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82.
“나 또한 요정 숲으로 들어가겠소. 세계수로부터 계시를 받고 싶소.”
그런 로뮤의 심정을 모르는 미나스는 당당히 요정 숲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특히 세계수를 다짜고짜 보겠다는 미나스의 태도는 다른 엘프들의 표정마저 차가워지게 만들었다.
‘세계수를 말해서 반응이 굳은 건가?’
미나스는 갑작스레 굳은 엘프들의 표정을 모르지 않았다.
“다짜고짜 세계수를 언급한 무례를 사과하지. 하지만 시간이 없소! 상황의 급박함을 안다면 당신들도, 그리고 세계수 또한 이해해 주실 거라 확신하오.”
하지만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진정한 정통성을 챙기려면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로안이라는 황족은 이미 세계수가 시킨 일을 하고 있어! 내가 놈과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로안 샬루트라는 놈이 유독 걸렸다.
그가 두 눈과 심장에 경쟁심과 포부를 담자,
“아니, 방문하지 않아도 괜찮아.”
로뮤 옆에 있던 아름다운 여성 엘프가 불쑥 끼어들더니, 그런 미나스의 포부를 막았다.
“당신은……?”
미나스는 아까부터 시선이 가던 아름다운 여자 엘프를 보았고, 그 엘프는 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 나는 요정 숲의 여왕이자, 세계수의 대리자인 리리아 엘펜리트라고 해.”
“……!”
리리아가 자신을 소개하자, 미나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마하 대제와 아낙시아의 일화가 절로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 리리아를 반려로 맞이하는 상상이 벌어졌다.
‘하여간 인간의 상상력이란…….’
미나스의 표정만 보아도 리리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
“……세계수의 계시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에게 내리도록 할게.”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리고 준비했던 말을 건넸다.
“세계수의 계시!”
덕분에 미나스는 하이엘프를 반려로 두는 망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녀의 옥음을 통해 들린 ‘세계수의 계시’라는 단어만이 그의 머릿속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계시, 계시를 받겠소.”
처억, 털썩.
미나스트림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리리아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자, 뒤에 있던 기사들과 귀족들도 무릎을 꿇었다.
대륙의 여러 왕국과 백성들이 교단의 천상신을 믿는 것과 달리, 제국인들은 교단보다는 세계수를 더 신봉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국 건국 당시부터 내려온 아낙시아의 맹세 때문이다. 이는 서약 엘프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나누던 황족과 귀족일수록 더욱 짙었다.
그렇게 무릎 꿇은 인간들, 특히 제일 선두에 무릎 꿇은 금발, 금안의 청년을 내려다본 리리아는 생각했다.
‘비록 사칭자이지만 품고 있는 빛의 힘이 보통이 아니야.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진을 치고 있는 인간 군대에 향했다.
‘저 정도 군세면 못해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둘 다 좋은 전력이 되겠어.’
리리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툭툭.
그때 리리아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슬쩍 친다. 고개를 돌려 보니 루나가 뚱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리리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하라 제스처했고, 그녀의 허락을 받은 루나는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뭐 줄 거예요?’
루나는 방금 자신이 했던 연기와 협조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이런 자잘한 계산은 그때그때 정산하는 게 좋아요!’
한결같은 루나의 모습에 리리아는 가벼운 속웃음을 지었다.
‘뭐든지.’
요정 여왕은 눈웃음으로 뜻을 전했다. 로안에 대한 언급은 당황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론 더 좋은 방향으로 흘렀기에 기꺼이 응해 줬다.
‘돌아가는 동안 생각해 볼게요!’
루나 또한 눈웃음으로 답례했다.
리리아는 당돌한 1황녀와의 눈빛 교환을 마치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세계수 또한 이 세상이 드리운 어둠을 잘 알고 있다.”
여왕의 입이 열렸다. 요정어 억양이 짙은 대륙 공용어가 노래하듯 낭송된다.
휘이이잉.
엘프 여왕 주위로 송풍이 불었다. 그녀의 머릿결과 옷깃이 나부낀다. 황홀한 세계수의 꽃내음이 은은한 빛과 함께 퍼졌다.
생전 처음 보는 세계수의 계시에 미나스를 비롯한 인간들이 몽롱한 눈을 했다.
옆에 있던 루나 또한 이때만큼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감탄한다.
모두가 말없이 리리아의 입술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운명의 계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번쩍, 번쩍, 피이이익!
요정 숲에서 마법으로 보이는 신호탄이 연이어 쏘아졌다.
급박한 느낌이 나는 기다란 풀피리 소리도 연이어 들렸다.
“동쪽인가?”
이를 본 리리아가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진을 친 남쪽도 급히 살폈지만 별다른 소동은 보이지 않는다.
‘한곳에 힘을 집중해 세계수의 가호를 흔들 생각이군.’
사그라든 세계의 역사가 지금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그녀가 곧 온다는 뜻이겠지.’
제국군은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저게 계시야, 마하의 후손아.”
리리아는 손을 뻗어 미나스트림의 머리를 쓸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요정 숲의 동쪽을 가리킨다.
계시치고는 참으로 짧고 허무하다.
“요정 숲 동쪽으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이동시키겠습니다.”
그러나 명료하다. 미나스를 비롯한 귀족과 기사들의 눈에 투지가 타오른다.
그런 인간들을 리리아는 재밌다는 듯 관찰했다.
“참고로 세계수는 아낙시아의 맹세를 다르게 해석했어. 그분께서는 로안과 그대 중에서 새로운 태양검을 선택할 예정이야.”
그녀는 추가로 눈앞의 황족 청년을 더욱 자극할 말도 덧붙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는…… 솔라시우스! 황족들 중 가장 정당한 핏줄입니다.”
이에 미나스가 반발한다. 어떻게 다가온 정통성인데!
비록 그가 진짜 솔라시우스가 아니라 해도 이건 정당하지 못하다.
어찌 되었든 미나스트림은 전대 황제의 직계다. 1황자가 없을 경우 두 번째 순위가 되는 것은 확실했다.
비록 사생아라고 해도 전대 황제의 확고한 아들인 자신이 방계 황족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정당한 핏줄이라…….”
그런 미나스를 리리아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본다.
순순히 말을 잘 듣던 아이가 처음으로 반항한다.
‘어떻게 해야 말을 잘 듣게 만들까?’
리리아와 세계수의 생각은 최근 몇 달 사이에 크게 변해 있었다. 융통성 없고 거짓말 못 하는 기존의 엘프스러움을 버렸다.
둘은 인간과 비슷한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 멸망한 세계선의 기억과 후회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짧게 생각을 마친 리리아는 고개를 좀 더 숙이곤 미나스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밀접하자 미나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잠시 숨을 멈춘 미나스에게 리리아는 작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너…… 솔라시우스가 아니잖아.’
“!!!”
그녀의 말에 숨을 참고 있던 미나스는 정말로 심장이 멈출 뻔했다.
‘하지만 우린 상관없어.’
그의 심장이 멈추든 뛰든, 수명이 줄든 말든, 리리아는 속삭임을 이었다.
‘세계수가 내린 임무를 수행한다면 너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게 될 거야.’
예언에 가까운 엘프 여왕의 속삭임.
“……?!”
미나스는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묘한 희열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제가…… 제가! 세계수가 내린 임무를 이루면……!”
엘프 여왕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미나스의 눈동자에 욕망이 서렸다. 아름다운 암컷을 소유하고자 하는 수컷의 번식 본능이기도 하였다.
미나스가 눈에 뭘 품었는지 잘 알고 있는 리리아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이전의 하이엘프 리리아였다면 불쾌함을 느끼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애초에 사그라진 세계에서의 리리아는 어떤 의욕도 없었으니, 불쾌감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리리아는 달랐다. 이전 세계와 다르게 지금 이 세계는 태광휘라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녀는 단명종의 감정과 욕망까지 이용할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물론, 그녀는 단명종과 결합할 생각이 절대 없었다. 누구보다도 단명종과 장수종의 비극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태광휘 정도라면 모를까.’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단명종으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결코 단명종이 아닌 존재. 이 세상에서 하이엘프인 그녀와 유일하게 급이 맞는 수컷.
‘그러나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와의 결합은 단명종과의 결합보다 더 가능성이 낮다.
그랬기에 멸망한 세계수의 기억을 흡수한 직후부터 그녀는 솔라시우스를 향한 모든 이성적 호감을 지웠다.
‘희망 고문이지만 어쩔 수 없네? 이게 가장 피를 적게 흘리는 방법이니까.’
그녀는 인간의 번식욕과 명예욕을 자극하는 선에서 눈앞의 황족을 활용하기로 했다.
“군대를 이끌고 동쪽 결계로 가. 요정 숲의 숲길을 터 줄게. 유민들이 이곳에 머무는 것도 당분간 허락할게.”
세계수와 세계수의 대리자가 허락을 내리자마자, 요정 숲과 바깥을 막고 있던 결계 중 일부가 열렸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이에 미나스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검으로 성호를 그으며 맹세했다.
귀족들은 영주였을 적의 경험을 살려 군대와 유민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인간들의 군세가 하나의 생명체가 움직이듯 요동친다.
“나, 솔라시우스를 따르라! 새로운 천년 제국의 시작을 여는 거다!”
말에 올라탄 미나스가 우렁차게 외쳤다.
화아앗.
그의 검에서 눈부신 빛이 발현됐다. 검뿐만 아니라 머리와 어깨에서도 은은한 광휘가 흘렀다. 솔라시우스가 휘날리는 광휘보단 덜 했지만 군중을 압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왜 그토록 당당하게 솔라시우스를 사칭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와아아아아!
이를 본 귀족, 기사, 마법사,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챙겼다.
유민들 중에서도 싸울 수 있거나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거대한 행렬이 요정 숲 남쪽에서 동쪽으로 대하처럼 흐른다.
엘프 레인저들이 인간들의 기다란 행렬을 면밀히 감시했다.
혹시나 사특한 뜻을 품고 탈선하려는 자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럼 나도 동쪽으로 갈게. 세계수를 잘 부탁해, 리리아.”
대강 행렬이 잡히자, 요정 군단을 맡고 있던 로뮤가 리리아에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가. 명색이 여왕인데 가서 얼굴은 비춰야지. 잠깐이라도 말이야.”
리리아는 자신도 함께 갈 것을 밝혔다. 옥타나와 세계수가 걱정이지만 아직 시간은 있었다. 애초에 옥타나 정도 되는 존재가 가까이 오면 그녀가 모를 수 없다.
그렇게 함께 동쪽으로 떠나려는데.
“하이엘프 리리아! 큰일 났습니다!”
수목 도시 엘펜에서 급히 온 것으로 보이는 파수꾼 엘프가 다급한 얼굴로 리리아를 찾았다.
* * *
동쪽으로 이동하려 했던 리리아와 루나 그리고 로뮤는 급히 요정들의 수목 도시 엘펜으로 향해야만 했다.
도착한 엘펜의 중심부는 검게 그을어 있었다.
로뮤의 집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반경 50미터 정도가 크게 검게 되어 있었다.
“쥴리아!”
루나가 급히 쥴리아를 찾았다.
“언니……!”
엘븐나이트에게 억류당한 쥴리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루나를 맞이했다.
키에에엑!
푸르릉.
울먹이는 쥴리아 바로 뒤에는 흑마 맨카와 드레이크 시즈가 함께 있었다.
“피해 현황은?”
리리아가 엄한 눈으로 쥴리아를 억류 중인 엘븐나이트에게 물었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습니다. 부상자와 그은 집들이 좀 있을 뿐입니다.”
한 엘프 장로가 엘븐나이트 대신 여왕의 물음에 답했다.
“장로 아이지, 저 아이를 어떻게 할 거지?”
“사망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존재합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도시도 많이 훼손되었고요. 분명 불에 강한 목재로 지은 것임에도 이 정도 피해가 난 것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로뮤와 종종 트러블을 일으켰던 장로 엘프는 여왕의 질문에 차가운 눈으로 억류된 쥴리아를 보았다.
“원로회에선 당장 추방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저기 사령술을 익힌 마녀도 포함해서요. 저 어린 단명종도 이런 사고를 쳤는데, 이보다 더 큰 위험을 품은 마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장로의 눈동자가 루나를 혐오스럽다는 듯 훑고는 로뮤를 종점으로 찍었다.
“더불어 하이엘프 로뮤, 그대 또한 책임을 져야 하고.”
“…….”
장로의 차가운 시선에, 로뮤는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