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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여왕의 EX급 방랑기사-94화 (94/212)

제94화

#94.

회색 아공간, 그 안에 세 인영이 서 있었다.

아직 성인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탁한 백금발의 소년, 흑발에 붉은 눈이 요염한 엘프, 복면과 후드를 썼지만 황금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청년.

“오랜만이야, 태광휘. 참! 여기선 솔라시우스라고 불러 달랬지?”

셋 중 제일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년이 복면을 쓴 솔라시우스에게 말했다.

“참고로 나도 마왕 대신 악황제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군. 필멸자의 몸으로 유희를 하는데 제대로 해야지?”

“마음대로. 뭐라 부르든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악황제 세피로스의 부탁에, 솔라는 지금까지 줄곧 쓰고 있던 후드와 복면을 벗으며 답했다.

화아아앗.

이어서 태양 이능을 발현했다. 그의 어깨와 머리 위로 광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차라리 잘됐어.’

목에 걸었던 태양샘 반지도 다시 꺼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결판을 내자!

“워~ 워~ 워~ 진정하라고. 여기에 있는 나는 진짜가 아니야. 진짜 몸은 황궁에 있다고.”

솔라의 공격적인 반응을 본 세피로스가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적어도 큰 타격은 줄 수 있겠지.”

상관없다. 둘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면 그것 또한 좋았다.

“뭐~ 그렇긴 해.”

세피로스는 솔라의 말에 순진할 정도로 해맑게 인정했다.

“조심하셔야겠어요, 어마마마?”

그러다가 맞은편에 있는 옥타나를 향해 웃으며 조언한다.

“그러게요?”

옥타나가 진지한 눈으로 마법을 캐스팅했다.

세피로스와 달리 옥타나는 지금 본체로 이곳에 왔다. 여기서 죽는다면 진짜로 죽는 것이다.

처억.

솔라는 등에 차고 있던 회색 마검 제노사이드를 꺼냈다. 회색 마검은 다시 한번 길쭉한 태양처럼 거대한 열과 빛을 머금었다.

‘반지는 하나만 끼자.’

태양샘 반지는 두 개가 아닌 하나를 손가락에 꼈다. 여기는 설원의 폭풍 한복판이 아니다. 별의 저주를 조심해야 한다.

“루시.”

그는 태양샘 반지를 끼면서 마검 루시를 불렀다.

[…….]

“……?”

하지만 허리춤의 푸른색 마검에선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마검에 담긴 설원의 힘이 빠른 속도로 감소할 뿐이다.

‘동기화가 끝난 건가?’

아까 예나체리나와의 대화로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마검 루시의 진정한 정체를.

솔라는 응답이 없는 루시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눈앞의 두 존재, 악황제와 악황후다.

츠즈즈즈즛.

두 사람이 선 양쪽에서 11차원의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다. 마치 포위하듯이 솔라의 주위를 에워쌌다.

게이트의 숫자는 많았고, 크기도 컸다.

현실이 아닌 회색 아공간이기에 마음껏 마계의 괴수들을 소환할 수 있는 모양.

키에에에에.

쿠오오오오.

이윽고 게이트 안에서 지구에서 보았던 지긋지긋한 괴물들이 튀어 나왔다.

파아아아앗!

솔라 또한 궁극기 태양의 후예를 펼치며 이에 맞섰다.

* * *

루한의 왕궁 순백궁, 여왕의 침실.

꽈다당!

한동안 사람 사는 소리 하나 없던 침실에서 자빠지는 소리가 갑자기 났다.

“……아야야.”

루시푸르네는 엉덩이를 매만지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회색으로 전환되었고, 늘 그랬듯 회색 아공간으로 이동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를 반긴 것은 고독한 여왕의 침실이다.

“어떻게 된 거지?”

루시는 급히 윈테이라와 연결된 수정 구슬을 향해 손을 올렸다.

“……동기화가 되지 않아?”

이윽고 동기화가 되지 않음에 놀랐다.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윈테이라와 연결된 보주를 살폈다.

보주 아래쪽에 금이 간 것이 보인다.

‘하긴, 그렇게 막 다뤘는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서까지 동기화를 유지했다. 그것도 꽤 오래. 마지막에는 설원의 힘과 싸우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멀쩡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수리를 어떻게 하지?’

뒤이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한다.

국서의 검 윈테이라와 동기화를 위한 보주는 최초의 설원 대마녀 베아트리체가 만든 것이다.

이렇게 험하게 쓰다가 고장 낸 것도 루시가 최초였다.

‘선대 마녀들이 남긴 일기라도 찾아볼까?’

방법이 없을 것 같진 않다. 왕궁 보고에는 오직 여왕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밀실이 있고, 그 안에는 역대 대마녀들이 남긴 마법서와 일기가 있으니까.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초대 여왕님의 기록을 찾아보면 되겠지.

똑똑똑.

“폐하…… 괜찮으십니까?”

세계수 팔찌를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침실 문밖에서 시녀장 베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수련 중이신가……?”

아마도 아까 루시가 넘어지면서 낸 소리를 들은 모양. 베네사는 혼잣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주군이 걱정되는지 문밖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충성스러운 시녀장의 모습에 루시푸르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베네사, 이제 들어와도 좋다.”

루시는 반가움이 담긴 어조로 베네사를 불렀다.

“폐하!? 들어가겠습니다!”

여왕의 목소리에 시녀장이 환한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여왕의 폐관 수련이 끝났다! 소문은 시녀장과 시녀들을 통해 왕궁 전체로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장 하이마와 섭정 루카스가 알현을 신청했다.

‘아버지…….’

문득 현실에서 다시 보게 된 루카스의 모습에 루시는 가슴이 뛰었다. 그의 얼굴은 세계수 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많이 삭았다. 그간의 마음고생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루시는 루카스를 향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요정 숲이 제국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루카스의 입에서 곧장 나온 보고에 사사로운 감정이 쏙 들어가 버렸다.

“요정 숲이 전쟁 중이라고?!”

여왕은 요정 숲이 제국군과 수인족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섭정의 보고에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계수에 들어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솔라와 루시는 세계수와의 만남을 가지자마자 바로 시간 여행을 해야만 했다. 둘이 떠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전운은 감돌았지만, 전투가 시작되거나 하진 않았다.

‘솔라시우스…….’

보고를 듣자마자 루시는 솔라가 걱정됐다.

‘그때 힘을 많이 쓴 거 같았는데…… 윈테이라의 냉기가 많이 버텨 줄까? 보주의 상태를 보니까 윈테이라의 상태도 확인해 봐야 할 텐데…….’

그녀는 당장이라도 마검 윈테이라에 동기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동기화 수단 중 하나인 보주가 문제다.

수리는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시간.

“좀 더 자세히.”

루시는 루카스와 하이마에게 더 자세히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자세한 정보는 아직입니다. 요정 숲은 원래에도 폐쇄적이고, 전투가 벌어지는 쪽은 루한과 정반대편에 있는 요정 숲의 동쪽인지라…….”

이에, 하이마는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들과 마법 통신이 연결되지 않았나?”

하이마의 말에 루시가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볼카에서의 첫 교류를 시작으로 요정 숲과 루한의 왕궁에 마법 통신구가 하나 연결됐었다.

“안 그래도 마탑의 마법사들이 몇 차례 마법 통신으로 현황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한 지 응답조차 없습니다.”

“……알았다. 최대한 조사해 보도록. 문라이트 후작에게도 지원을 요청하고.”

기사단장의 말에 루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 숲과 국경이 닿아 있는 변경백의 협조를 받으라는 형식적인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저…… 폐하, 안 그래도 문라이트 후작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루시의 입에서 변경백이 언급되자, 하이마 옆에 있던 루카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문제?”

“그렇습니다. 더불어 데스모 공작령에서도…….”

이어지는 루카스의 말에 루시푸르네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순백궁 내부 깊숙이 위치한 공터.

루시푸르네는 ‘그날’이 있은 후, 처음으로 이곳으로 향했다.

회귀 전은 물론, 회귀 후에도 여기엔 얼씬도 하지 않았었다.

이곳은 설원의 계승식이 벌어졌던 곳이고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곳이기도 했으니까.

‘여기서 솔라가 어머니와 나를 구했었지.’

루시는 폐허가 된 계승식장을 거닐면서 감회가 새로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악몽과 트라우마로 가득했던 이 장소가 이제는 아련하고 뿌듯한 추억의 장소 같았다.

사르르릇.

습관적으로 손목에 있던 세계수 팔찌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어머니…… 그리고 솔라시우스.’

다른 세계선에서의 이야기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이야기이자 세계였다.

무한한 우주 어딘가에, 어머니를 여의지 않고 설원의 저주를 품지 않은 루시푸르네가 살고 있다. 그런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솔라가 그런 관계였다니.’

한편으론 세계수 속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진실에 여전히 마음이 어수선하다.

‘상관없어, 나는 괜찮아!’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곤 생각을 환기시키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승식장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오면서도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가까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여왕의 행차를 멀찍이서 알리는 시녀장과 시녀들만이 그나마 보였다.

저 멀리 서 있는 베네사와 시녀들을 보던 루시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이동 반경을 통제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다들 뭐가 그리 기쁜지 작은 미소를 보인다.

아마 폐관 수련(?)으로 과거를 이겨 낸 여왕의 모습에 감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베네사와 시녀들이 고생이 많았겠군.’

설원의 저주를 품고 있는 그녀 주위에는 누구도 가까이 와선 안 된다. 따라서 그녀가 어딘가로 움직이려면 왕궁 전체가 비상이다.

그녀의 이동 반경 10미터를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시가 침실과 알현실을 절대 나서지 않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미안함을 무릅썼다. 세계수 속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그녀는 이 공터를 직접 와 봐야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다.

‘그나저나 문라이트 후작령에서 연락이 끊겼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공터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루시는 아까 알현실에서 들었던 루카스의 보고가 계속 걸렸다.

‘비슷한 때 데스모 공작령으로 재상을 따르는 마녀와 귀족들이 집결 중이라……. 공교롭단 말이지?’

그 외, 두 영지에서 각각 흘러나오는 각종 불길한 소문들.

모두가 데스모와 문라이트를 향해 대놓고 미쳤다고 말했다. 설원의 가호 안에서 반역이라니, 루한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야.’

루시는 미간을 좁혔다. 회귀 전과 지금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따라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가 벌어질 수 있었다.

‘유리아 영애…… 지크문트 후작…….’

하지만 그것이 늘 마음에 빚이 있는 변경백의 두 사람에게 해가 될 줄은 몰랐다.

문라이트 변경백 전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문라이트 후작과 그의 가솔들이 거주하는 문라이트 후작령, 그곳이 문제다. 갑자기 모든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마법 통신은 물론이고, 상인과 전령들의 출입도 막혔다고 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왕실 기사단에서 기사와 마법사를 파견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보고를 들은 루시는 일단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당장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 안 되면 선전관을 통해 솔라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가 왕궁으로 오기 전에 후작령에 들러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솔라도 변경백 사람들과 친분이 있으니까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바로 왕궁으로 오라고 해도 그가 거절하고 후작령으로 가겠지.

‘계속 만남이 늦어지네…….’

물론 그렇게 되면 솔라가 왕궁으로 오는 시간이 더욱 늦어질 것이다. 루시는 변경백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그와의 만남이 늦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잔뜩 고대하던 생일 파티가 자꾸만 미뤄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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