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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84화 (84/212)

제84화

#84.

이전 세계에서 보았던 로뮤의 최후.

비록 이제는 완전히 별개가 되어 버린 두 세계선이지만, 리리아에겐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로뮤는 그 수인족 왕을 상대하러 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엔 솔라시우스도 없다. 대신 루나시르네가 있지만.

세계수의 가호가 짙은 요정 숲 인근에서 싸우는 것이지만, 지금의 적도 사그라진 세계선의 적보다 더 강하다.

“…….”

리리아는 로뮤를 향해 말없이 시선을 보냈고, 그를 향한 누이의 시선에선 걱정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미안함’이라는 감정도 얼핏 보였다.

“……알았어. 최대한 조심하지. 특히 육탄전은 가능한 한 피하겠어.”

리리아의 침묵과 걱정 담긴 눈빛을 받은 로뮤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리리아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를 전해 들었기에, 육탄전을 지양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루나시르네, 로뮤를 잘 부탁해.”

하지만 로뮤의 다짐에도 마음이 안 놓인 리리아는 로뮤 옆에 있던 루나시르네의 손을 잡으며 진심으로 부탁을 했다.

“걱정 마세요! 보상이나 잘 준비해 주세요.”

리리아의 진심 어린 부탁에 루나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

그런 루나의 모습을 본 리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히곤 루나의 머릿속으로 자신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루나, 예감이 좋지 않아. 세계수를 통해 로뮤가 수인족 왕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았어.]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말하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

그런 리리아의 텔레파시에 루나는 눈을 크게 뜨더니 옆에 서 있던 로뮤를 급히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의 리리아를 보았다.

“맡겨 주세요! 반드시 제가 지킬게요!”

전보다 더 진지하고 무거운 루나의 눈빛. 리리아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 * *

설원의 권능을 완전히 흡수한 예나체리나는 명실상부 설원의 대마녀가 되었다.

아직 왕위는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지만, 루한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녀에게 있었다.

설원의 권능을 흡수하는 데 역대 여왕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꼬리표는 오히려 나중에 훈장이 되었다.

인내가 쓴 만큼 열매는 달다고, 예나체리나의 설원의 권능은 역대 여왕들 중 가장 찬란했다.

이는 루한의 자랑이었고 루한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모두가 최초의 설원의 대마녀 ‘베아트리체’ 이래, 가장 강력한 대마녀의 탄생을 고대했다.

하지만 그런 공주를 둔 루한의 백성들과 그런 딸을 둔 루한의 여왕에게 의외의 근심이 하나 있었으니.

“도대체 왜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냐!”

바로 예나체리나가 결혼을 계속해서 거부 중이라는 것이다.

“하지 않겠다고는 말 안 했습니다, 어마마마.”

몇 번째인지 모를 여왕 카르세리나의 잔소리에 예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다.

“나는 이제 모르겠구나……. 네 마음에 차는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여왕 카르세리나는 두통이 오는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

옆에선 루한의 국서이자 예나의 아버지가 말없이 그런 딸을 바라볼 뿐이다.

“……존재합니다.”

자신을 답답하게 쳐다보는 부모님을 향해 예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예나, 너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 하고도 다섯이다. 설원의 계승을 마친 네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고 있고.”

여왕과 국서는 공주의 투덜거림을 못 들었는지 마저 말을 이었다.

“너를 도와줬다는 그 남자를 찾는 네 심정은 알겠지만, 이제 슬슬 포기할 때가 된 거 같구나…….”

이번엔 머리를 짚으며 눈을 꾹 감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타이르듯 말했다.

“…….”

아버지의 말에 예나체리나는 주먹 쥔 손에 힘을 줬다. 한쪽 손목에 언제나 차고 있던 녹색 나뭇잎 팔찌가 느껴졌다.

그녀가 설원의 권능을 완전히 흡수하고서 10년이 흘렀다.

그 10년 동안 예나는 매일매일 그 남자를 기다렸다.

이번엔 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길 바랐다. 시간 여행자가 아닌, 그녀의 시간대에서 만나길 바랐다.

왕국 전역을 여행하는 수행을 다니면서도 금발, 금안의 남자를 유독 찾았다.

오죽하면 몰래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도 여행을 해 봤을 정도였다. 설원의 대마녀가 되었기에 루한에서 그녀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제국으로 가서 신분을 숨기곤 여러 황족을 만났었다.

하지만 끝내 그 남자는 만나지 못했다.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쭉 제국에 머물며 그를 찾고 싶었지만, 오래 못 있고 돌아와야만 했다.

설원의 대마녀가 루한에 오래 벗어나 있으면 설원의 가호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제국 황족 중에도 회색 마검을 지닌 황족은 없다고 들었다. 다른 왕국에도 수소문해 봤지만…….”

예나는 자신을 향해 아까부터 타이르듯 말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반드시 나타날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의 허리에는 국서의 검이기도 한 윈테이라가 있었다.

‘그 사람이 허리에 찼던 검도 국서의 검이었어.’

예나체리나가 끝까지 결혼을 거절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솔라가 찼던 검을 떠올렸다. 천으로 꼼꼼히 감겨 있던 허리춤의 검을 기억했다. 그 천 사이에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낸 푸른색 수정을 알았다.

그건 분명 국서의 검 윈테이라였다. 예나는 그 이름 모를 남자가 미래에 만날 자신의 반려라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무수한 국서 후보를 거절해 왔다.

예나가 과거 자신을 구해주고 도와줬다는 금발, 금안의 남자를 찾는다는 사실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잘 알았다.

루한의 여왕 카르세리나는 루한의 역량을 총동원해 루한은 물론 인근 왕국까지 금발, 금안의 국서 후보를 데려왔지만, 예나는 그때도 거절했었다.

‘난 그 사람의 냄새를 기억해.’

그녀는 며칠 동안 솔라와 함께 설원의 권능을 조절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서 나는 마나의 냄새를 기억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소개해 준 금발, 금안의 남자들에게선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보고 싶은데…….’

너무 걱정됐다. 이름은 모른다. 목소리도 모른다. 황족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가 제국을 몰래 돌면서 만난 황족들에게서도 같은 냄새를 풍기는 남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도 네 어머니도, 네가 사랑하는 남자와 만나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오래 기다려 줄 수는 없단다.”

“네, 아바마마.”

어느덧 끝나 가는 아버지의 설교에 예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1년! 딱 1년만 더 주겠다. 그 이후에는 강제로 혼인을 진행시킬 거야!”

그런 딸을 보다 못한 여왕은 감았던 눈을 뜨면서 통보하듯 외쳤다.

“……네, 어마마마.”

예나는 짙은 막막함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해야 했다.

시간은 계속 쭉 흘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이 말했던 1년은 지난 지 오래, 예나의 나이는 어느덧 서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영체지만 그건 예나에게만 해당되는 것, 그녀의 주변인들은 하나둘씩 노쇠해졌다.

“예나……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 부디 결혼을 해다오. 손녀를 보고 죽는 것이 이 어미의 소원이다.”

예나의 어머니이자 루한의 여왕이 병석에서 눈물로 호소했다.

“베아트리체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고 싶어……. 그래야 안심하고 선대 마녀님들을 뵐 수 있을 거 같아……. 미안하구나…….”

설원의 계승을 끝내면 그때부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다. 심지어 강한 상실감 때문에 더 빠르게 노쇠해진다.

“……!”

그 남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예나에게도 눈앞의 노쇠한 어머니의 모습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카르세리나는 어느 순간부터 순식간에 노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예나…….”

그런 어머니를 옆에서 간호하는 아버지 또한 많이 늙었다.

‘어째서……!’

노쇠한 부모님을 차마 더 볼 수 없었던 예나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결국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예나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마마. 루카스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 남자의 흔적을 찾아, 그 남자와 가장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남자를 골랐다.

비록 금발, 금안은 아니지만 저 루카스라는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는 그녀가 그동안 보아 왔던 남자들 중에 그와 가장 비슷한 느낌이었다.

예나체리나가 국서 후보를 마침내 정하자, 루한 전역이 기다렸다는 듯이 혼인식 준비를 진행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결혼식 전날이 되었다.

예나체리나는 적막한 왕궁의 밤하늘 아래서 정원을 거닐었다.

한시도 빼지 않았던 녹색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는 멍하니 과거 성장통을 겪었던 공터를 걸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을 재방문했는지 모를 장소.

혹시나 그가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그가 나온다면…….’

그렇게 오늘도.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공터로 향했을 때.

“!!”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공터 중심부에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복면을 썼으며, 등과 허리에 검을 찬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 세상에서 다시 시야가 암전되고 빛이 찾아왔다. 솔라와 루시는 다시 루한의 왕궁으로 이동했다.

왕궁에 도착한 솔라는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밤이다.

‘…….’

루시는 그저 멍하니 솔라의 행동을 구경할 뿐이다.

방금까지 솔라에게 취조 아닌 취조를 당한 상태라서 그녀의 정신은 더욱 피폐했다.

‘나를 섭정 루카스가 보낸 국서의 검이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끝끝내 마검의 에고가 여왕 루시푸르네라는 사실은 숨겼다.

섭정 루카스가 솔라시우스를 감시하고 돕기 위해 자신의 검을 멀리 보냈다고 변명했다.

솔라는 그녀의 말을 신뢰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은 넘어가 줬다.

‘하지만……! 지금까지 윈테이라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추태를 부렸는데! 절대 말 못 해!’

그러나 이 부분은 루시 또한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루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솔라시우스는 그저 묵묵히 자신이 선 장소를 둘러볼 뿐이다.

‘얼마나 흐른 거지? 장소는 왜 여기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왕궁은 그 전통과 아름다움에 맞게 잘 변하지 않으니까.

이동한 장소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의식이 진행되던 왕궁의 공터였다.

‘훗날 이곳에서 예나체리나와 루시푸르네의 설원의 계승식도 진행될 터.’

그렇게 눈앞의 공터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려 할 때였다.

“당신……! 당신!!”

불현듯 그의 귀에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당신! 왜, 왜……! 이제야 온 거예요?!”

그곳에는 청은발에 사파이어 눈동자가 아름다운 성숙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어마마마…….’

루시는 솔라를 바라보는 어머니 예나체리나의 울먹이는 얼굴을 보며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

솔라시우스 또한 편치 못한 마음으로 재회에 임했다.

“15년! 15년이나 지났어요! 그날로부터…….”

예나체리나가 그에게 달려들 듯 다가오며 외쳤다.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어디 갔다가 이제 오냐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솔라에게 안기듯 다가온 그녀가 주먹으로 남자의 가슴을 때린다. 문 두들기듯이.

‘스킵이 많이 됐군. 그때 재상을 처리해서 그런가?’

자신의 가슴을 때리는 예나를 보면서 솔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작에서는 성장통을 끝내고 2년 후에 바로 예나와 재회한다.

설원의 계승을 완전히 마치게 되면, 설원의 대마녀는 자신이 다스릴 왕국 전역을 둘러보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예나는 그 수행 중에 옥타나와 재상의 습격을 받아야만 했다.

원작의 솔라시우스는 그 습격에서 예나체리나를 수차례 도와야 했고, 그 원작에서의 플레이를 통해 태광휘는 예나체리나라는 캐릭터에 애정을 느꼈었다. 이는 아마 예나체리나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런데 왜 나를 기다린 거지?’

하지만 이번 회차는 아니다. 적어도 예나는 아니어야 한다.

솔라는 아쉬움과 함께 의아함을 느꼈다.

지금은 원작에서의 과정이 모두 스킵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예나체리나가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애정을 가질 이유가 있던가?

“저, 결혼해요! 내일 결혼한다고요. 이봐요! 왜 아무 반응이 없죠? 안 말려요? 안 말리냐고! 나쁜 놈! 나쁜 새끼!”

예나는 이제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엉엉 눈물을 흘렸다.

그나마 이 장면은 원작 플레이 때와 비슷했다. 그때도 서른이 다 돼 가도록 예나는 결혼을 미뤘었지. 솔라가 이동한 시간대도 결혼식 전날이었고.

“이 검! 이 검…… 정체가 뭐죠?!”

덥석!

“이건 분명! 내가 아주 잘 아는 검이라고요!”

한참을 엉엉 울던 예나는 불쑥 솔라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쥐었다. 시공간의 차이로 제대로 만져지지 않음에도 있는 힘껏 잡았다.

‘어, 어마마마!’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손길에 루시는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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