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80화 (80/212)

제80화

#80.

옥타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마계에서 막 나오자마자 들은 옛 이름이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녀의 잿빛 기억을 출력한다.

-아낙시아! 오! 나의 아낙시아!

-오! 나의 영광! 오! 너의 절망…….

호선을 그린 입가와 달리,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찌하여 세계수에서 저주받은 아이가…….

-죽여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이엘프입니다. 차라리 제물로 삼는 게…….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제3자의 시각으로 역사책을 보는 기분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뿐, 복수라는 감정 자체는 없다.

“그러고 보니…… 세계수와 엘프 여왕은 그대에 대해 알고 있겠군, 아낙시아.”

눈앞 소년의 목소리가 회색 회상에 잠겨 있던 옥타나를 깨웠다.

그녀는 묘한 눈으로 탁한 금안을 한 소년 황제를 보았다.

자신의 먼 후손과 교미를 하여 낳은 아이가 눈앞에 있다. 이목구비는 자신과 닮았지만 영혼은 전혀 닮지 않은 존재. 아들이지만 결코 아들이 아닌 존재.

“그냥~ 옥타나라고 불러 주시지요, 마왕님.”

옥타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렇게 하지.”

세피로스가 그녀의 미소에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나도 이 필멸자의 몸에 어울리는 호칭으로 불리고 싶군. 마왕 대신 황제 폐하로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는 세피로스는 그저 재밌다는 반응이다.

그래, 저 상위 차원의 존재에겐 이 또한 연극을 가장한 유희일 뿐이겠지.

마계를 다녀온 그녀는 누구보다 눈앞의 소년 마왕을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폐하, 세계수와 리리아는 저에 대해 알면서도 알지 못한답니다. 사그라진 세계선의 기억을 흡수했다고 해도요.”

그녀는 세피로스의 연극에 기꺼이 응해 주기로 생각했다. 처음 그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라……?”

“그들은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결코 말하지 못하지요. 저의 거짓말도, 저의 인형술도, 재로 변한 제 심장도, 전부.”

“아낙시아의 서약 때문인가?”

“아주…… 연관이 없진 않아요…….”

옥타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낙시아! 너는 우리 일족의 수치다! 감히 세계수의 것을 도둑질하려 하다니.

-저는 당신의 힘, 특히 설원의 힘이 필요합니다.

-미안하오…… 아낙시아.

옥타나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회색 기억이 재생된다.

꽈악.

이번엔 아까와 달리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마모된 기억 속에 이 부분만은 아직 약하게나마 감정이 남아 있다.

묘한 감정의 편린이 옛 하이엘프의 얼굴에 서렸다.

“잘됐군. 그럼 내가 뭘 시킬지 알겠지?”

짝!

세피로스는 옥타나의 미소를 응시하며 손뼉을 쳤다.

“흐응~? 세계수 속으로 잠입하라고요? 아무리 각성한 저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멸망한 세계선 때와 달리, 엘프 여왕과 세계수도 대비하고 있을 테고요.”

황제의 말에 대마녀가 처음으로 난색을 보였다. 마계에서 권능을 배웠지만, 다짜고짜 요정 숲을 공략하는 것은 무리라고 봤다.

“마법사나 일반 병사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해요. 적어도 암흑대공 정도 되는 강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지금 암흑대공은 마계에서 귀환하지 않았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어?”

세피로스는 흑발을 휘날리는 요염한 엘프 마녀를 응시하면서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나와라.”

쿠웅, 쿵.

그의 말과 함께 뒤쪽 밀실 입구에서 거대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수인족을 벌써 굴복시킨 건가요?”

입구 쪽을 바라본 옥타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의 권능이니까.”

“그 잘나신 권능이 세계수와 솔라시우스는 어떻게 못 하나 보군요.”

“하위 차원이라고 해도 신은 신이니까. 태광휘도…… 지구에선 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놈이고.”

“그런 두 존재가 있는 곳으로 저를 보내시겠다?”

“수인족 군단이 대기 중이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제국군도 요정 숲 동쪽으로 보낼 거야. 암흑대공도 마계에서 나오자마자 전장으로 보내도록 하지.”

세피로스는 옥타나를 달래듯 설득했다.

“그 정도 군세면 아무리 세계수와 엘프 여왕이라고 해도 힘들 거야. 너는 그때를 노려 세계수 안으로만 들어가면 돼.”

황제와 마녀의 머릿속으로 각 장의 계획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호위로 수인족 왕 가오이를 붙여 주지. 수족처럼 마음껏 부리라고.”

턱 끝으로 입구에 선 거대한 수인족 전사를 가리켰다.

“…….”

사자 갈기처럼 생긴 수염과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수인족 전사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옥타나를 관찰한다. 그러다가 충성스러운 기세로 황제를 향해 예를 표한다.

세피로스는 고개를 까딱이며 가오이의 충성을 받았다.

“세계수 속에서 마계에서 배운 주술만 잘 펼쳐 줘. 그럼 나 또한 세계수 속으로 강림 가능하니까.”

“그러지요. 그럼 지금부터 준비에 들어갈게요. 마도사들에게 선진 기술을 알려 줘야 할 테니까요.”

옥타나가 수락하자 세피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의 대마녀는 황제 앞에서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입구에 선 사자형 수인족 전사가 옥타나를 호위하듯 안내한다.

“인재가 부족해. 인재가…….”

그런 옥타나와 가오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피로스가 중얼거렸다. 한편으론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본래라면 저 둘에다 둠까지 합치면 충분하고도 남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세계수와 지구라는 변수가 개입하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최악의 경우…… 세계수의 권능을 받은 태광휘가 지구의 헌터들을 여기로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몰라.’

그가 11차원의 마수들을 이 세계로 마음껏 소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직 세계수 속 과거 시간선에서만 소환할 수 있었다.)

11차원의 존재를 소환하게 되면 세계수 또한 이에 상응하는 권능을 발현할 수 있었다. 이게 모두 빌어먹을 천계, 12차원이 만든 시스템 때문이다.

지구에서 소멸한 마왕의 기억에 따르면 지구는 태광휘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 헌터들도 위협적이었다.

‘죽음의 대마녀를 빼앗긴 게 아깝군.’

그림자 핵과 죽음의 대마녀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 크게 아쉬웠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비슷한 대체제는 늘 준비해 두었으니까. 지하드의 키메라 군단과…… 알파의 뱀피르 군단이 있겠군.”

세피로스의 입가에 비릿한 호선이 생겼다.

‘일단 세계수 묘목을 얻고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그는 방금 옥타나가 나왔던 밀실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둠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군.’

옥타나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실 때와 마찬가지로, 악황제는 입맛을 다셨다.

마계의 문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지만, 세피로스는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 * *

요정 숲의 남쪽에서는 얼마 전부터 금발, 금안의 청년 기사가 나타나 반복해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마하 제국의 마지막 남은 정통, 1황자 솔라시우스요! 요정 숲의 요정들은 아낙시아의 맹약을 지키시오!”

죽었다고 알려진 1황자 솔라시우스를 사칭하는 자들은 전부터 종종 있었다. 물론 전부 가짜였다. 사칭을 하더라도 얼마 안 가 악황후에게 죽임당해서 이후론 사칭범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숲의 경계에 선 솔라시우스의 사칭범을 보던 리리아는 잠시 세계수의 기억을 더듬었다. 멸망한 세계선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아…… 있긴 있었구나. 하지만 사칭범이라서 무시했었지. 결국 저들은 와해되었고, 솔라시우스를 사칭한 저 황족도 훗날 암흑대공에게 죽임을 당했지.”

리리아의 눈이 요정 숲 밖을 향했다. 금발, 금안의 기사가 보였다.

‘외모는 로안과 닮긴 했어.’

나이는 진짜 솔라시우스인 로안보다 어려 보였다. 루나시르네와 솔라시우스의 사이 정도.

“어떻게 할까?”

그때 옆에 있던 로뮤가 리리아에게 물었다. 로뮤의 물음에 리리아는 짧게 생각에 잠겼다.

“원래였다면 무시했겠지만…….”

단명종과의 접촉을 극혐하는 엘프들이다. 멸망한 세계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저들을 외면했었다.

“하지만 곧 제국군과 수인족들이 침공해 올 것이란 말이지? 무엇보다 그녀가…… 오겠지?”

멸망한 세계선의 일을 알고 있는 리리아의 입장에선 눈앞의 저항군과 유민들이 아까웠다. 저들을 전력으로 쓴다면(전력이라 쓰고 고기 방패라 읽는다)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리리아는 로뮤의 물음에 대답 대신, 물끄러미 루나시르네에게 시선을 줬다.

“……응? 나요?”

엘프 여왕의 시선을 받은 루나가 왜 자신을 보냐는 듯 의문 어린 눈을 했다.

* * *

미나스트림, 편히 미나스라 불리는 그는 전대 황제와 시녀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다.

태어난 순으론 솔라시우스 다음이었고 루나시르네보단 빨랐다.

그의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비밀로 치부되었다. 시녀였던 어머니는 미나스트림이 젖을 막 떼자마자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당시 황제의 정실이었던 텔미노아는 그런 미나스(미나스트림)의 존재를 알았지만 모른 척 넘어가 줬다. 2황후 옥타나를 상대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버지를 닮았고, 정통 황족을 상징하는 금발, 금안과 유년기부터 두각을 보였던 빛과 열의 권능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암묵적으로 1황자 솔라시우스가 죽었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용이 되었다.

1황후 텔미노아 또한 불쾌하긴 했지만 타당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별말을 하지 않았었다.

날이 갈수록 이지를 잃는 황제와 다음 날 눈을 뜨면 시체가 되어 있는 1황후의 사람들.

당시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나스의 쓰임은 솔라의 그림자가 되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그는 어릴 적 먼발치서 솔라시우스를 본 적 있었다.

아마 1황후와 1황자, 1황녀가 죽기 얼마 전이었을 것이다.

유년기의 미나스가 보았던 셋은 그렇게 눈부시고 부러울 수 없었다.

1황후 텔미노아의 미소 짓는 얼굴에는 근심이 깊게 서려 있었지만, 어린 미나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밝은 곳에서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이복 형님이 부러울 뿐이다.

‘나도 빛이 되고 싶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진심으로 1황자 솔라시우스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얼마 후, 1황후 텔미노아와 그녀의 두 자식이 처형당해 황궁 입구에 내걸렸을 때도 미나스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나스트림…… 아니, 솔라시우스! 지금부터 너는 솔라시우스다! 명심해라! 그리고 황궁에서 최대한 도망쳐라!”

그는 전대 황제이자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내린 명령 덕분에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공적으로 솔라시우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황궁에서 도망친 그는 제국의 시골 영지에서 몰래 제왕학과 검술, 마법을 배우면서 몸을 키울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솔라시우스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큰 포부를 품고 요정 숲까지 왔건만, 요정 숲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이에 황족 미나스트림은 속으로 불안, 초조했다.

“나는 마하 제국의 마지막 남은 정통, 1황자 솔라시우스요! 요정 숲의 요정들은 아낙시아의 맹약을 지키시오!”

그는 애써 불안한 내색을 숨기곤 몇 번째인지 모를 말을 외쳤다.

‘미치겠네!’

요정 숲에서 며칠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았다. 자신은 1황자 솔라시우스가 아니니까.

미나스트림은 자신의 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저항군과 그 저항군을 따르는 제국 유민들이 바글바글하다. 제일 선두에는 제국의 귀족들과 옛 황실 기사들이 기립해 있다.

‘찬탈자 세피로스는 아낙시아의 맹약을 어겼어. 진짜 솔라시우스는 죽었고, 1황녀 루나시르네도 죽었지. 그렇다면 다음 정통성은 내게 오는 게 맞을 텐데?’

한편으론 의아했고 억울했다.

‘엘프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역시 내가 사생아라서 그런 건가?!’

미나스트림의 눈에 서러움이 서렸다.

‘고작 어머니가 다르단 이유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미나스트림은 자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면 죽은 1황자 솔라시우스도 찬탈자 세피로스도 충분히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내게 필요한 것은 군세뿐이다!’

이를 악물었다. 금색의 두 눈으로 세계수 가호가 짙은 요정 숲을 응시했다.

건국 황제 마하 대제와 그분의 반려 하이엘프 아낙시아처럼, 자신 또한 하이엘프를 반려로 얻는 것이다. 강력한 요정 군단을 군세에 포함하여 찬탈자 세피로스를 무찌를 것이다!

‘제발 나와라! 제발!’

미나스트림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부디 저 숲에서 요정들이 나오길, 아낙시아와 같은 하이엘프를 반려로 삼고 자신과 함께 새 천 년의 전설을 써 주길, 선조 마하 대제와 세계수에게 빌고 또 빌었다.

“다들 조급해 하지 마시오! 장수종의 시간과 단명종의 시간은 다른 법이니!”

한편으론 서서히 의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달래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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