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86.
다시 한번 암전됐던 그의 시야가 밝아졌다. 이번엔 회색 아공간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다.
장소는 이번에도 루한의 왕궁.
다른 점이 있다면 바깥이 아닌 실내였다.
왕궁 내부의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마치 공주님이 지낼 것 같은 고귀한 방.
실제로 방 안에는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요람이 있었다. 그 요람 안에는 갓난아기가 자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녹색 나뭇잎 팔찌가 쥐여 있었다.
‘루시푸르네.’
‘이 아이가 나……?’
솔라와 루시는 이 아기가 루시푸르네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또각, 또각, 또각.
멍하니 요람에 누운 루시푸르네를 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솔라는 방구석의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 후 유모로 보이는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 하아…….”
그 유모는 전에 보았던 정원사와 마찬가지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유모는 검은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스으윽.
이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곤 냅다 루시를 향해 내리꽂으려 했다.
덥석, 서걱!
솔라는 그 즉시 커튼 밖으로 튀어 나가 그 유모의 심장을 찔렀다.
쿠웅.
심장을 찌르고 바닥에 시신을 내던지자마자.
타다다다닷.
문밖으로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허억, 허억…… 하아……!”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예나체리나.
그녀는 요람 앞에 까만 피를 흘리고 쓰러진 유모를 한번 보고, 담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하아……!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나는 솔라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짧은 감사 인사지만. 어떤 감사보다 진심과 무게가 담겼다.
감사의 인사를 건넨 예나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솔라를 맞이했다.
그녀는 마법으로 시체를 구석으로 치우곤, 오래전에 헤어진 절친을 다시 만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예쁘죠? 아이 이름은 루시푸르네예요. 줄여서 루시라고 부르고요. 그…… 제게 주셨던 팔찌는 루시가 좋아하는 거 같아서 물려줬어요. 괜찮죠?”
솔라는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된 예나체리나와 갓난아기 적의 루시푸르네를 번갈아 보았다.
요람에 누워 평화롭게 잠든 루시. 그런 딸을 바라보는 예나의 눈은 거룩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
[…….]
어머니의 얼굴을 한 예나체리나는 마치 여신처럼 고결해 보였기에 솔라와 루시는 그저 멍하니 눈앞의 여인을 바라볼 뿐이다.
시체를 구석에 둔 괴상한 평화가 몇 분 정도 흘렀을까.
타다다닷.
“부인, 루시!”
저 멀리서 루카스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예나의 발걸음 소리처럼 다급해 보였다.
“괜찮……!”
루카스는 급히 루시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왔고, 그곳에 예나와 함께 서 있는 남자를 얼핏 보았다.
“……!”
하지만 그 남자는 루카스의 시야에 전부 담기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후로도 솔라는 몇 번이나 더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이는 원작 플레이 당시와 매우 흡사했다.
이때부터 그는 주로 어린 루시 곁에 나타났다. 암살과 저주의 위험에 처한 어린 루시를 솔라는 뒤에서 몰래 도왔다.
[…….]
루시는 그런 솔라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어렸을 적. 이토록 많은 위기가 있었고, 그런 그녀를 미래의 솔라가 구해 줬다는 사실에 뒤늦은 충격이 일었다. 이 충격은 감격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루시는 점점 자랐다.
루시가 성장했다는 것은 어느덧 설원의 계승식이 다가왔다는 것을 뜻했다.
* * *
요정 숲 동쪽 결계로 무수한 병력이 집결 중이다.
세계수의 가호를 입은 엘프들은 볼카 요새 때보다 더 강한 면모를 보여 줬고, 제국에서 뛰쳐나온 저항군 또한 드높은 사기로 자신들의 몸을 방패처럼 채웠다.
“저게 수인족 군대인가?”
“뭔가 더 포악해진 것 같군.”
제일 선두에서 방패를 세운 인간 기사들이 눈을 떨었다.
저편,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에서 거대한 살의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쿠오오오오.
적들에게선 엄청난 증오가 느껴졌다.
세계수의 가호가 함께함에도 눈을 떨 정도로,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두려워하지 마라! 세계수의 가호와 빛의 가호가 너희와 함께한다!”
그런 기사와 병사들 앞을 뛰어다니며, 금발, 금안의 청년 기사가 광휘를 흘렸다.
태광휘의 새벽의 등불과 유사한 이능. 하지만 묘하게 다르면서 연했다.
‘마음에 안 들어.’
멀리서 이를 보고 있던 루나시르네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루나는 손에 그림자핵이 봉인된 로사리오를 오브처럼 꼭 쥐고 있었다.
저 동부 대초원을 가득 채운 수인족과 제국군을 보라.
저항군의 합류로 수적 열세가 많이 줄었다고 해도 적들은 여전히 아군보다 5배는 많았다.
질도 엘프들을 제외하면 인간 쪽은 이쪽이 훨씬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루나의 음영술은 필수적이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이 음영술과 사령술이 아군에게까지 배척받는 마법이라는 것뿐.
인간들은 무지해서 루나의 음영술을 두려워할 것이고, 엘프들은 그녀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 때문에 불쾌함을 표할 것이다.
‘진짜 내가…… 두 오라버니들만 아니었으면…….’
루나는 자신의 옆에 선 로뮤와 세계수 속에 있는 솔라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요정들에 대한 환상은 이미 볼카에서 박살 난 지 오래다.
요정들의 도시 엘펜에서는 그렇게 박살 난 환상을 확인 사살하게 되었고, 루나에게 요정 숲이든 세계수든 이제는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보면 악취를 맡은 것처럼 인상을 쓰는 엘프들이 전부 멸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와주기는커녕 역으로 제국군을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다.
그녀가 이런 불쾌한 시선을 받으면서 전선에 선 이유는 오직 하나, 요정 숲에 묶여 있는 두 오라버니들 때문이다.
추가로 요정 여왕 리리아가 약조한 보상의 지분도 좀 있었고.
‘휴우.’
루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전장 바닥에 그림자들을 짙게 깔았다.
“로뮤 오라버니.”
그리고 옆에 선 로뮤를 불렀다.
“그래, 시작되었구나.”
루나의 부름에 로뮤가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본다. 키 차이가 나서 나는 올려다보고 상대는 내려다보지만,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내가 지켜 줄게!’
루나는 속으로 몇 번째인지 모를 다짐을 했다.
“왜 그렇게 뻔히 보는 거야?”
그런 루나의 시선에 로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요정들은 세계수 가호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하니까. 여기라면 그 암흑대공이라는 자도 이길 수 있어.”
로뮤는 루나의 시선을 자신을 향한 걱정으로 해석한 모양. 그 또한 자신이 이전 세계에서 어떤 최후를 맞는지 리리아에게 들어 대강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정 숲이 아닌 인간 땅에서 일어났던 일.
“그러니 너는 음영술에만 집중해.”
그는 진하고 밝은 미소와 함께 말했고. 루나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더웠다.
“……응.”
그래서 제대로 된 대답 하나도 못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겠다. 처음 볼카에서 인사를 나눴을 때? 함께 몰래 음영술을 연습했을 때? 어머니의 묘 앞에서 그가 슬픈 눈을 하던 걸 봤을 때? 잘 모르겠다.
‘그냥…… 친밀한 감정이야, 이건.’
심장의 요동을 루나는 애써 부정했다.
‘솔라 오라버니에겐 장수종과 단명종의 비극을 연설했던 주제에, 이러면 안 돼!’
루나는 속으로 이 다짐을 하며, 그럼에도 한시도 로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로뮤 오빠가 날 지켜 주듯, 나도 오빠를 지킬 거야!’
여기로 오기 직전 리리아에게서 들은 말이 아직도 그녀의 귀를 떠나지 않았다.
전투의 시작은 볼카 요새 때처럼 사령관의 공격 신호를 시작으로 터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어수선하고 자잘한 교전이 산불처럼 번졌고, 어느새 전체가 싸우고 있는 중이다.
피슝- 피슝-.
사방에서 화살 날아가는 소리와 각종 정령과 마법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한 함성 소리가 숲과 초원의 경계를 아우른다.
제국군은 암흑군단이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한결같이 단단했다.
검은 중장갑을 입고 거대한 카이트 실드를 앞세우고 장창을 전방으로 겨눈 뒤,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군세는 보기만 해도 숨을 조여 온다.
전 차원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전술이 있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이 있다. 제국군의 강철 보병대는 여기서 아주 단단한 모루의 역할이었다.
번쩍, 번쩍, 파아앗.
그런 제국군 보병대 중간중간에는 마법병단 소속의 종군 마법사와 마녀들이 각종 마법으로 이 모루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석궁을 든 병과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제국군에서는 말이다.
요정 숲 하늘을 보호하는 무수한 나무들은 불에도 잘 타지 않았다. 애초에 화살을 쏘아도 닿지 못했다. 엘프들은 바람의 정령과 친하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마법 공격도 따로 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가호로 각종 저주와 공격 마법이 무효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마법 공격과 화살 공격은 오직 요정 숲과 저항군 쪽에서만 쏘아졌다.
엘프들은 세계수의 결계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서 원거리 위주의 공격을 했다.
제국군은 그저 미련할 정도로 묵묵히 저항군과 엘프들의 공격을 받아 낼 뿐이다.
하지만 세계수의 가호와 각종 정령술이 있었음에도 전황의 추는 제국군에게 압도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퍼버버벅- 퍼벅!!
모루가 있다면 망치도 존재하는 법.
“막, 막아라!!”
“막긴 뭘 막아! 도망쳐, 도망치라고!”
그리고 제국의 망치는 무척이나 잔혹했다.
기사단의 차징을 압도하는 망치가 제국에 있었다.
제일 먼저 오크와 트롤, 오거 등으로 이뤄진 몬스터 군단이 있다. 테이밍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힌 마법사들이 조종하는 몬스터 군단은 타고난 덩치와 괴력으로 앞을 막는 연약한 인간들을 짓누르고 찢어 버렸다.
맷집은 약하지만 작고 빠르고 숫자도 많은 고블린들이 숏소드와 단검 등을 쥐고서 전열 사이사이를 헤집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 몬스터 군단에 대한 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대체로 테이밍 마법으로 조종받는 놈들이기에 이를 조종하는 마법사를 저격하거나, 더 고위의 마법으로 몬스터의 조종권을 빼앗아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돌격해오는 몬스터들 중 3할 정도가 이미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날뛰고 있었다.
엘프도 저항군도 쩔쩔매는 적은 제국의 또 다른 망치, 수인족 부대였다.
사자, 곰, 호랑이과의 수인족이 제국의 몬스터 군단과 함께 인간들의 장벽을 찢었고, 늑대나 고양이과에 속한 수인족들은 민첩함을 이용해 창을 던지거나 단검을 던져 엘프 레인저와 엘리멘탈리스트들을 저격했다.
숲과 바깥 경계에 있던 운 안 좋은 엘프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했다.
수인족들은 흑마법의 영향인지 지금껏 알려진 것보다 더욱 포악했는데, 그렇다고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니라서 그저 몸으로 막아야만 했다.
게다가 수적으로는 제국이 요정 숲과 저항군을 압도한다. 질로도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승리의 추가 기우는 상황. 세계수의 가호를 받았음에도 절망적인 전황.
“물러서지 마라! 나 솔라시우스가 여기 있다!”
전장의 한가운데 태양처럼 빛나는 검을 세우고 뛰어다니는 미나스트림마저 없었다면, 인간들은 진즉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솔라시우스를 사칭하는 황족의 외침도 아군의 비명과 신음 소리에 서서히 파묻히고 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전세가 일방적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이 막막하고 답이 없는 상황에 인간 지휘관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하이엘프 로뮤, 인간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형제들의 피해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일단 후퇴해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엘프들도 굳은 얼굴로 로뮤에게 요정 숲 내부로 후퇴를 종용했다.
“…….”
사방에 부정적인 곡소리만이 가득하지만, 엘프 쪽 지휘관이기도 한 로뮤의 얼굴은 무심하기만 하다.
적의 망치와 모루는 잘 봤다. 참으로 단단한 모루였고, 참으로 압도적인 망치다.
저 망치에 우리의 모루가 얻어터지고 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망치는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로뮤는 확신했다. 우리의 망치가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라고.
로뮤는 무심하고 차가웠던 표정을 순식간에 풀고는 고개를 돌려 금발, 금안의 한 소녀를 보았다.
“준비됐어, 리나?”
“물론이지, 오라버니.”
로뮤의 물음에 루나는 기다렸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마녀가 한 손에 쥔 로사리오에서 거대한 에너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우웅.
볼카에서의 포식으로 힘을 많이 회복한 그림자핵은 자신 있다는 듯 웅웅 울었다.
시체가 많이 쌓였다.
해는 정오를 가리켰고, 대지는 통곡과 비명 아래 짓눌려 있다.
짓눌린 절망의 그림자는 깊고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