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89.
세계수에게 버림받은 타락한 엘프지만, 명색이 하이엘프다. 그것도 에이션트인.
리리아는 급격히 변한 옥타나의 분위기에 뾰족한 귀 끝을 꿈틀거렸다.
“아! 당신의 기운으로 제가 지닌 어둠의 힘이 많이 약해졌군요. 마계에서 가져온 따끈따끈한 힘인데, 아쉽게 되었어요. 하지만…… 고작 이걸로 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옥타나는 세계수를 향해 쌓인 게 많았는지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봐, 마녀, 로뮤는 어떻게 했지?”
리리아는 세계수에게 향한 옥타나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질문을 반복했다.
“글쎄~? 가오이의 돌격에 멀리 날아가는 것까진 보고 왔는데…… 그 이후엔 모르겠네?”
끈질긴 리리아의 물음에 옥타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그런데 시녀들에게 심어 놓은 기생체는 어떻게 알아챈 거야? 그거 때문에 숲 외곽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구~.”
오히려 사나운 눈빛의 리리아를 향해 장난스러운 엄살까지 부린다.
“…….”
리리아는 옥타나의 장난스러운 모습에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아.’
자신과 세계수가 변한 것처럼, 눈앞의 여자도 많이 변했다. 사그라진 세계에서의 모습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 같을 정도로.
‘세계수의 기운으로 많이 약해졌음에도 이 정도라니…….’
만약 세계수 앞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리리아는 질문도 던지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너도~ 많이 변했구나? 그 멸망했다는 세계에서 많은 걸 느꼈나 봐?”
옥타나는 자신을 경계하는 리리아를 보며 묘한 눈을 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있을 거니?”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한때 아낙시아라는 이름 가졌던 엘프는 처음으로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미소를 그렸다.
“무슨 소리지?”
옥타나의 말에 리리아는 한 손에는 숏소드를, 다른 한 손에는 나이프를 꺼냈다. 양손에 든 검에는 각종 정령 마법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시치미 떼는 거 봐? 너는 어디 가서 엘프라고 하면 안 되겠다?”
리리아의 자세에 옥타나 또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깊은 미소를 띠면서.
“왜 에이션트가 엘프들에게서 박해받는지 알잖아?”
옥타나는 마법을 준비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유일하게 거짓말할 수 있는 엘프라서.”
엘프 여왕을 바라보는 옥타나의 얼굴엔 아까 로뮤와 만났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친근함이 서렸다.
고오오오오.
“알지. 그리고 당신 때문에 그 박해는 더욱 심해졌지.”
그런 친근함 서린 옥타나의 얼굴을 향해 리리아는 살의가 담긴 미소로 응대했다.
“그걸 알면서 그렇게 여유만만이셨나, 선배님?”
스스스슷.
살의 담긴 미소를 짓는 리리아의 금발과 녹색 눈동자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머리 색은 검게, 눈동자는 붉게.
에이션트 엘프의 모습으로.
요정들의 여왕이자, 세계수의 유일한 대리자는 흑발의 붉은 눈동자를 한 에이션트 엘프로 현신했다.
“내가 다시 엘프가 되었는데도~ 어머니에게 영향이 없던 이유가 너 때문이었니? 네가 내 존재를 완전히 대체했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어.”
왜 에이션트를 엘프 여왕에 앉혔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어.
“정말이지…… 자기 보신은 철저하시네요, 어머니?”
본모습을 드러낸 리리아를 보면서 옥타나가 알 수 없는 말을 감탄하듯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옥타나를 향해 이번에는 리리아가 입을 열었다.
“사그라진 세계선의 기억을 보면서 우연히…… 아낙시아라는 이름의 본래 뜻을 알게 되었지.”
리리아는 본모습을 풀자마자 옥타나의 옛 이름을 입에 담았다.
“고대 요정어로 ‘실패’를 뜻하더라?”
“……!”
그 말에, 친근함과 여유로움을 품었던 옥타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선배라고? 웃기고 있네. 너는 내 선배가 아니야.”
“…….”
고오오오오-.
이제는 리리아도 옥타나도, 서로를 향해 오직 단 한 가지 감정만을 풍길 뿐이다. 살의.
“너는 그저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을 뿐.”
“감히……! 네가!”
“이 실패작아.”
리리아는 조소를 가득 담아 말했다.
“닥쳐!!”
옥타나는 발작이라도 하듯 리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앗-!
두 에이션트 엘프가 충돌했다. 황금빛 세계수 나무가 두 딸의 싸움을 말없이 관람한다.
고대 시대가 끝나고, 세계의 축이 변했다. 이로 인해 함께 세계를 수호하던 드래곤들이 자취를 감췄다. 영원에 가까운 잠에 빠지거나, 소멸하거나, 다른 우주로 떠났다.
그때부터 세계수는 홀로 이 세계를 수호해 왔다. 12차원의 천상신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태초부터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티끌만 한 신성력만 하위 차원들에게 던져 줄 뿐이다.
그래서 세계수는 홀로 이 세계를 지켜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드래곤보단 못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보좌해 줄 우월한 종족이 필요했다.
인간, 드워프, 수인족 등등, 지성을 가진 무수한 피조물이 있었지만, 세계수가 선택한 종족은 바로 엘프였다. 고결하고 장수하고 아름다우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종족.
하지만 너무나 고결하기에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피조물.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은 존재들.
그 고결함과 오만함 때문에 숲 밖으로 전혀 나서지 못하는 종족.
뛰어난 재능과 긴 수명을 가졌음에도 욕심이 없다 보니, 세력 싸움에선 단명종들에게 뒤처지는 아이러니.
성욕조차도 적어 긴 삶을 살면서도 번식을 거의 하지 않는 절식성.
세계수는 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인간처럼 열정적이며, 드워프처럼 집념이 강하고, 수인족처럼 정력적이며, 무엇보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엘프를.
그 엘프를 세계수는 에이션트라고 불렀다.
처음 이 돌연변이는 인간과 엘프의 혼혈 중에서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오만하고 폐쇄성 짙은 엘프들은 그렇게 태어난 하프를 경멸했다.
세계수는 자신이 의도해서 만든 돌연변이가 엘프들에게 배척받도록 내버려 뒀다. 그 배척을 통해 집념과 욕망, 교활함을 터득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엘프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에이션트도 그랬고 세계수 열매를 통해 빚어낸 하이엘프 에이션트도 결국엔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너무 정직해서 그러지 못한 반푼이들.
뜨겁게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욕정이 아닌 헌신으로 승화하는 답답이들.
그렇게 태어난 에이션트 엘프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지금 세계수 앞에서 싸우고 있는 두 에이션트 하이엘프도 비슷한 처지였다.
파가가가각!
세계수에겐 자식보단 실험체에 가까운 두 실험종이 싸운다.
“알아? 아낙시아, 너는 너무 착했어! 그래서 배척받았고, 결국엔 버림받았던 거야!”
“아낙시아라 부르지 마! 내 이름은 옥타나야!”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바로 옆에 계신 어미에게 인정받기 위해.
“싫은데? 대신 실패작은 어때?”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어!”
하나는 실패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량품이었지.
“난 시작부터 아낙시아, 너와 달랐어. 세계수 열매 속에 있을 때부터 생각을 했고 나 자신의 상황을 인지했거든.”
세계수 입장에선 도긴개긴이었지만, 둘에겐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순간이기도 하다.
“솔직히 로뮤에겐 미안한 감정이 있긴 해. 어떻게 보면 걔를 이용해서 이렇게 정체를 숨길 수 있었거든.”
“……!”
“나는 세계수 열매 안에 있을 때부터 느꼈어.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내 앞에 있는 누구처럼 버림받을 거다. 배척받을 거다.”
카앙, 카앙, 퍼억!
리리아는 검을 휘두르고 부딪치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열매 속에서 마법을 익혔지.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필사적으로 바꿨지. 태아라서 힘이 부족하면 옆에 있던 로뮤의 힘까지 빼앗아 썼지.”
옥타나를 향한 리리아의 붉은 눈동자에는 시원함이 서렸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그녀에게 족쇄를 푸는 것 같은 해방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 로뮤도 느꼈을 거야. 기억은 못 하는 것 같았지만. 나와 달리 그 아이는 착했어. 어쩌면 멍청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
“걔는 속이려 들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힘을 빼앗기면서도 저항하지 않았지.”
옥타나는 리리아의 공격을 막으면서 묵묵히 그녀의 고해성사를 들었다.
“어머니 세계수는 그런 나와 로뮤를 지켜볼 뿐이었지. 얼마 후 우리 둘이 열매에서 태어났고, 장로들은 로뮤에게 신경이 빼앗겨 내 영혼의 냄새조차 깊게 마시지 않았지.”
카앙, 캉!
두 검은 머리 하이엘프의 검이 교차했다.
서로의 목과 뺨을 스친다. 핏방울이 바닥에 뿌려졌다. 옅게 베었기에 치명상은 둘 다 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치명상을 면했을 뿐, 싸움의 추가 어느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정령이 가득 담긴 리리아가 든 두 검이 옥타나를 압박한다.
옥타나는 한 손에는 숏소드를, 다른 한 손에는 스태프를 엑스 자로 들고서 리리아의 공세를 막았다.
“좀 더 독해지지 그랬어, 실패작 언니?”
콰아아아아.
분명 마계에서 많은 것을 배워 왔음에도, 마계에서 더 강해졌음에도, 그곳에서 어머니가 내린 저주를 벗어 던졌음에도.
“……!”
옥타나는 리리아에게 밀렸다.
“왜 당신이 내게 밀리는지 알아? 사실 당신은 나보다 강해. 하지만 마음은 아니야.”
파아아악.
맞닿은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소멸된다. 세계수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초토화되고 있다.
세계수의 정원이 엉망이 되었다.
리리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흘렀다.
반대로 옥타나는 어느덧 밀리고 밀려 무릎을 꿇고 간신히 리리아의 검을 버티는 중이다.
카가가각.
검과 검이 비벼지는 소리가 좋지 못하다.
리리아와 옥타나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닿았다. 서로의 숨결이 볼에 닿을 정도다.
“내가…… 독하지 못하다고?”
옥타나가 멍한 눈으로 혼잣말하듯 되물었다.
“당신의 눈에는 아직 망설임이 있어, 주저함이 있어!”
리리아가 확신에 찬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옥타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렇게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래, 그럴지도?”
기다렸다는 듯이 옥타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찰나에, 희미했던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그 당시의 나는 그랬었지.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미움받기 싫었고, 버림받기 싫었다.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요정 숲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래서 순종했고, 속이지 않았으며, 기꺼이 희생을 택했다.
제물로 바쳐지듯 단명종과 만나게 되었고.
-사랑하오, 아낙시아, 내 심장을 그대에게 바치겠소.
-저도요, 마하, 제 영혼을 당신에게 바칠게요!
그렇게 만난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제 평생을 당신과 제국을 위해 헌신할게요!
그 남자를 위해 헌신했다.
-인간과 엘프 사이의 새로운 서약이 필요합니다, 숲의 형제들이여, 이 하이엘프 아낙시아를 믿어 주세요.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지만 결코 하지 않았던 거짓말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처음으로 했다.
-세계수의 열매, 이것만 있으면 그이와 쭉 함께할 수 있을 거야.
세계수 열매를 몰래 훔쳐 사랑하는 이에게 먹이기도 했었다.
-미안하오…… 아낙시아.
-안녕하세요, 황후마마? 저는 마녀 ‘베아트리체’라고 해요. 빙결 마법을 주로 다루죠.
그리고 버림받았다.
“…….”
찰나의 순간, 옛 기억 중 일부를 회상한 옥타나의 붉은 눈동자는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낙시아였을 때의 일이야.”
사아아아-.
힘겹게 리리아의 공격을 막아 내던 옥타나의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거짓의 대마녀 옥타나는 절대 아니야.”
캬아아아아!
옥타나의 입이 크게 열리더니 검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총 다섯으로 이뤄진 덩어리. 아까 요정 숲에서 다섯 엘프들에게서 거둔 고대의 기생체들이었다.
퍼퍼퍼퍼펏!
“!!”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섯 기생체가 요정 여왕의 얼굴을 덮쳤다.
옥타나는 처음 한두 개만 뱉으려 했지만, 리리아의 실력을 잘 알기에 가지고 있던 전부를 토해 냈다.
흐읍!!
리리아는 급히 숨을 참고 입을 다물었지만, 다섯 기생체는 집요하게 리리아를 노렸다.
“이게 망설이는 눈 같았니? 아가야? 계산 중이었던 건데~.”
옥타나는 얼굴을 부여잡고 발버둥 치는 리리아를 비릿하게 노려봤다.
“약한 척도 독해야 할 수 있는 거란다~.”
후욱, 후욱.
비릿한 표정의 옥타나의 숨은 거칠었다. 마음 같아선 저 기생체들이 리리아를 먹어 치우는 것을 끝까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그녀는 아쉬움을 삼키곤 곧장 세계수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