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96.
재상은 로안의 수상한 행적을 기록한 보고서를 여왕에게 건넸다.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찾다니? 무엇을?”
“그게…… 흑마법과 관련된 정보들이었습니다.”
“흑마법이라니? 그는 기사다.”
그녀의 의문에 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로안 샬루트는 흑마법 중에서 유독 사령술과 그림자핵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림자핵?!”
아리아의 입에서 그림자핵이 언급되자 루시의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습니다. 제국에서 설원의 가호를 넘기 위해 만들었다는 사악한 물질 말입니다.”
“……!!”
“폐하도 아실 겁니다. 오래전, 변경백 내곽에서 일어난 사령술사 이자벨의 폭주 말입니다. 설원의 가호 안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던 사령술사.”
“알고 있다. 지금은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가 그 대를 잇고 있지. 제국의 사천왕 중 하나이기도 하고.”
“폐하, 로안 샬루트는 사령술사 이자벨과 죽음의 대마녀 리나 리버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리아 데스모는 침통한 어조로 루시를 향해 보고를 이었다.
“여기 그가 보증했던 이들의 출입 기록을 보시지요.”
그녀가 마법으로 전달하는 각종 증거 자료가 루시의 손에 놓였다.
“짐작건대, 그는 제국과 내통하여 흑마법사들을 왕도로 보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실제로도 로안이 보증한 몇몇 인물들이 루한 내부를 오갔던 기록이 있었다.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을 이렇게 이용했던 겁니다.”
루한의 전쟁 영웅이기도 했던 로안 샬루트였기에 그가 보증한 사람의 이동은 루한 내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
“로안 샬루트가 보증한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지?”
“마녀회에서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하나같이 신분이 불확실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황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로안이 보증을 서준 인물의 정체가 바로 로뮤였기 때문이다.
로뮤는 변장을 하고 신분을 숨기고서 틈틈이 루나시르네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었다.
변경백에서 몸을 뺄 수 없던 솔라는 기꺼이 그런 로뮤의 편의를 봐줬다. 보증이라는 무리까지 해 가면서.
“분명…… 이들 중에는 사령술과 그림자핵과 관련된 흑마법사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재상의 무기가 된 것이다.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이노센티아의 연이은 실패에는 그림자핵을 등에 업은 로안 샬루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재상은 이제 대놓고 로안을 역적으로 규정했다.
부들, 부들, 부들.
보고서를 읽는 루시의 손이 크게 떨렸다.
“로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를 믿었는데……. 거대한 배신감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상하긴 했어. 내가 그에게 내린 시련은 하나같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련들, 그걸 저 망명 황족은 언제나 성공했었지.’
뒤늦게, 그가 그녀가 내렸던 세 가지 시련을 수행한 것이 수상하다고 생각됐다.
“그는 앞에서는 루한에 승리를 가져다주면서, 뒤로는 루한의 모든 것인 폐하를 해하려 했습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려던 것이지요.”
루한은 설원의 대마녀인 여왕이 없으면 망한다. 아무리 전쟁에서 이겨도 설원의 가호가 사라지면 끝이다.
“이게 확실한가? 아닐 거야……. 그는…….”
재상의 말과 재상이 건넨 보고서를 보면서도 루시는 믿고 싶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별개로 유일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폐하, ‘그날’의 참사를 누가 일으켰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바로 황족입니다. 그리고 로안 샬루트 또한 황족이지요.”
“!!”
루시는 재상의 말에 온몸의 힘이 빠짐을 느꼈다.
“그래도…… 로안 샬루트를 불러서 심문이라도 하는 것이…….”
그녀는 마지막 간절함을 담아 재상에게 말했다.
“소신이 지금 폐하께 전한 모든 정보는 마나에 맹세코 진실입니다.”
재상은 그런 루시의 말에 마나의 맹세를 했다.
“재상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심문을 할 필요도 없겠구나.”
결국 루시푸르네는 재상이 작성한 보고서를 믿어야 했다.
마나의 맹세를 한 사람의 말을 의심한다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기 때문이다.
마나의 맹세까지 한 재상의 진심이다.
반대로 로안 샬루트는 ‘그날’의 참사를 일으킨 황족이다.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를 향한 마음은 굳게 닫혔고, 신뢰는 불신으로, 호감은 적대로 바뀌었다.
시간이 잠시 흐르고,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로안 샬루트…… 로안 샬루트…….”
루시는 차오르는 배신감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강하게 그녀를 잠식한다.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저와 마녀회를 믿으십시오. 이노센티아도 성공할 것입니다. 배신자 로안 샬루트 또한 이제부터 뜻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재상은 그렇게 무너진 여왕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래, 나에겐 재상, 그대밖에 없도다.”
루시는 그렇게 재상의 속삭임에 잠식되었다.
설원의 저주는 점점 심해지더니, 결국 두 명의 시녀들이 얼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시녀들은 평소와 같이 10~12미터 거리로 다가왔다가 갑자기 얼어 죽었다.
이때, 루시푸르네가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다.
“이제…… 내 곁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재상과 그자밖에 없군.”
저주는 심해졌고, 이젠 어지간한 사람들은 15미터 내로 접근조차 못 했다.
10미터 거리로 올 수 있는 자는 하이마와 같이 마나를 익힌 자가 고작이었고, 재상 아리아와 망명 황족 솔라만이 여전히 이전 거리에서 루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제 누구의 알현도 받지 않겠다! 오직 재상을 통해서만 나와 소통할 수 있다!”
점점 심해지는 저주. 루시는 무서웠다. 또 누군가 얼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재상 외에는 누구의 알현도 받지 않겠다고 엄명했고.
“폐하, 저 또한…….”
이에, 로안이 자신 또한 재상과 동일한 거리에 올 수 있음을 알리려 했다.
“아니! 그대는 오지 마라.”
그런 로안을 향해 루시 흔들리는 눈으로 거절했다.
“……!”
그런 루시의 단호한 거절에 여왕을 바라보는 로안의 금색 눈동자가 떨렸다.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었구나!’
이를 본 루시는 더 깊이 오해하게 되었다.
루시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셨다고?!”
바로 루카스의 죽음이었다.
“그렇습니다. 최근 폐하의 저주가 더 심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만…….”
“자살을…… 아버지가 자살을……?”
그녀는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 ‘그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다. 많이 원망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설원의 저주가 나아지면 꼭 한 번 찾아가려 했는데…….’
알현실 옥좌에 앉은 루시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는 루시푸르네를 재상은 묘한 눈으로 관찰할 뿐이다.
‘팔찌가 시들었군?’
문득 여왕이 늘 손에 차고 있던 나뭇잎 팔찌가 보였다. 설원의 저주 속에서도 언제나 생생한 푸름을 잃지 않던 팔찌.
하지만 설원의 저주가 심해지고 여왕의 정신이 무너지면서 저 팔찌 또한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잘됐어. 가증스러운 세계수 냄새가 짜증 났었는데.’
비록 시들었지만 루시푸르네는 여전히 어머니의 팔찌를 손목에 찼다. 아리아 데스모를 조종하는 옥타나는 그런 여왕이 그저 웃겼다.
그날 이후, 루시의 정신은 더욱 피폐해졌다. 누구도 믿지 못했고. 극심한 우울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당장 로안을 처형해야 한다.”
여왕은 초췌한 얼굴로 재상을 향해 로안의 처벌에 대해 의논했다.
“폐하, 그는 보통 실력자가 아닙니다. 능력도 출중하고요. 차라리 그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철저히 감시하고 그의 행동을 방해하면서 말입니다.”
로안을 처형하자는 여왕의 말에 재상이 묘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재상의 뜻이 그렇다면 허락하겠다. 그의 최근 동향에 대해 말하라.”
“최근에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듣기론 어릴 적 헤어진 동생이라더군요. 하지만 동생은 핑계일 겁니다. 분명 꿍꿍이가 있습니다.”
“역시! 역시, 재상이다. 절대로 그가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
재상을 바라보는 여왕의 시선에 굳은 신뢰가 보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재밌군. 너무 재밌어! 이렇게 가지고 놀기 쉬운 아이라니. 베아트리체, 그년의 피에서 어떻게 이런 멍청한 아이가 나온 것일까?’
황궁에서 원격으로 재상을 조종 중인 악황후 옥타나는 이 상황이 너무 재밌어서 그 자리에서 총총 뛰었다.
‘최근 루카스의 죽음과 세계수 팔찌가 시든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양이야.’
전부터 옥타나는 루시에게 은밀히 정신 공격을 가했다.
본격적인 정신 공격은 이노센티아가 실패했을 때부터였다.
연이은 비극으로 멘털이 나간 루시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철저히 감시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하는 거야. 동시에 역으로 그를 이용하는 거야! 제국에 뺨 한 대 정도는 때려 줘야 속이 풀리겠어!”
재상은 최근 들어 혼잣말을 많이 하는 여왕을 재밌는 동물 보듯 구경했다.
여왕 루시푸르네의 망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모든 원흉은 로안! 로안 샬루트 때문이다. 전부 그자 때문이야! 이 설원의 저주도, 시녀들이 죽은 것도, 아바마마의 죽음도…… 전부!”
어느덧 그녀는 모든 불행의 탓을 망명 황족 로안 샬루트에게 돌리고 있었다.
* * *
회상이 끝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화창하던 왕궁의 하늘이 살짝 어두워졌다.
잠깐 한다는 회상이었는데, 시간이 제법 흐른 것 같았다.
그녀는 회한에 잠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충실하고 자랑스러운 시녀장과 시녀들이 여전히 미동조차 안 하고 멀리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이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린 걸까? 역시…… 데스모 공작령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정말이지 잊고 싶었던 기억, 그녀는 이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데스모 공작령이 너무나 미웠다.
‘아리아 데스모……!’
당장이라도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모든 잡것들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데스모 공작가는 대대로 우리 왕실의 은혜를 입었거늘! 왜 우리를 배신한 거지?! 어머니가 아리아 당신을 얼마나 신뢰했었는데! 나도 그랬고!’
재상이 곧 옥타나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루시는 재상에게서 특히나 배신감을 강하게 느꼈다.
‘전쟁이다! 적어도 아리아 데스모만큼은 내가 끝내겠어!’
그녀는 몸을 돌리곤 옛 계승식장을 떠났다. 충실한 시녀들이 그런 여왕의 이동을 보좌했다.
다음 날, 여왕의 칙령 하나가 루한 전역으로 퍼졌다.
재상 아리아 데스모와 그녀를 따르는 모든 존재를 역적으로 규정하는 칙령이었다.
재상이 역도라니?! 왕국 전체가 술렁거렸다. 몇몇 대신들이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려를 표했다.
그럼에도 루시는 칙령을 거두지 않았다.
‘세계수가 그랬지. 옥타나와 악황제는 회귀 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그리고 재상은 옥타나의 하수인이지.’
즉, 재상도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내 행동이 회귀 전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그녀의 의심을 샀을 거야. 재상은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거야.’
증거 따윈 필요 없다.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명분을 만들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영지로 피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지.’
여왕은 마지막으로 데스모 공작과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투항할 것을 권고했다.
루시가 내린 마지막 자비. 하지만 공작령에서는 어떤 응답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으로 자신들이 역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경악하면서도 루한의 군대가 공작령을 포위하는 것에 찬성했다.
‘한 가지 찝찝한 점이라면…… 재상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제국으로 망명하지 않은 게 수상해. 왜 공작령에 모여서 저러고 있는 거지?’
그런 역도들의 행동에 루시와 루카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한편으론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찝찝함 때문에 거사를 망설일 수는 없는 법.
왕실 기사단장 하이마와 섭정 루카스가 군대를 이끌고 데스모 공작령으로 진군했다. 루시푸르네는 멀리서 그들을 배웅했다.
“데스모 공작령은 왕도 윈테이라에서 가깝지요.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저를 바로 부르세요. 잠깐이지만 힘을 보탤 수는 있을 거예요.”
출전하기 전날 밤, 그녀는 아버지 루카스에게는 여차하면 자신을 부르라고 단단히 일렀다.
‘지금의 악황제는 회귀 전과 전혀 다른 존재야. 옥타나 또한 달라졌다고 봐야 해. 그 옥타나의 수하인 아리아 또한 마찬가지고.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제국으로 안 가고 루한에 남은 것이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은 회귀 전과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특히 자신과 솔라가 강해진 만큼, 적들도 강해졌다.
그래서 여차하면 자신이 나설 각오도 했다. 데스모 영지는 루한에서 가깝다. 그녀가 무리 좀 하면 공간 이동 후 얼마 동안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걱정 놓으소서. 설원의 가호 아래서 폐하의 검은 무적입니다.”
하지만 하이마도, 루카스도, 그 누구도 여왕까지 부를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아무도 여왕의 군대가 패배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데스모 공작령은 왕도에서 가깝다. 즉, 설원의 가호가 강한 땅이다.
설원의 가호는 정당한 살육에겐 징벌을 내리지 않았고, 여기서 정당한 살육은 반란군을 척살하는 것도 포함됐다.
그렇게 내전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