서리로 변하지 않고 순수한 액체 상태로 바닥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