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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83화 (83/212)

제83화

#83.

분위기는 이보다 더 차가울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냉각됐다. 이곳이 과연 온화한 수목 도시가 맞는지 의문일 정도. 체감 온도만 보자면 루한의 수도 윈테라보다 더 추울 것이다.

살벌하고 숨 막힐 것 같은 공기 안.

“죄, 죄송해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쥴리아는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음을 잘 알고 있었고, 아까부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일단 자세한 경과를 알고서 결정하겠다. 저 아이의 영혼은 깨끗해. 불의 기운으로 오히려 정화롭기까지 하지. 아무 이유 없이 시녀들을 공격했을 리가 없어.”

리리아는 여기까지 오면서 간략히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아이의 말대로라면 시녀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했지?”

“말이 안 됩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이에 장로 아이지가 반론한다.

“시녀들은 하나같이 저 단명종 아이가 갑자기 폭주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계수의 대리자시여, 우리 엘프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거짓말에 능숙하지요, 아이든 노인이든.”

“…….”

확신에 가득 찬 아이지의 말에 리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긴 머릿속에 또 다른 세계의 기억이 비쳤다.

그녀는 그 기억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곤 말했다.

“시녀들에게 안내해.”

그녀의 눈에 어떤 심증이 자리 잡았다.

시녀들은 도시 남쪽에 위치한 건물에서 요양 중이었다.

“여왕님…….”

“세계수의 대리자시여!”

그녀들은 리리아가 직접 문안 오자 황송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거라.”

그런 시녀들을 리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대했다.

말투 또한 평소 루나와 솔라에게 보인 친근한 말투가 아닌, 여왕의 딱딱하고 거리감 있는 말투였다.

시녀들은 크게 다치진 않았다. 팔이나 다리, 목 등에 화상을 입었지만 엘프들의 약초와 치료술로 조만간 상처 하나 없이 회복될 것이다.

“너희는 맹세코 이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나?”

리리아는 여기까지 함께 데려온 쥴리아를 가리키며 시녀들에게 물었다.

“……!”

쥴리아를 본 세 시녀는 아까의 공포가 되살아났는지 몸을 벌벌 떨었다.

“그……그렇습니다. 함께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시녀들 중 하나가 대표로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리리아는 이를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시녀 세 명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쳤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깊히 그들의 영혼을 살폈다.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가깝고 친숙한 것에는 의심을 잘 하지 않는다. 이건 단명종이나 장수종이나 비슷하다.

“…….”

그래서 지금 시녀들의 영혼을 유심히 보는 리리아의 얼굴엔 작은 경련이 났다. 충격과 안타까움이 그녀의 얼굴 위를 춤췄다.

하아.

얼마 후,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시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래, 너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다른 존재가 했구나.”

여왕의 말에 시녀들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고, 장로 아이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처억.

리리아는 그런 시녀들을 보며 조용히 손을 뒤로 숨겼고,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은밀하게 단검을 꺼내 잡았다.

그리고 서거걱, 서걱, 서억.

눈으로도 쫓기 힘든 속도로 시녀 셋의 목을 베었다.

“미안하구나.”

짧은 사과와 함께, 세 엘프는 자신이 죽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곤 평온한 표정으로 즉사했다. 눈 또한 감지 못하고 경직된 시체가 되었다.

“대리자시여, 이……이게 무슨!”

이에 장로 아이지가 경악해 외쳤다. 장로뿐만 아니라 루나와 로뮤 그리고 쥴리아 또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비명 지르듯 소리를 지른 아이지를 리리아가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

여왕의 차가운 시선에 장로는 그녀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이어서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영혼과 뇌 속을 파고드는 그녀의 눈빛에 소름이 돋고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꿀꺽.

혹시나 자신 또한 저 시녀들처럼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매우 불안했다.

시녀들을 응시할 때와 비슷한 시간이 지나고.

“장로는…… 아쉽게도 아니군. 그냥 꽉 막힌 노인네에 불과했어.”

장로 아이지를 살핀 리리아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늙은 엘프는 이유 모를 안도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저들은 흑마법에 오래전부터 침식되어 있었어. 기생체에 뇌를 먹힌 셈이야. 특정 상황이 되면 기생체의 자아가 활동하는 형식이지. ……따로 분리하기엔 너무 늦었고.”

죽은 시녀들을 보는 리리아의 어조는 무심함에 가까웠다.

“……!”

그 모습에 아이지는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여왕이…… 여왕이…… 변했다! 아니, 세계수가 변한 건가?!’

평소라면 어떻게든 반박했을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침묵했다. 양손과 어깨를 벌벌 떨면서.

그는 눈동자를 힐끔 돌려서 목이 잘린 3구의 시신을 보았다. 흑마법에 당했다고? 정말인가? 하이엘프는 아니지만 장로급 엘프인 자신이다. 영혼을 느낄 줄 아는 그였음에도 저 시녀들에게서 이상한 냄새를 맡지 못했다.

‘여왕은 여차하면 나 또한 죽이려 들었어…….’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아쉬움 가득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캄캄했다.

이러한 리리아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장로 아이지만이 아니다.

루나와 로뮤, 쥴리아 또한 바짝 얼었다.

‘우리 엘프 여왕님…… 한 성깔 하잖아? 버릇없게 구는 것도 적당히 굴어야겠다.’

루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리리아도 변했군.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건가?’

로뮤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쥴리아는 갑작스러운 살육에 어깨를 벌벌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일 뿐이다.

차가운 침묵이 공간을 채운 지 20초 정도 지났을 때, 죽은 시녀들을 향한 묵념을 마친 리리아가 고개를 들곤 입을 열었다.

“쥴리아, 곧 저 시녀들에게서 무언가가 흘러나올 거야. 너의 화염으로 정화해 주렴.”

완전히 굳은 병실 내에서 리리아는 유일하게 미소 지으며 쥴리아에게 부탁했다.

요정 여왕님의 말에 쥴리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뜨더니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겁을 먹든 말든 리리아는 개의치 않고 시녀 셋의 시신을 살폈다. 주위에 있던 이들 또한 그녀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숨을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진짜로 몇 초 뒤.

스스스스슷.

죽은 시녀의 입, 코, 귀에서 검은 액체 같은 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여 새로운 먹잇감을 노리려 들었지만.

화르르르륵.

기다렸다는 듯이 쥴리아가 발현한 화염에 정화되어 이루지 못했다.

“저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흑마법이…… 맞긴 한 겁니까?”

이를 본 장로 아이지가 리리아에게 물었다. 속으론 여왕이 이유 없이 살생을 한 게 아니라고 안도하면서.

“어쩐지…… 아무리 선배님이라고 해도 너무 쉽게 세계수 안으로 오셨다 했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셨구나? 이런 식으로 말이지.”

장로의 물음에 리리아는 대답은커녕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재가 되어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기생체의 잔해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다.

“괜찮다, 쥴리아야. 네 잘못이 아니야.”

이어서 그녀는 막 정화의 화염을 펼친 어린 인간 소녀를 안아 들었다.

아이의 붉은 머릿결을 리리아의 희고 고운 손이 쓰다듬었다.

“네 덕분에 그녀가 심어 놓은 첩자를 색출할 수 있게 되었어. 아마도 저 기생체들은 네가 품고 있는 정화의 화염을 큰 위협으로 인지한 모양이구나.”

리리아는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어린 소녀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

여왕님의 칭찬에 쥴리아는 괜히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살육으로 아직 아이의 얼굴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리리아의 손길 덕분인지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그녀요?”

그런 쥴리아와 리리아를 보던 루나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방금 요정 여왕이 언급했던 ‘그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응? 뭐가 말이니?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방금 그녀가 첩자를 심었다고…… 그 전에는 선배님이라고…….”

“잘못 들었겠지?”

루나의 질문에 리리아가 대답을 피했다.

이 자리에는 루나뿐만 아니라 로뮤와 장로 아이지도 있었기에 충분히 우길 수 있었다.

“그, 그런가……?”

왠지 루나는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이는 함께 있던 로뮤와 장로 또한 마찬가지라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변한 거 같네?”

그런 침묵 속에서 오직 리리아만 평화로울 뿐이다. 그녀는 품 안에 쥴리아를 들어 안고서 아직까지 내려놓지 않았다.

“요정 숲 동쪽으로는 로뮤와 리나만이 가야 될 거 같아. 나는 지금 바로 세계수 앞에 가야겠어.”

리리아의 말에 로뮤와 루나는 이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던 루나는 한편으론 쥴리아가 걱정돼 물었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있을게.”

리리아가 품 안에 안은 쥴리아를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여왕님이라면 안심이지요.”

리리아가 쥴리아를 데리고 있어 주겠다고 하자 루나는 납득했다. 저 어린아이를 전장에 데려갈 수도 없을뿐더러, 아까처럼 도시에 홀로 남겨 두기도 불안했다. 차라리 부담스럽더라도 리리아가 데리고 있는 게 안심이다.

“여왕이시여, 저 아이를 세계수 앞에 두시겠다는 겁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이에, 어쩐 일로 조용하던 아이지가 급히 나섰다. 두려움과 별개로 세계수와 엘프 일족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괜찮아, 장로.”

꽉 막히고 오만과 편견에 빠진 늙은이라고 해도 충성심만큼은 진짜이기에 리리아는 아이지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아이의 화염은…….”

“이는 세계수의 뜻이기도 해.”

장로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자, 그녀는 세계수를 방패로 삼았다. 요정 숲에서는 치트키에 가까운 말.

“……알겠습니다. 세계수의 뜻이 그렇다면…….”

그 말에 아이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함 가득한 눈으로 쥴리아를 보았고, 그러다가 리리아의 경고 어린 시선을 받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벌벌벌벌.

장로라는 위치에 맞지 않게 양발과 양손을 벌벌 떨었다. 한시라도 여길 나가고 싶었다.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로뮤와 루나는 바로 동쪽 결계와 이어진 도시의 공간 이동 마법진에 올랐다.

전선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리리아가 직접 배웅 나왔다.

“로뮤, 절대 무리하지 마, 절대로!”

그녀는 같은 세계수 열매에서 태어난 혈육 로뮤에게 누누이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전장에서 그게 마음대로 되나?”

누이의 말에 로뮤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

그런 로뮤를 리리아는 말없이 응시할 뿐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픔과 걱정이 서렸다.

리리아는 사그라진 세계수의 기억에서 로뮤의 최후를 보았었다.

수인족 파괴왕 가오이와 에이션트 엘프 로뮤의 악연은 요정 숲에서부터 시작된다.

수인족이 제국군과 연합하여 처음으로 침략한 곳이 바로 요정 숲이었으니까.

요정 숲에서는 세계수 가호를 입은 로뮤가 가오이를 압도했었고, 솔라시우스와 함께 적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훗날, 엘프들이 인간들의 땅으로 파병 나와 싸울 때는 반대였다.

-세계수 가호 밖에서는 확실히 힘이 딸리는군. 하하하, 요정 숲에서 상대했을 때와 전혀 달라…….

로뮤는 솔라시우스를 도와 인간 땅에서 제국군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사천왕 중 하나인 파괴왕 가오이와 다시 한번 대결을 벌인다.

그리고 전사한다.

-쿨럭, 로안……! 이걸 가져가라. 지금까지 내가 조사한 것들이다. 이걸로 네 동생 루나시르네를 찾아……!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로뮤가 이전 세계의 솔라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는 장면이 노을과 함께 드리운다.

-노아…… 미안하구나…… 노아…….

그가 숨을 거두면서 작게 흘렸던 말이 송풍을 타고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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