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93.
푸른색 용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 듯이, 반대 입장에선 불에 달궈진 창이 입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
탐욕스럽게 침을 뚝뚝 흘리며 예나의 영혼을 날름하려던 녀석은 솔라가 내찌른 일격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침내 이뤄 낸 일격은 성공적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섬광, 에너지 파동이 솔라와 예나, 설원 사이에서 요동쳤고, 강한 충격파가 연이어 터졌다.
“흐어억!”
지금까지 먼발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루카스도 이 충격파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루시, 루시를 지켜야 해!’
그는 급히 자신의 딸을 향해 달렸고, 딸 앞에서 방어막을 펼쳤다.
그렇게 마지막 충격파까지 간신히 막은 루카스는 심신이 모두 지쳤는지 딸과 함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솔라시우스의 회심의 일격.
설원의 권능은 힘을 크게 잃었다.
파아아아앗.
푸른색 입자로 잘게 흩어지더니, 이내 저 멀리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어린 루시에게 뿌려졌다.
설원의 공주는 설원의 권능을 피부로 광합성이라도 하듯 흡수했다.
마검 윈테이라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루시푸르네는 어린 루시에게 흡수되는 설원의 권능을 보면서 생각했다.
‘비록 설원의 힘이 많이 유실되었지만…… 상관없어.’
방금 솔라의 일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설원의 권능이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설원의 힘은 겨울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충전되니까.’
설원의 권능의 본질은 무한에 가깝게 냉기를 아주 많이 모으는 거였고, 이 세상에 겨울이 이어지는 한, 차가운 우주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 순환이었다.
지금은 허약하지만 몇 년만 지나도 본래의 힘을 다시 찾을 터.
대신, 설원의 가호가 약해질 것이니 이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예나체리나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솔라를 보았다.
“이게…… 어떻게……?”
“…….”
솔라는 그런 예나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또다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설원의 계승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비록 폭주했던 설원의 권능을 제압하느라 힘을 많이 뺐지만, 이는 곧 충전될 것이다.
한동안 설원의 가호가 약해져 루한에 혼란이 깃들겠지만, 이 또한 예나체리나라면 충분히 해결할 것이다.
‘재상이 악황후의 수하라는 건…… 눈치챘겠지?’
딱 하나, 아리아 데스모가 걸렸다. 하지만 영민한 그녀라면 이 계승식을 망친 용의자를 충분히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긴장이 풀린 솔라는 강한 탈력을 느꼈고, 다시 서서히 발동되는 별의 저주에 급히 태양샘 반지를 뺐다.
스스스스슷.
세상이 천천히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다. 솔라는 모처럼 아쉬움을 느꼈다. 눈앞의 여성과 영원히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시원섭섭하군.’
지금 일어난 일은 새로 분화된 또 다른 세계선의 일이다.
그와 루시가 복귀하는 현재의 세계선에서는 바뀐 역사가 적용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눈앞의 예나체리나를 볼 수 있는 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솔라는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예나를 보았다.
예나 또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의 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복면으로 가린 얼굴이지만, 그의 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아, 으…… 흐윽…….”
그의 눈웃음을 본 예나체리나는 눈물을 흘렸다. 죽다 살아나서? 딸이 저주를 품지 않게 돼서? 설원의 계승식이 결국 성공해서?
아니다.
“……이게 마지막인가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더 이상 그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솔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나는 못 만나겠지만, 언젠간 이 세계선의 솔라시우스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지금의 당신은…… 이제 끝인가요?”
솔라의 고갯짓의 의미를 안 것인지 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훌쩍이며 다시 묻는다.
“…….”
그는 이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웠어요! 정말…… 사랑했어요. 진심으로…….”
예나체리나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서 있기도 힘든 몸으로 솔라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기듯이 솔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덥석.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복면을 쓴 그의 얼굴에 손을 댔다. 여전히 복면은 잘 만져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다.
마치 마법으로 투영된 사람을 만지는 것 같았다.
쪽.
그녀는 그런 솔라의 복면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진짜로 키스하는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녀의 돌발 행동. 당연히 솔라는 당황했다.
[!!]
‘어……어마마마!!’
무엇보다 마검에 동기화된 루시푸르네가 기겁했다.
“참, 루시가 있었구나…….”
뒤늦게 솔라의 허리춤을 본 예나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해해 주렴.”
하지만 예나는 이내 뻔뻔한 얼굴을 했다.
[…….]
‘허어…….’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루시는 방금까지 느꼈던 감동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게는 훗날 나타날 그와 지금의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예나는 자신의 딸을 향해 윙크했다.
‘루카스가 걱정이군.’
‘아버지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 예나의 언행에 솔라와 루시는 자연스레 루카스가 있는 곳을 찾았다.
‘의식을 잃었어.’
‘하아, 다행이야…….’
어린 루시를 지키다가 의식을 잃은 루카스를 보곤 미안함과 안도를 느꼈다.
의식을 잃은 아버지와 연신 훌쩍이면서도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거두지 않는 어머니를 보면서, 루시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
‘잠깐…… 이러면 솔라가…… 내 정체를?!’
그러다가 뒤늦게 깨달은 현 상황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솔라를 보았다.
“…….”
솔라는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예나와 마검 속의 루시를 번갈아 볼 뿐이다.
어느덧 세상이 완전한 회색으로 변했다.
“잘 가요~! 만약 당신이 루시의 국서 후보로 오면, 전 무조건 찬성이에요…… 사위!”
예나체리나의 희미해지는 목소리와 함께 세계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숱한 시공간의 전환을 보아 왔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처음이다.
‘원작에서도 이랬지.’
정확히는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다. 게임으로는 한 번 봤었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과 함께 작게 압축된 세계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주위는 어느덧 회색 대기실이었고, 그 회색 대기실에 유일하게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묘목이 있었다.
‘성공한 세계선이라 금빛인 건가?’
‘묘목의 색이 달라!’
이를 본 솔라와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원작에서 회귀 전에 본 세계수 묘목은 창백하고 쓸쓸한 은색,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앞에 있는 묘목은 찬란하고 따듯한 금색.
대성공이다. 또 다른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을 만든 것이다.
비록 그와 루시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또 다른 차원의 루한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이야기.
솔라는 손을 뻗어 황금색 묘목을 집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때.
“……?”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색 세계가 꺼지지 않는다.
짝짝짝짝.
동시에, 그의 뒤에서 박수 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지.’
솔라는 저 박수 소리와 인기척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엘프?”
고개를 갸웃했다.
악황후 옥타나로 추측했던 여인의 외모가 이상했다. 로뮤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동자를 지닌 엘프. 그것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피부를 보아하니 하이엘프다.
“안녕? 고생 많았어.”
검은 머리의 엘프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로 솔라에게 말을 건넸다.
“……옥타나?”
솔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맞아!”
옥타나는 과한 느낌이 드는 리액션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쪽을 뭐라고 불러 줄까? 솔라시우스? 아니면 태광휘?”
“……솔라시우스.”
옥타나의 물음에 솔라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속으론 ‘세피로스를 통해 지구에서의 일을 들었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게 완성되길 기다린 건가?”
그는 손에 넣은 세계수 묘목을 보이며 말했다.
‘역시…… 아공간에는 안 들어가는군.’
아공안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아쉽게 여겼다.
“그것도 있지만…… 나도 너처럼 시간 여행을 했더라고? 과거의 나에게 속삭임과 각성을 전해 주고 오느라 바빴어.”
솔라의 물음에 옥타나가 어쩐 일인지 아련하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아주 잘해 줬어. 그거 이리 내. 이제부터 우리가 잘 써먹을 테니까.”
하지만 그 표정은 아주 잠깐만 보였고, 이내 평소의 요염함을 되찾았다.
“이거로 뭘 할 셈이지?”
“그거야 더럽히고 망치기 위함이지. 순수하고 고결할수록 더럽히는 재미가 있거든?”
“……?”
솔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옥타나가 아닌 뒤쪽에서 들렸다.
“그녀에게는 아주 짜릿한 복수가 될 것이고, 나에게는 드문 쾌락을 선사하겠지?”
이번엔 변성기가 막 온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양쪽에 등을 보이지 않게 하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마왕…….”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앞의 소년을 알아보았다.
#막간 : 사그라진 세계선의 이야기
태광휘가 플레이했던 원작의 세계, 루시푸르네의 회귀 전 세계.
설원의 계승식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직후의 일.
“으아아아앙! 어마마마!”
멀리서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계승식이 실패하고 뒤이어 의식을 차린 루시푸르네의 울음소리였다.
그런 루시 주변에는 그녀에게 뭣 모르고 다가갔다가 얼어 죽은 기사들과 시녀들의 얼음 동상이 있었다.
“…….”
딸의 울음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음에도 루카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 남자는 폭주하던 계승식장의 토템과 마법진을 부쉈고, 덕분에 정신을 차린 예나체리나는 자신을 희생해 딸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하여 설원의 가호가 다시 펼쳐졌고, 밖에서 폭주했던 황족들은 무자비한 설원의 징벌을 받아 절명했다.
그 과정에서 루카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계승식이 끝난 지금에도 그의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저 멀리 죽은 아내와 그런 어미의 주검 앞에서 울고 있는 딸을 볼 뿐이다.
‘그자에게도 이것이 최선이었나?’
정체불명의 그 남자를 찾았으나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늘 아내와 딸을 도와주는 것 같았던 남자는 이번에도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끝내 아내를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딸의 울음소리조차 듣지 못했을 테니까.
“폐하…… 크흐으으윽…….”
그의 주위에는 다양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건 꿈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살아남은 왕궁의 시녀들과 기사,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비탄에 잠겨 통곡하고 있었다.
“다들 공주마마 근처로 절대 접근하지 마세요!”
언제 부상을 회복했는지 모를 재상이 이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공주마마,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그녀의 지시를 받은 한 시녀가 애절한 목소리로 울면서 루시에게 움직이지 말라 외치고 있었다. 이름이 베네사였지?
“공주마마로부터 최소 10미터 안으로 접근하지 마라! 왕궁 일대를 전부 통제해!”
차기 기사단장으로 유력한 하이마라는 기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저기 얼어 죽은 기사단장의 동상을 보아하니, 이미 왕실 기사단장이 되었겠구나.
“……!”
이 모든 광경을 보던 루카스는 깊은 탄식에 빠졌다. 이 모든 상황이 꿈 같았다. 너무 끔찍해서 당장이라도 깨고 싶은 악몽.
‘나는…… 쓸모가 없어.’
계승식이 처참하게 실패했다. 여왕이자, 아내가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죽었다. 딸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저주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벅, 저벅, 저벅.
루카스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계승식장을 빠져나갔다.
‘흐응~ 너무 쉬운데?’
그런 루카스의 뒷모습을 아리아 데스모가 슬쩍 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
시녀들도 기사들도 신하들도 계승식을 망친 책임이 있는 루카스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흐아아아앙!”
루카스의 뒤로 루시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루카스는 죽고 싶은 심경으로 이를 외면했다.
그는 터덜터덜 걸어서 엉망이 된 왕궁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아아.
어쩐 일로 왕도 윈테라의 하늘에선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루카스는 멍하니 서서 그 비를 맞았다.
비는 내리고, 울부짖는 후회 속에서 그는 비를 맞았다.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