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78화 (78/212)

제78화

#78.

원작에서, 또는 이전 회차에서의 솔라시우스는 모든 부분에서 처절했다. 필사적이었다.

늘 목숨을 걸어야 했고, 매사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변경백에서는 도적들을 땀 흘려 척살했고, 제국군과의 전투가 끝나면 온몸이 피와 상처로 가득했다.

세계수의 묘목을 구하러 시간 여행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

당시의 솔라는 틈만 나면 가해지던 빙결 디버프를 간신히 이겨 냈었다. 필사적으로 냉기와 싸우면서 처절하게 예나체리나를 도왔다.

볼카 광산에서 얻은 화염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못했을 플레이.

덕분에 화염의 가호를 더욱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황족의 피에 잠들었던 빛의 힘을 깨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었다.

‘물론, 지금의 나에겐 의미 없지만.’

태광휘와 합쳐진 이번 회차의 솔라시우스는 가까이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응시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소녀의 청은발과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비쳤다.

둘의 거리는 서로의 숨소리마저 확인할 수 있는 밀접한 거리.

손만 뻗으면 안을 수 있는 거리.

문득 솔라는 루한의 여왕 루시푸르네가 떠올랐다. 아직 실제로 본 적 없지만 루시푸르네도 이와 비슷하게 생겼겠지?

같은 순간.

‘!!’

마검으로 이 상황을 목도한 루시푸르네는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 예나체리나의 모습에서 어째 자신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비록 설원의 저주를 품은 자신보단 어머니의 상황이 낫다고 해도 유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솔라가 자신에게도 이렇게 가까이 와 줄 수 있을까?

‘가능해! 태양샘 반지가 있잖아? 그 엘프 여왕도 확답했고!’

루시푸르네는 속으로 외쳤다. 설원의 저주를 품은 루시의 상태가 더 심각해도 상관없다. 솔라에게는 두 쌍의 태양샘 반지가 있다. 그 반지를 끼기만 한다면 가능하다!

가능한 걸 넘어서 설원의 저주도 해주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어머니와 솔라는 그럼…….’

한편으론 회귀까지 하고 나서야 알게 된 어머니와 솔라의 관계에 루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심란함을 느꼈다.

루시는 어머니 예나체리나를 사랑했다. 사랑했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다. 눈앞에 계신 어머니는 현실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시간선의 어머니다.

‘어쩌면 그가 마지막까지 내 곁에 있어 준 이유가…….’

그럼에도 그녀는 심란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써 외면했다. 아닐 것이다. 인정할 수 없다.

“어……어떻게……?”

마침 코앞에서 소녀 시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그……그러니까…… 당신은 그때 저를 지켜 주신 분이죠? 이 팔찌를 주신…….”

예나체리나는 1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늘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신음을 흘리거나 흐느끼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황홀했다.

바라고 바라던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던 상황.

예나체리나는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인간이란 적응의 종족. 시간이 5분, 10분씩 흐르자 경악과 환희에 찼던 그녀 또한 어느덧 차분해졌다.

“저는…… 루한의 공주 예나체리나라고 해요.”

그녀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외로움과 고통에 신기해 하며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금색 눈동자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어디서 오셨나요?”

예나는 높은 제국어도 모자라 대륙 공용어까지 사용해 물었다.

“말을…… 못 하시나요?”

그래도 솔라가 대답이 없자, 예나가 조심스레 물었고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글은 아세요?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데…….”

예나가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터의 바닥은 많이 녹았지만 여전히 눈이 얕게 깔려 있다. 손이든 발이든 문자 정도는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솔라는 그런 예나에게 양손으로 엑스 자를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 무슨 마법에 걸린 거구나! 그때 저를 습격했던 괴물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예나의 질문에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이 맞자 소녀는 유심히 남자의 후드 속 얼굴을 쳐다봤다.

‘나이도 안 먹은 거 같고, 옷도 변한 게 하나도 없고…….’

비록 눈과 이마만 보였지만 예나는 확신했다. 특히 복장. 입고 있는 옷과 무장이 그때 보았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게 없다.

예나체리나는 루한의 공주이자 차기 설원의 대마녀. 기억력은 좋은 편이고, 그때 자신을 도와준 남자에 대한 기억은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준 팔찌, 아직 이렇게 간직하고 있어요. 참 신기해요. 한 번도 시든 적이 없거든요. 아까의 설원에서도.”

솔라가 말을 못하자 예나체리나가 일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쫑알쫑알거리는 것이 거슬리진 않고 딱해 보인다. 오랜 외로움을 겪었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시죠? 저는 얼마…… 전이…… 맞을까? 시간이 꽤 지난 거 같긴 한데……. 어쨌든! 최근에 설원의 계승을 했어요. 설원의 계승이 뭐냐면…….”

예나체리나는 자신의 얘기를 하소연하듯 솔라에게 뱉었다.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솔라시우스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 줬다.

“……그랬는데, 당신이 오고서 저를 억누르던 모든 것이 사라졌어요.”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예나체리나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과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직 설원의 권능을 완전히 흡수한 것 같진 않아요…….”

자신의 몸을 살핀 예나체리나는 얼마 안 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지금은 광휘를 비추는 남자 덕분에 나아진 것일 뿐, 그가 사라지면 또다시 그녀는 설원의 고독 속에 갇힐 것이다.

예나의 사파이어 눈동자가 광휘의 방랑 기사를 조심스레 응시한다.

솔라시우스는 입을 다물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예나체리나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눈 안에 담은 메시지를 해석해 보았다.

“…….”

부디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성장통을 이겨 낼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것일까?

어떤 바람이든 간에 태광휘는 눈앞의 소녀를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쭉 같이 있어 줄 순 없겠지만, 그녀가 성장통을 이겨 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그것이 원작에서의 메인 퀘스트였고, 현실로 다가온 지금엔 숙명이었으니까.

처억, 처억, 척.

솔라는 예나를 향해 이런저런 손짓과 몸짓을 했다.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녀는 그의 몸짓을 알아챘고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깜짝 생일 선물을 받은 해맑은 소녀처럼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솔라는 자신의 마나를 조심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태양 이능을 사용함에도 어떤 부작용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춤의 마검 루시의 냉기도 소모되지 않았다.

아마 예나체리나가 품고 있는 설원의 권능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말없이 눈빛으로 소녀에게 말했다.

“네!”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솔라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다르군.’

그런 예나의 반응에 솔라는 속으로 의아해 했다.

원작서 예나체리나는 지금과 달랐다. 그녀는 갑작스레 나타난 솔라시우스를 매우 경계했었다. 정신 상태도 지금과 달리 많이 피폐했었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목에 저 팔찌를 채우는 것도 정말 힘들었었다.

그랬었는데…….

눈앞의 소녀는 지나칠 정도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감도도 굉장히 높은 것 같았고.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예상되는 이유는 있었다. 처음부터 여기서 시작했던 원작과 달리, 이번 회차에서는 좀 더 과거에서 추가적인 인연을 맺었으니까.

세계수 팔찌를 미리 건넨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악황제가 조용하군. 과거 시간대의 재상도 조용하고.’

한편으론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적들에 대한 경계도 잊지 않았다.

둘은 그날 이후 쭉 공터에 함께 있었다.

아무도 오지 못하는 공터.

두 사람은 마치 춤을 추듯이 각자의 마나를 움직였다.

설원의 권능은 태양의 마나에 순응하여 예나체리나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치열하고 처절하고 필사적이었던 원작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느새 둘은 서로의 손이나 어깨 정도는 어색함 없이 잡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스킨십을 한다고 해도 진짜로 만지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복면도 검을 가린 붕대도 만져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다.

‘이건…… 서로가 누리는 시공간이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예나의 입장에선 마법으로 투영된 사람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이분은…… 설마?!’

그녀는 이것으로 솔라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스크립트로 읽었던 걸 실제로 경험하니 신기하군. 만져지지만, 실제로 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아.’

지구인 태광휘의 입장에서도 그녀와 접촉할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지구식 표현으로는 SF 장르에서나 볼 수 있을 촉감형 홀로그램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선과 시간선이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이런 와중에도 지금처럼 예나체리나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손목에 찬 세계수 팔찌 덕분이다.

손과 어깨 외에도 더한 접촉도 가능하겠지만, 솔라는 그러지 않았다.

어깨와 손을 잡는 행위도 어디까지나 설원의 권능 흡수를 돕기 위함일 뿐.

“……!”

이런 솔라의 모습에 예나는 수줍게 미소 지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눈을 빛내며 솔라의 허리춤에 있는 천으로 감긴 마검을 눈여겨보았다.

파란 마석만이 감긴 천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그 파란색 마석을 통해, 루시푸르네는 어머니와 솔라시우스를 멍하니 보았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루시는 어지러웠다.

사랑하는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 사랑하는 솔라시우스.

루시는 처음으로 마검 윈테이라에 동기화한 것을 후회했다.

적어도 이 세계수 속으로 가는 것만큼은 거절했어야 했는데.

‘리리아는 알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말리지 않았어.’

문득 엘프 여왕 리리아가 떠올랐다. 세계수의 기억을 공유하는 그녀라면 분명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이 광경을 목도한 루시가 어떤 심경을 느낄지도 예측했을 것이다.

‘요정 여왕은 무슨 의도였을까?’

만약 자신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줄 목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라면 상당히 악취미다.

물론, 리리아가 지금 루시의 생각을 알게 된다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어차피 말려도 갈 거 아니었나요?”라고 말하면서.

둘이 재회한 날로부터 낮과 밤이 세 번 오갔다.

시간 여행자라서 그런지 솔라 또한 예나처럼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됐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둘은 오직 설원의 힘을 다스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설원의 강대함에 짓눌렸던 소녀는 설원을 품은 대마녀가 되었다.

‘원작보다 1주일이나 빠르군.’

설원의 마나가 안정됨을 느낀 솔라는 태양 이능을 해제하면서 눈앞의 대마녀를 응시했다.

진정한 마녀가 된 소녀 또한 눈물을 글썽이면서 솔라시우스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당신은…… 제…… 그러니까, 저의 은인이에요!”

예나체리나는 설원의 권능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느꼈다.

전부 이 남자 덕분이다.

소녀의 사파이어색 눈동자에 깊은 신뢰와 호감이 만년설처럼 쌓였다.

복면과 후드로 가렸지만, 진짜 얼굴 또한 분명 잘생겼을 것이다.

제약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만, 분명 듣기 좋은 목소리일 것이다.

솔라시우스를 보는 예나체리나의 마음속은 환희로 넘쳐흘렀다.

“그럼 당신은 이제…….”

한편, 그녀는 눈앞의 이름 모를 남자와 헤어질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 곧 떠나시겠네요? 그때처럼.”

소녀는 조심스레 물었고, 얼굴을 가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체리나는 솔라시우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와 헤어진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슬프진 않았다. 이상하게 이 사람과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솔라의 허리춤을 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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