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87.
피비린내 나는 대지 위, 해는 정오를 맞이해 하늘 높이 떴고 그 아래에 선 피조물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림자를 낳았다.
스스스스슷.
언제부터였을까? 뱀 소리 같은 것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이명처럼 들리던 것이.
키르르륵, 키윽!
구어어어어…….
피 웅덩이 속에 잠겨 있던 시체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
스스스스슷.
그 시체들이 그림자처럼 생긴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
“맙소사……! 이젠 하다 하다 사령술이야?!”
“저 검은 건 또 뭐야…….”
“이 악취는? 정말이지 역겹군!”
엘프들도 인간들도 처음에는 제국군의 흑마술로 생각했었다. 이런 사술을 쓸 존재는 흑마법사뿐이고, 흑마법은 제국에서만 공인되었으니까.
“끝났어……. 가뜩이나 밀리는데 저런 거까진…….”
바닥 아래에는 지하가 있다고, 시련이 겹친 것 같자 모두가 절망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절망이 어리둥절함으로 바뀌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은 저주받은 존재들은 엘프와 저항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군을 공격했다.
쿠워어어어어-!
그림자 입은 시체가 일어나 적을 향해 전진한다. 할퀴고 물고, 붙잡고 찢는다.
온전하지 못한 시신이라도 상관없다.
검은 마녀는 알뜰하신 분이라 육신이 없다면 영혼을 사역하신다.
검은 그림자에 잠식된 망령들이 전장을 배회한다.
끼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조금이라도 이성을 가진 적을 패닉으로 몰아넣는다.
“우, 우리 편이야. 우리 편…….”
“루한에서 사령술과 음영술을 다루는 검은 마녀가 있다고 들어 본 거 같긴 한데?”
저항군 병사들은 여전히 겁먹었지만, 눈앞의 존재들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루나는 최후방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도대체 누가 이런 무시무시한 흑마법을 펼치는지 몰랐다.)
“……더러워.”
“역하군.”
엘프들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투가 한창임에도 손수건이나 커다란 나뭇잎 등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아군에게도 이 정도인 루나의 그림자 군단이다. 하물며 적에게 얼마나 끔찍할까?
“쿠, 쿼아아아악!”
본능밖에 남지 않은 몬스터의 광폭화된 눈동자에 본능적인 공포가 서렸다.
“카아아아악!!”
유독 사나웠던 수인족 전사들 또한 털을 바싹 세우며 몸을 사렸다.
“물, 물러서지 마라!”
“황제 폐하께서 지켜 주실 거다!”
“버텨라! 싸워라!”
엘프의 정령 마법과 정령 화살을 맞고도 멀쩡했던 제국군 보병대도 흔들렸다. 모루처럼 단단했던 대열 사이사이로 저주받은 심연의 피조물들이 엄습해 온다.
육신을 가진 죽은 자들은 생전의 치아와 손톱으로 산자를 우걱우걱 뜯는다. 반쯤 박살 난 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수의처럼 그림자를 입은 육신은 닿는 모든 것을 녹이고 오염시켰으니까.
쿠아아아.
심장 뚫린 트롤 언데드가 제국군 오거를 향해 손톱과 이빨을 들이민다. 살아생전이었다면 자연의 먹이사슬로 상상조차 못 했던 짓을 거리낌 없이 벌인다.
가아아악!
오우거는 자신의 명치까지밖에 오지 않는 녀석의 도전을 포효하며 받아 줬다.
끄……끄어어어어!
하지만 첫 몸싸움을 끝내기도 전에 오거의 몸이 녹아 찢기기 시작했다.
쿠르륵…… 쿠욱!
오우거는 즉사하지 않았다. 대신 산 채로 트롤의 몸을 덮고 있는 그림자에게 먹혔다. 찢기고 함몰된 거대한 육신은 그림자에 의해 재조립되었다.
이는 수인족을 상대로도, 제국군을 상대로도 비슷하게 이뤄졌다.
시체는 끝없이 발생했고, 그림자는 끊임없이 번식했다.
“…….”
“……악신이야.”
이 모든 과정을 목도 중인 엘프와 인간 저항군은 벌벌 떨었다.
“우리…… 착한 편 맞아……?”
배움이 짧은 병사들은 벌써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 모양.
“1황녀님이 흑마법을 익힌 마야나라니…….”
후방에 있던 인간 귀족과 마법사, 기사들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루나시르네를 힐끔거린다.
아군이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무엇보다 승리의 주역이다. 하지만, 인간의 편견과 죽음을 대하는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화아아앗!
그때였다, 병사들 앞에 눈부신 새벽의 광휘가 터지기 시작했다.
“두려워 마라! 빛이 밝으면 어둠도 깊은 법! 태양이 있으면 달도 있는 법!”
미나스트림이 광휘를 휘날리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마나를 가득 담아 저 멀리 요정 숲까지 전달됐다.
“1황녀 루나시르네는 나, 솔라시우스의 동생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녀의 어둠은 거룩한 안식이니 두려워 말라!”
미나스가 발현하는 빛과 외침 덕분에 저항군은 병사와 귀족, 마법사 할 것 없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빛에 이어 어둠까지 우리의 편이다! 세상 만물이 우리를 지지한다!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이 기세를 몰아 진격하라-!”
광휘로 물든 검을 들고 외치는 미나스의 말은 꽤나 신빙성 있었다. 적어도 인간들에겐 통했다.
‘1황녀께서 음영술을 쓰다니! 로안의 의동생 리나 샬루트도 비슷한 힘을 쓴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니겠지?’
미나스는 입으로는 열심히 외치면서도 점점 쌓이는 의혹에 속이 타들어 갔다.
그 타들어 가는 마음과 별개로 그의 연설은 성공적이었다.
와아아아아!
이에 화답하는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검은 그림자 물결과 미나스가 내뿜는 빛의 물결이 전진한다.
“꽤 하는군.”
로뮤는 무심한 눈으로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황족을 보였다.
제자의 아들을 사칭하는 인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은 쓸 만했다. 진짜 솔라시우스와 비교하면 많이 모자라지만, 인간들을 통솔하는 데는 능력을 입증했다.
‘검도 꽤 쓸 줄 알고.’
검술과 빛의 힘을 사용하는 것도 꽤 수준급이다. 볼카에서 만났던 문라이트 후작과 비교하면 살짝 아래다.
로뮤는 몇 초 정도 미나스를 보고선 미련 없이 시선을 거뒀다.
“루나, 괜찮아?”
바로 옆에 있는 루나시르네를 보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도, 엘프도, 저 사칭범도 아니다.
오직 루나의 안위가 중요했다.
‘루나가 서 있는 곳은 세계수 가호 밖이야. 하지만 영향이 아주 없는 건 아닐 터.’
지금 루나와 로뮤가 선 곳은 저항군 사령부가 있는 요정 숲 바로 앞이었다. 다른 엘프들이 요정 숲 안에서 마법과 화살을 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응…… 아직 버틸 만해.”
로뮤의 물음에 답하는 루나의 목소리는 지쳐 보였다. 과하게 음영술과 사령술을 사용한 것도 문제지만 역시나 세계수 가호의 영향을 조금은 받은 것 같았다.
“너무 무리하지 마, 전세는 이미 기울었으니까.”
로뮤는 루나를 보면서 누누이 당부했다.
루나는 대답할 여유도 없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런 그녀를 로뮤를 비롯한 엘븐나이트들이 겹겹이 호위했다. 인간 귀족들로 이뤄진 기사들도 1황녀를 경호 중이다.
‘그런데…… 수인족 왕이 안 보이는군. 이 정도 군세가 움직임에도 암흑대공 같은 제국의 거물도 보이지 않고.’
분명 루나시르네의 활약으로 이기고 있음에도 로뮤의 표정은 여전히 무거웠다.
마치 눈앞의 군세는 미끼인 것 같았다.
“……!”
그러다가 불현듯, 로뮤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세계수 가호가 단단한 요정 숲이 있었다.
그 요정 숲 안에서 거대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 * *
요정 숲의 외곽.
세계수의 가호는 짙지만, 요정들의 수목 도시 엘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숲속 공터.
우우우웅, 파아앗.
그 공터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됐고, 눈부신 빛과 함께 무수한 인영들이 소환됐다.
“여긴~ 언제나 그대로네?”
무수한 인영들 사이에서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길고 뾰족한 귀를 한 여인, 오래전부터 다양한 신분과 이름으로 대륙에 혼란을 파종했던 존재, 거짓의 대마녀라는 칭호로 악명 높았던 마도사, 최근엔 악황후 옥타나가 되어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여인, 엘프명은 아낙시아였던 버림받은 하이엘프가 나른한 눈으로 숲을 훑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에도 공터에는 계속해서 거대한 공간이동 마법진이 생성되었고, 그 마법진 안에서는 하나하나가 기사 전력에 필적하는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볼카에서 괴멸된 거로 알려진 암흑군단의 정예병들이 보였고.
흑마법을 익힌 것으로 추정되는 마녀와 마법사들도 보였다.
무엇보다 숲 밖의 수인족들보다 덩치도 크고 포악해 보이는 수인족 전사들이 완전 무장 상태로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크르르르…….
그 수인족 전사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하나 있었는데, 트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덩치가 컸고 흑염처럼 타오르는 수사자 갈퀴가 인상적인 사자과의 전사였다.
바로 수인족 왕이자 파괴왕으로 불리는 가오이다.
이어서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레인저로 보이는 엘프 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엘프는 눈동자가 온통 검었다. 흰자 하나 보이지 않았는데, 무언가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라면 도시 중심부에서 나타나야 했는데…….”
옥타나는 이 다섯 엘프를 보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아주 오래전, 여왕의 직속 시녀들에게 장난을 쳤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그 시녀들로부터 신호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필 지금 말이다.
“기쁘지 않아.”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숲 한가운데로 장소를 변경해야만 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서둘러 가다 보면~ 깜짝 파티 정도는 가능할지도?”
옥타나는 차가운 눈으로 이 공터를 마련해 준 다섯 엘프를 보았다. 정확히는 다섯 엘프의 뇌에 기생 중인 작고 귀중한 아이들을.
매우 희귀한 고대의 기생체로 눈앞의 다섯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수고했어~ 귀염둥이들 같으니.”
따악!
그녀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다섯 엘프는 눈, 코, 입, 귀에서 검은 액체 같은 걸 쏟으면서 쓰러졌다.
검은 액체는 이윽고 하나로 허공으로 떠오르며 각각 다섯 개체씩 합쳐졌다.
“세계수의 시선도 피하는 요 녀석들~ 어디서 더 얻을 수 없을까? 마계에 다시 한번 가 봐?”
옥타나는 마치 황금을 관찰하는 상인 같은 눈으로 눈앞의 다섯 검은 덩어리를 살폈고, 이어서 그녀가 허공으로 떠오른 검은 기생체를 손을 뻗어 회수하려던 순간.
쏴아아악, 푹!
화살 하나가 날아오더니 옥타나의 손을 쳤다.
화살은 어찌나 강했던지 그녀의 희고 가는 손을 손목부터 흔적도 없이 터트렸다.
“……!”
졸지에 손을 잃어버린 옥타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본다.
“아~ 너구나? 내 다음으로 나온 에이션트.”
옥타나는 자신에게 화살을 쏜 자를 확인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너에 대해선 들어는 봤어. 볼카에서도 먼발치서 보긴 했는데~ 도살자 아저씨가 날뛰는 바람에 인사할 틈은 없었지.”
스으으윽.
표정을 푼 옥타나는 트롤의 재생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로 날아간 자신의 손을 복구했다.
그리고 아까 미처 수거하지 못했던 검은 기생체들을 거뒀다.
“이름이 로뮤 엘펜리트라고 했지? 안녕? 보다시피 내가 네 선배란다? 나에 대해 들어 보았는가 모르겠네?”
“……불청객인 것은 확실하군.”
옥타나의 인사에 로뮤는 활을 겨누며 말했다. 로뮤 주위에는 그와 함께 이곳으로 온 엘프 근위대가 마찬가지로 활과 마법, 창을 겨눴다.
검은 마녀 루나시르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