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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85화 (85/212)

제85화

#85.

‘이 검에 대해 눈치챈 것이군.’

천으로 가렸지만 용케도 알아본 모양. 짐작은 했었다. 그때도 그녀는 유독 허리춤의 이 검에 시선을 뒀었으니까.

‘루시의 말에 따르면 이 검은 대대로 루한의 국서가 소지하던 검이라고 했으니까. ……나를 미래의 남편으로 오해했었군.’

솔라는 왜 예나체리나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기다렸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이 천으로 가린 검! 제가 아는 그 검이 맞죠?!”

예나는 솔라의 검을 양손으로 잡고는 억지로 천을 벗기려 들었다. 하지만 시공간의 차이로 이뤄지지 못했다.

부질 없는 짓이다. 그런 예나를 말리려고 그가 손을 막 손을 뻗을 때.

파아앗!

마검 윈테이라의 손잡이에서도 빛이 났다.

“……!!”

그 빛과 함께, 예나의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들이 흘러온다.

자신을 쏙 빼닮은 청은발에 파란 눈동자를 한 소녀가 보였다.

어린 소녀의 팔에는 지금 자신이 끼고 있는 녹색 팔찌가 있었다.

그 소녀 뒤에 서 있는 미래의 자신이 있었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그녀 옆에는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있었다.

이어서 장면이 전환되었고, 자신의 딸로 추정되었던 소녀는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그 여인 곁에는 금발, 금안의 남성이 서 있었다.

기사 제복을 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금색 눈으로 자신의 딸을 보았고, 자신의 딸 또한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그 남자를 올려다본다.

그 장면을 끝으로 예나의 시야가 검게 변했다가 밝아졌다.

“아아……!!”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리고 멍하니 자신 앞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어 어안이 벙벙할 뿐.

“그러니까…… 당신은…….”

“…….”

솔라는 예나체리나가 무엇을 보았는지 자세히 모른다.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다.

“그랬군요……. 그랬어……. 나는 지금까지…….”

예나체리나는 솔라의 침묵 아래서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모르지만 오해가 풀린 거 같군.’

솔라는 멍하고 허탈해 하는 예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기실에서 루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어.’

이 부분은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서 솔라시우스는 애초에 마검 루시를 지니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울고 있던 예나를 두고 바로 사라졌었지.’

지금처럼 예나가 마검을 만지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 때와 달리 상황적 여유를 느낀 솔라는 기감을 펼쳐 공터를 훑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재상은 그때 죽였지만 악황제는 아직이다.

‘저기서 보고 있었군. 이건 몰랐는데 말이야.’

공터 외곽의 벽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한 남성이 보였다.

‘저 남자가 예나체리나의 남편이자, 루시푸르네의 아버지.’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마법사는 심란한 눈으로 자신과 예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급히 장소를 벗어났다.

원작에서도 있었을 일이지만 지금에서야 보게 된 장면.

솔라는 이상하게 루카스에게 미안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

솔라는 이 공터를 관찰 중인 또 하나의 시선을 더 인지했다.

시선과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기감을 집중했다.

“……!!”

그리고 뜻밖의 존재를 발견하고 미간을 굳혔다.

‘재상? 재상이 살아있었나?’

바로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다. 그녀는 전에 보았을 때와 다르게 후드도 쓰지 않고 회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대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는 루한의 재상으로 등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솔라가 갑자기 어딜 보는 거지? 표정은 왜 저렇게 심각해졌고?’

솔라의 시선이 어디론가 크게 향한 것을 본 루시,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간 방향으로 기감을 집중했다.

‘말도 안 돼……!’

얼마 안 가 재상 아리아 데스모를 발견하곤 경악했다.

‘설원의 계승식이…….’

‘…….’

악황제만 대비하면 될 줄 알았던 솔라와 루시에게 이는 되살아난 난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작의 솔라와 이를 플레이하던 나는, 재상의 정체를 알지 못했어.’

예나체리나를 공격했던 정체불명의 마녀는 악황후 옥타나로 추정했었다.

세계수를 몰래 타고 온 미래의 옥타나가 과거의 옥타나와 함께 일을 꾸민 정도로 알았었지, 루한에, 그것도 재상씩이나 되는 고위층이 첩자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무슨 짓을 꾸미려나?’

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솔라와 루시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원작 때보다 더 오래 예나체리나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살포시 예나체리나를 안고서 그녀의 머리와 어깨, 등을 토닥여 줬다.

함께 공터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여전히 훌쩍이는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이 또한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예나체리나가 울음을 거의 그쳤을 무렵, 세상이 다시 회색으로 물든다.

시야가 잠시 어두워졌다가 이내 익숙한 회색 공간으로 전이됐다.

회색 아공간에 들어선 솔라가 루시를 찾았다.

“루시.”

이 마검의 본래 이름은 루시가 아닌 윈테이라지만 이미 루시가 익숙해진 솔라는 계속해서 루시를 고집했다. 이는 윈테이라와 동기화 중인 그녀도 마찬가지였고.

[……말해라, 로안 샬루트.]

루시는 이제 반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솔라의 부름에 응했다.

“아까 너에게서 빛이 나던데?”

[그녀에게 미래 중 일부가 보였었다.]

“어떤 미래?”

설원의 계승식과 관련된 미래라면 편할 텐데.

[예나체리나…… 그녀의 남편과 딸이 함께 있는 장면이었다.]

루시는 미래에 자신과 솔라가 함께 있는 장면도 말할까 하다가 관뒀다.

“그런가? 그 외 다른 건 없고?”

[아쉽게도 재상이나 설원의 계승식과 관련된 정보는 없었어.]

“그렇군…….”

좋다 말았네. 솔라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왜 그녀가 쉽게 자신을 포기했고, 왜 그런 허망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다가 문득 현 루한의 국서 루카스에 대해 궁금해졌다.

“네가 기억하는 루카스는 어떤 사람이지?”

태광휘는 루한의 국서 루카스에 대해 잘 모른다. 국서의 검 윈테이라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애초에 예나체리나의 부모를 멀리서 보는 것도 원작 플레이에선 없었다.

먼발치서 자신과 예나를 훔쳐보던 루카스를 직접 본 것도 태광휘로 이 세계에 강림한 지금에서야 보게 된 것이다.

게임에서는 일러스트는커녕 인게임 그래픽으로도 보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그저 스크립트로 어쩌다 잠깐 언급된 수준.

“여왕 루시푸르네의 아버지이자, 루한의 국서, 그리고 너의 전 주인 루카스에 대해서 말해 봐.”

그래서 솔라는 루카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 루한의 국서…… 루카스 말인가? 으음…….]

느닷없이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루시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지금 루한의 섭정을 맡고 있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회귀한 그녀가 아버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아버…… 루카스 공은 훌륭한 마법사이자, 좋은 국서였다.]

“루시, 너에게는?”

[나…… 말인가?]

“그래.”

마검 루시를 바라보는 솔라의 눈빛이 진득하다.

[……좋은 분.]

루시는 무수한 의미를 담아 간신히 답했다.

“그렇군.”

그녀의 대답에 솔라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회색으로 가득 찬 대기실이 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그 뒤를 빛이 쫓았다.

솔라는 다시 루한의 왕궁으로 소환됐다. 이번에는 공터가 아닌 정원이었다.

그는 정원을 걸었다. 기시감이 강하게 왔다. 원작과 비슷하다.

정원을 걷는데 누군가가 보였다. 정원사로 보이는 남자였다.

평범해 보이는 복장과 외모와 다르게, 남자의 얼굴과 자세는 심상치 않았다.

“후욱…… 후욱…….”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고. 몸에서는 검은 기류가 물씬 풍겼다. 루한의 재상 아리아 데스모가 심어 놓은 암살자다.

설원의 가호 중심부에서 암살을 기획한다는 것은 눈앞의 남성이 조종받고 있거나,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손에는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는데, 마도구로 보였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강렬한 저주를 인챈트한 마도구 같았다.

터업, 화아아앗!

솔라는 망설임 없이 그 암살자를 붙잡고는 태양 이능을 발현해 태워 없앴다. 암살자가 지니고 있던 마도구 또한 함께 태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별다른 소음도 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뜨듯한 열기와 그을린 흔적만이 정원에 나돌 뿐이다.

솔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변을 정돈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왔네요?”

정원을 거닐던 솔라의 시야에 어떤 여인이 보였다. 청은발의 여인, 예나체리나다.

여왕으로 즉위했는지 그녀의 머리에는 월계수 모양의 왕관이 쓰여 있었다.

추가로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있었다. 배도 부풀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반겼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성숙해져 있었고 여유와 기품이 느껴졌다.

“…….”

솔라는 예나체리나를 담담히 응시했다.

“저…… 결혼했어요. 여왕으로도 즉위했고요.”

예나체리나는 담담한 그의 눈동자에 맞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반지 낀 왼손으로 자신의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목에 찬 녹색 팔찌가 흔들렸다.

“전 사실 당신이 미래의 제 남편인 줄 알았어요. 그 검이 아니더라도요. 당신은…… 저에게 첫사랑이었으니까요.”

-전 사실 당신이 미래의 제 남편이 될 줄 알았어요. 당신은 저에게 첫사랑이었으니까요.

원작의 스크립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솔라시우스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네요.”

-하지만 이제 보니까 아니었네요.

과거의 스크립트와 현재의 목소리가 겹쳐서 전달됐다.

“그 검은 저를 위한 게 아니었죠. 또 지금은 마음이 변했고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건…… 그리움에 가까워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랄까?”

-지금은 마음이 많이 변했어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지만, 옛사랑에 가까워요.

대사는 바뀌었지만 몸짓은 똑같다. 그녀는 녹색 팔찌와 결혼반지를 낀 손으로 자신의 부푼 배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배를 쓰다듬던 그녀가 문득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멀리 보이시나요? 제 남편, 루한의 국서 루카스예요.”

저 멀리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한 남자가 보였다. 원작에선 모니터 화면의 한계로 보지 못했던 각도. 지금은 볼 수 있었다.

“참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처럼 따듯하고 뜨거운 사람.”

예나는 루카스를 향해 사랑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루카스가 정원을 거닐다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던 예나를 발견했다. 그가 손을 흔들며 만삭의 아내를 향해 뛰어온다.

그렇게 서서히 가까워지자, 루카스는 그녀 뒤에 선 어떤 남자를 보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걸음이 멈췄다.

루카스의 반응을 본 예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응? 또 사라졌네?”

하지만 언제 사라진 것인지. 그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한결같은 만남과 헤어짐에 예나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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