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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91화 (91/212)

제91화

#91.

피조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거대한 냉기.

폭주 중인 설원의 권능은 루카스의 영혼과 마나를 짓눌렀다.

아내와 자식을 향한 마음마저 흔들리게 만들 정도로.

두려웠다. 도저히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보…… 루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거대한 절망이 루카스를 휘감았다.

그저 신을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막막했다.

막막함이 묻은 절망은 간절함이 되었다. 그는 간절함을 담은 얼굴로 힘없이 무릎 꿇었다. 마치 기도라도 하듯이.

‘제발…… 도와주시오! 누구라도 좋으니까!’

소원을 빌 수 있는 존재란 존재는 전부 찾았다. 첫 번째 설원의 대마녀 베아트리체부터, 세계수, 천상신, 역대 마탑주들과 가문의 조상님들까지.

쿠오오오오!

그렇게 빌고 빌었지만, 저 중심부의 냉기는 더욱 포악해졌다.

“안 돼에……!”

저 안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다.

“여긴 나밖에 없어! 내가…… 내가 구해야 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를 용기와 의지가 그의 몸을 움직였다. 두려움에 흔들렸던 마음과 영혼을 애써 다잡았다.

“크으으윽……!”

뭐라도 해야 한다!

루카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목숨을 걸고 전진하려 했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거대한 냉기 폭풍은 그런 그의 진입을 밀어냈다. 그는 전진은커녕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버티기 바빴다.

‘결계를, 마법진을, 토템들을 파괴해야 해!’

그의 눈동자에 계승식장에 설치된 각종 마도구와 마법진이 보였다. 마도사인 그가 파악하길, 이 폭주의 원흉은 저것들 중에 있었다.

“으아아악!”

필사적으로 마법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화염은 거대한 냉기 앞에서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다. 마치 강풍 맞은 촛불처럼.

“제발……! 움직여! 검이라도 휘둘러!”

마법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그는 스스로에게 윽박질렀다.

허리춤에 있는 국서의 검까지 뽑고는 죽어라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윈테이라를 든 그의 몸놀림 또한 냉풍에 제한되었다.

손발의 끝부터 심장 속까지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관절과 근육, 힘줄도 딱딱하게 굳어서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찾아온 절망.

답답함, 무기력함이 루카스의 사지를 결박한다.

‘제발…… 그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결국 그의 무기력함은 파도를 타고 흘러 어느덧 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부디…… 이번에도 나와 주시오! 부디!’

늘 아내와 밀회를 나누던 정체불명의 남자,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이름 모를 연적.

그 남자에 대해 아내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알게 될 진실이 두려워 차마 묻지 못했던 존재. 애써 모른 척했던 존재.

‘와 줘! 늘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와서, 순식간에 사라지라고! 아니, 사라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계속 그녀 곁에 머물러도 좋으니까……!’

제발 그녀를 살려 줘! 제발 내 딸을 구해 줘! 제발!

루카스는 그 남자를 애타게 불렀다. 자신의 무능을 처절하게 느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루카스의 체감상으로는 영겁과 다를 바 없던 시간이 흘렀을 때.

파아아앗.

계승식장 저편에서 어떤 빛이 빛났다. 그 빛은 새벽을 끝내는 일출처럼 빛나 올랐다.

퍼엉, 퍼엉.

동시에, 계승식장의 토템과 마법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루카스를 밀어내던 냉기 폭풍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숨결마저도 얼게 만들었던 냉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루카스는 저 광휘의 정체를 바로 알았다.

그 남자, 그 남자가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흐으으윽, 흐윽……!”

루카스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냉기 폭풍도 사그라들었고 온도도 서서히 올랐다. 분명 아까보다 더 가까이 아내와 딸에게 갈 수 있었음에도, 루카스는 그러지 못했다.

바닥으로 내려앉은 자존감이 그의 두 다리에서 힘을 앗아 갔다.

루카스는 그저 엉엉 울면서, 먼발치에서 그 남자와 아내를 바라보아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 * *

예나체리나는 부푼 마음을 안고 황족 사신단을 맞이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도 그 남자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사신단에도 그는 없었어. 그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의아함과 실망을 뒤로하고, 다음 날 바로 설원의 계승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왕실기사단에서 황족들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왔지만, 요즘 제국 내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 위험하면 그이가 와 주겠지.’

언제나 수호 기사처럼 자신과 딸을 지켜 주던 남자. 예나는 그 남자를 믿었다.

어쩌면 이런 생각 때문에 더 안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설원의 계승식이 시작됐다. 그녀가 어릴 적에 경험했던 것처럼,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어머니가 해 줬던 것처럼.

자신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딸에게 모든 권능을 전수하리.

왕궁 안에는 오직 자신과 딸만이 남았고, 2중, 3중으로 결계를 펼쳤다. 유능한 재상과 사랑하는 남편이 몇 달 전부터 준비했던 계승식이다. 그녀 또한 혹시나 빠진 게 있나 싶어 면밀히 살피고 또 살폈다.

거짓의 대마녀도, 마계에서 내려온 괴물들도 결코 이 결계를 뚫지 못하리. 절대 이 계승식을 방해하지 못하리.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남자가 와서 구해 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화아아아앗!

계승식장 바닥에 그린 대마법진에서 빛이 발했고, 설원 여왕과 설원 공주의 몸이 붕 떴다.

고오오오오.

어미 몸에 있던 설원의 힘을 달래고 달래 딸에게 전송하려 했다.

루한을 수호하던 설원의 가호가 해제되었다.

아늑한 둥지를 버리고 낯선 둥지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에 설원의 힘은 투정 부렸으나, 이윽고 이사 갈 둥지의 무궁한 확장성을 봤는지 서서히 꿈틀거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송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바다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계승식을 향해 불던 송풍이 갑자기 폭풍처럼 변했다.

카아아아아!

원인 모를 이유로 설원의 권능이 폭주했다.

‘계승식 마법진에 문제가 있었다고?!’

순조롭게 가동되던 마법진과 결계, 토템 들이 갑자기 이상 반응을 보인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레,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오작동했기에 설원의 대마녀인 그녀조차 지금에서야 눈치챘다.

‘?!’

끼아아아아!!

바깥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밖에서도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거짓의 대마녀? 아니면 그 괴물들?’

원흉으로 예상되는 것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어릴 적, 자신을 두 번이나 습격했던 괴물들, 루한의 건국 때부터 악연을 이어온 거짓의 대마녀, 이 둘이 유력하다.

‘백성들이…….’

백성들이 걱정됐다. 설원의 계승식이 막 진행되고 설원의 권능이 일시적으로 해제되었기에, 학살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평소 살육과 거리가 먼 삶을 살던 루한의 백성들에게 지금 이 상황은 더욱 재해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바깥 상황을 신경 쓰기에는 이곳 계승식장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황족들이……?!’

1차 결계 안으로 허락받지 않은 무리가 들어온 것을 보았다.

눈을 감고 심안으로 보니 금발, 금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광휘를 휘두르며 계승식장의 안전장치들을 파괴했고, 파괴를 마치자마자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마치 실 끊긴 인형 같았다.

‘황족들이 이상하다고 했었지…….’

왕실 기사단의 보고가 떠올랐다. 보고서엔 사신단의 표정, 어조,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색했다고 적혀 있었지. 설마 거짓의 대마녀가 황족 사신단에 있던 것일까?

온갖 추측과 상상이 머릿속을 채웠다.

까아아아아아!

계승식의 안전장치가 파괴되자, 가뜩이나 폭주 중이던 설원의 권능이 더더욱 난폭해졌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흘렀다.

그녀는 급히 자신의 딸을 찾았다.

‘루시!’

눈앞에 있는 루시의 안색이 좋지 않다. 이대로 가다간 생명이 위태롭다.

우우우웅!

예나는 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폭주하는 힘을 다스렸다.

“으윽……!”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건 필시 누군가가 고의로 수를 쓴 것이다. 설원의 대마녀인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교묘함. 이 정도 교묘함은 대마녀나 대마도사 수준의 위계를 지녀야 한다.

‘거짓의 대마녀!’

그리고 예나는 그 범인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가 계승식에 깊게 관여했냐는 것인데…….

자신의 남편이자, 루시의 아버지인 루카스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했다.

‘설마…… 거짓의 대마녀가 재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아 데스모가 의심스러웠다.

파아아아앗!

예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설원의 권능은 계속해서 폭주했다. 대마법진과 결계, 토템이 그런 설원의 폭주를 더욱 부채질했다.

“아아아아악! 제발!”

루한의 여왕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는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발버둥 쳤다.

폐인이 되기로 작정했고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했다.

자신의 모든 심력과 마나를 폭주 중인 설원을 달래는 데 썼다.

하지만 설원의 권능은 이성을 잃은 광인처럼 여왕의 손길을 내쳤다.

능숙한 경지에 오른 설원의 대마녀 예나체리나도 도저히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어린 딸 루시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제발…… 도와줘요! 제발! 어디에 있는 거예요?’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황. 자연스레 그 남자가 떠올랐다.

‘와 주세요. 급해요. 늘 그랬듯 수호 기사처럼 나타나서 저와 루시를 구해 주세요!’

평소의 그였다면 지금쯤 이미 짠, 하고 등장해야만 했다. 나타나서 이 토템과 마법진을 부수고, 적을 없애고 자신과 딸을 구해 줘야만 했다.

‘제발…… 루시만이라도!’

예나는 애타게 그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엔 무슨 일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고오오오.

폭주한 설원의 권능이 기어코 계승식장의 하늘을 가렸다.

사방이 어둡다. 매섭다. 외롭다.

“루시!”

예나체리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어린 딸에게 쏘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그제야 혈색이 돌아왔고 멎어 가던 숨도 다시 쉴 수 있었다.

반대로 예나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숨소리도 희미해진다.

의식도 점점 어두워졌다.

“여보! 루시!”

‘여보……?’

희미해지는 의식 끝자락에서 문득 남편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 * *

예나체리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안 되는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굉장히 오래 잠들었던 것 같았지만, 뿌연 눈으로 보니 의식을 잃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루시!’

그녀는 본능적으로 저 앞, 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 무사하다.

‘……?’

이어서 폭주하던 설원이 다소 잠잠해진 것을 느꼈다.

퍼어엉, 퍼엉.

아래에서 토템과 마법진을 파괴하는 남자가 느껴졌다.

‘마지막에 남편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는데?’

처음엔 남편 루카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후드와 복면을 깊게 쓴 남자였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이 강풍 속에서도 그의 복면과 후드, 검을 가린 붕대는 벗겨지지 않았다.

“하아…….”

남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와 주셨군요…….”

그는 이번에도 와 줬다.

“하지만…… 이번엔 좀 늦었어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허억, 허억.

긴장이 다소 풀려서일까?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예나는 식은땀을 흘렸고, 곧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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