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97.
변경백 내곽 중심부에 위치한 문라이트 후작령은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다.
비록 변경백이었지만 내곽이었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땅은 비옥했고 풍부한 광물도 많았다. 무엇보다 대대로 기사도 정신이 뛰어난 영주가 일대를 직접 다스렸다.
정체는 있어도 퇴보는 없을 것 같았던 문라이트 영지가 최근 들어 급변했다.
급변의 시작은 문라이트 후작가의 무남독녀 ‘유리아’가 볼카에서 영지로 귀환하면서부터다.
유리아에게는 왕도에서 온 ‘지하드’라는 주치의가 붙었는데, 둘은 마치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던 사제지간처럼 굴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전조가 후작가의 성과 저택에서 나타났다.
몇 주 후, 문라이트 후작 지크문트와 그의 아들들이 영지로 복귀했다. 후작령의 실권자들이 복귀했음에도 영지의 이상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제일 먼저 영지를 통한 모든 이동이 금지되었다.
상인과 모험가들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모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영지 안에서 듣기만 해도 참혹한 소문이 흘러나왔다.
특히 ‘피’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마치 고대에 멸종한 흡혈귀처럼 영지민들 모두가 피에 미쳐 있다는 얘기.
후작령 사람들이 정신없이 피를 탐하다가 설원의 징벌을 맞아 죽었다는 얘기는 이제 안줏거리도 되지 못했다.
진상을 조사하러 들어간 왕실 기사와 마탑의 마법사들이 실종되었다는 소문 정도는 되어야 입방아에 올랐다.
사람들은 데스모 공작령의 일보다 문라이트 후작령의 일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라이트의 성과 저택은 혈향과 어둠 가득한 을씨년스런 곳이 되었고, 대대로 후작가에 충성하던 가신들과 하인 및 하녀들 또한 창백한 얼굴과 번들거리는 눈으로 어슬렁어슬렁 피를 찾아 돌아다녔다.
콰아앙!
그런 적막한 성의 후문에서 간만에 요란한 소란이 일었다.
강렬한 검기에 맞았는지 성의 후문은 완전히 찢어져 있었고, 그 잔해와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프리츠……! 어서, 어서 가라! 내 정신이 온전할 때를 놓치면 안 된다!”
그 안에서 지크문트 폰 문라이트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윽! 으아아아악!”
후작의 몰골은 이상했다. 창백한 얼굴에 붉게 충혈된 눈, 비명을 지르면서 벌린 입에는 유독 길고 뾰족하게 자란 송곳니가 있었다.
“각하……! 아버지!”
문라이트 후작가의 장남 프리드리히가 비통한 표정으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본다.
“어서! 아직 감염되지 않은 너만이 후작령의 진실을 알릴 수 있다! 어서 가라! 요정 숲, 요정 숲으로 가서 로안 샬루트를 찾아라!”
흐아아압!!
후작은 고함을 지르면서 아들에게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막았다.
“알겠습니다! 기필코! 로안 경과 함께 꼭 다시 오겠습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눈물을 훔치곤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
황금색 고결한 나무, 세계수의 뿌리 쪽에서 차원을 여는 구멍이 생성되었다.
그 차원 구멍 안에서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휴~ 아슬아슬했어.”
구멍에서 나온 사람은 둘이었다. 엘프 여왕 리리아와 그녀의 부축을 받은 남자 솔라시우스.
“이것도 세계수의 계산이었나?”
그녀의 부축을 받은 솔라는 리리아에게 존칭이 아닌 반말로 물었다.
그의 상태는 딱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고 피가 굳어서 딱지가 앉았다. 옷 또한 수도 없이 찢어져 넝마가 되어 있었다.
솔라는 세계수 안에서 나오자마자 리리아의 부축을 거칠게 뿌리쳤다.
“세계수 묘목이 더러워졌어.”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리리아에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 세계수 묘목이 들려 있었는데, 싸움의 여파 때문인지 검은 흑염 같은 게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오히려 이게 좋다고 봐. 아주 깨끗한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과 비슷해. 지구식 표현으로는 예방접종? 백신? 면역력?”
리리아는 솔라로부터 세계수 묘목을 건네받으며 오히려 좋다는 듯 대꾸했다.
“……?”
“이제 이 세계수 묘목 속의 차원은 11차원의 존재들로부터 면역력을 가지게 되었어.”
솔라는 이어지는 리리아의 설명에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굉장히 무모했어. 조금만 잘못했어도 놈들에게 빼앗기거나 완전히 오염될 뻔했어.”
하지만 여전히 리리아를 불신하고 경계했다.
“그래서 막판에 나랑 세계수가 개입한 거잖아?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개입했으면 위험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아이~ 참! 아무리 나라도 인원 제한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 마지막도 간신히 들어간 거야.”
“그러시겠지.”
리리아의 해명을 솔라는 딱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악황제와 악황후 그리고 솔라시우스의 전투는 격렬했다.
태양샘 반지 하나로 오리지널의 힘을 되찾은 태광휘는 둘의 맹공을 받아 냈다.
마왕 세피로스는 본신이 내려온 것이 아니었고 옥타나만이 본신으로 온 것일 뿐이다. 단순한 힘 싸움은 태양샘 반지 하나면 충분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끝없이 몰려오는 11차원의 마수들, 그리고 짜증 날 정도로 각종 저주와 디버프를 걸어 대는 옥타나의 마법이었다.
분명 힘 싸움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때론 압도했다.
하지만 점점 솔라의 몸에 상처가 났다. 심력 또한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했다.
아까 설원의 권능과 싸우면서 소비한 심력이 마왕과 싸우면서 마침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마검 윈테이라에 담긴 냉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론 오래 못 버틴다!’
솔라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태양샘 반지를 추가로 낄 엄두도 못 냈다. 마검에 담긴 냉기가 두 번째 반지까지 감당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루시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도 그의 행동을 제약했다.
불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그가 들고 있던 세계수 묘목에도 11차원의 더러움이 튀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리리아가 난입했다. 세계수의 가호를 가득 안고서.
리리아는 세계수의 가호로 이 모든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켰다.
애초에 세계수 몸속에서 일어난 일.
세계수는 마치 방장의 권한을 휘두르듯 세피로스와 옥타나 그리고 11차원의 괴수들을 추방시켰다.
강퇴당한 그들은 하나같이 정신적으로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솔라의 모습에 리리아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너무 공교롭거든.”
애초에 누군가를 쉽게 믿지도 않았다.
“뭐~ 믿든 말든 상관은 없지. 어차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솔라의 반응에 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리리아의 말에 모처럼 솔라가 공감을 표했다.
“마왕이 굳이 완성된 묘목을 노린 이유는?”
그리고 궁금했던 질문을 쏟았다.
“으음~ 그 질문도 급하거나 중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여기는 바깥과 시간 흐름이 다르니까…… 잠깐 쉬면서 수다 떠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따악.
리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번처럼 테이블과 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세계수 주위는 옥타나와 싸웠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이전의 아름다운 연못과 정원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테이블 위에는 다과가 아닌 정갈해 보이는 식사가 놓여 있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차였다.
“배고프지? 어서 먹어. 기력과 상처를 회복시켜 줄 거야.”
리리아의 말에 솔라는 일단 차부터 마셨다.
음식에 무슨 짓을 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녀와 그의 사이가 그 정도까지 막장은 아니라고 생각하곤 목으로 넘겼다.
그런 솔라를 보며 리리아는 방긋 웃었다.
“세피로스가 실패한 묘목이 아닌, 완성된 묘목을 노린 이유 말이지? 아마 생각이 바뀐 모양이야.”
그리고 방금 그가 한 질문의 답을 해 줬다.
“생각?”
“응, 비록 완성된 세계속의 마왕은 실패하고 역소환되겠지만, 그렇게 성장한 세계는 더욱 탐스러워지잖아?”
리리아는 솔라에게서 건네받은 황금색 묘목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지구식 표현으로 하자면~ 게임의 난이도를 올려서 좀 더 재밌게 유희를 즐기겠다는 의미와 가까워.”
“악취미군.”
“맞아, 악취미지.”
솔라는 미간을 구겼고, 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들의 유희에 얼마나 많은 하위 차원이 멸망했던가.
당장 지구만 해도 수억의 인명이 몰살당했다. 여기도 마찬가지고.
“드디어! 새로운 세계선을 품은 묘목을 얻었어. 전부 태광휘, 네 덕분이야!”
솔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리리아는 세계수 묘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야. 설원의 계승이 성공한 또 다른 세계선은.”
그녀는 품 안에 묘목을 안고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궁금하지, 이후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솔라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아와 세계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니까.
리리아는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후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설원의 계승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고서, 제일 먼저 예나체리나는…….”
마치 노래하듯이 자장가 부르듯이.
* * *
설원의 계승식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일이 틀어진 것을 깨달은 재상은 급히 자신의 영지로 은거했다.
얼마 후, 예나체리나가 재상을 반역자로 지목했고 데스모 공작가는 루한에서 멸문당했다.
그 과정에서 데스모 공작가의 역대 가주들이 악황후 옥타나가 조종하던 인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예나체리나가 살아 있기에 루시푸르네는 여전히 공주로 남았다.
설원의 계승식이 성공했지만, 루시의 결혼은 서두르지 않았다.
예나와 루카스는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 남자가 왕궁으로 올 때까지.
솔라와 루나의 어머니, 1황후 텔미노아는 설원의 계승 실패로 경황없던 옥타나 덕분에 무사히 요정 숲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텔미노아는 죽지 않았고 루나 또한 실종되지 않았다.
리리아와 세계수는 세 사람을 요정 숲 외곽에 머물 수 있게 허락했고, 이들의 관리를 로뮤가 맡았다.
로뮤와 텔미노아는 요정 숲에서 다시 사제의 연을 이어 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애틋한 감정선이 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깊게 이어지진 않았다.
로뮤는 솔라의 검술 스승이 되어 줬으며, 루나에게도 마법과 정령술을 알려 줬다.
어느 날, 요정 숲 근처를 방문한 사령술사 이자벨과 요정 숲 밖으로 외출을 나왔던 루나가 만나게 되었다.
둘은 뭔가에 끌리듯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신분과 마나의 차이로 사령술을 가르쳐 주지도, 배우지도 못했지만, 루나는 이자벨과의 인연으로 사령술이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먼 훗날, 사령술이 흑마법에서 벗어난 제3의 마법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벨은 아예 요정 숲 근처에서 자신의 공방을 차렸고, 원래는 이자벨에게 갔어야 할 그림자핵은 엉뚱한 흑마법사에게로 가게 됐다.
솔라시우스가 성인이 되자, 세계수는 그에게 계시를 내렸다.
요정 숲을 나서서 루한을 도우라는 계시였다.
솔라는 요정의 숲을 나왔고 곧바로 루한으로 향했다. 루한의 변경백에서부터 제국군을 무찌르고 도적들을 척살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명성이 높아지자 왕궁에서 그를 불렀고, 마침내 예나체리나와 솔라시우스가 만났다.
“찾았어……. 드디어! 정말이지…….”
알현실로 입장하는 솔라시우스를 보는 예나체리나는 심란하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현실로 입장하는 순간부터 풍긴 마나의 냄새가 너무나 반갑고 그리워서 눈물이 날 뻔했다.
“합격!”
예나는 눈물을 애써 삼키면서 난데없이 합격을 외쳤다.
“……합격이네.”
그녀 옆에 있던 국서 루카스도 솔라를 향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솔라는 여왕과 국서의 반응에 의아했지만, 예나는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라면서 장난스러운 미소만을 보일 뿐이었다.
속전속결.
그렇게 루시와 솔라는 약혼식을 치렀다.
예나체리나와 루카스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고 루시 또한 이상하게 솔라시우스가 싫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솔라 또한 이상하게 루한의 공주에게 마음이 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