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99.
문득 로뮤는 출진 전에 리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그라진 세계선에서 자신이 저 가오이라는 수인족 왕에게 살해당한다고 했었지. 그러니 절대 녀석과 근접전은 피하라고 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근접전은 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처음 누이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존심이 상했지.
하지만 지금 이렇게 직접 상대해 보니 납득이 갔다.
요정 숲에서도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 요정 숲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면 당연히 필패지.
“그래, 여기다! 여기! 다른 데 가지 말고 나랑 놀자고?”
저 괴물이 공터를 벗어나면 요정 숲 방어선은 끝장이다. 로뮤는 필사적으로 광기로 물든 수인족 왕을 멀리서 때리며 약 올렸다.
‘리리아는 괜찮겠지?’
한편으론 따로 빠져나간 거짓의 대마녀가 신경 쓰였다.
‘분명 에이션트 엘프였어. 그것도 하이엘프.’
특히나 그녀의 외모가.
하지만 로뮤의 잡생각은 찰나 이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쿠오오오오!!”
수인족 왕 가오이가 틈틈이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놈은 눈앞의 하이엘프가 얄밉게 거리를 벌리자, 분노 가득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눈앞에서 모기처럼 쏘고 튀는 엘프가 더욱 증오스러울 것이다.
이성을 반쯤 잃은 괴물이었기에, 더욱 감정과 본능에 이끌릴 것이다. 실제로도 그래 보였고.
“듣던 것보다 힘은 세지만 그만큼 멍청해진 것 같군!”
로뮤는 이를 이용 중이었다.
“수인족 왕을 이쪽으로 유인해! 저 하이엘프 하나에 사용하는 건 낭비야!”
로뮤의 속셈을 눈치챈 제국 마법사들이 가오이를 다루려 했다.
“어림없다!”
“근위대장 로뮤를 지켜라!”
로뮤와 함께 전투 중인 엘프 근위대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로뮤와 가오이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제국 마법사와 암흑군단, 수인족 전사를 상대했다.
그렇게 전투가 몇 시간째 이어졌다.
날이 저물고 숲이 어두워졌음에도 괴성과 파괴음, 비명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이엘프 로뮤, 슬슬 한계입니다!”
“정령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숲도 많이 파괴되었고요.”
제국 마법사들은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요정 숲에서도 사악한 마법을 사용했다.
세계수 가호 아래서, 침략자들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도 얼마 안 가 부활했다.
“놈들은 지치지도 않는 건가?!”
“분명 죽였는데도 다시 일어선 것만 셀 수 없이 봤습니다…….”
반대로 로뮤와 엘프들은 점점 지쳐 갔다. 숫자도 눈 녹듯 줄었다.
요정 숲 외곽까지 펼쳐졌던 엘프들의 방어선이 어느덧 수목 도시 코앞까지 후퇴해 있었다.
쿠오오오오!
콰아앙, 콰아앙!
이제는 저 수인족 왕을 따로 상대한다는 의미조차 사라졌다.
파괴왕 가오이가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른다. 마차 크기의 워해머와 배틀엑스가 각각 양손에 들려 있었고, 이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이를 막던 정령들이 소멸되었고, 운 없이 휘말린 엘프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간다.
로뮤는 최선을 다해 화살을 쏘았지만, 이제는 가오이만 그를 노리는 게 아니다. 지치고 쓰러진 아군이 늘어난 만큼 로뮤를 저격하는 제국군이 늘었다. 이제 그는 피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가 점점 늘었고, 몸과 정신 또한 탈진 직전이다.
“숲 밖에 있는 인간들에게 지원 요청을 해!”
도시 입구에서 함께 싸우던 장로 아이지가 기어코 자존심을 버리며 외쳤다. 인간의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세계수 가호 깊은 곳에서 말이다.
하지만 장로의 명을 받고 숲 밖으로 정령을 보낸 엘프 파수꾼이 얼마 뒤 사색이 된 얼굴로 보고했다.
“인간들 쪽도 상황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듣기론 암흑대공이 나타났다고…….”
“맙소사, 세계수께서는 이를 예견하지 못하셨단 말인가?”
파수꾼의 보고에 장로 아이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근처에서 숨을 헐떡이며 장로와 파수꾼의 말을 엿들은 로뮤가 요정 숲 밖에 있을 루나를 그렸다.
‘루나…….’
암흑대공이라니. 볼카에서도 결국 당해 내지 못한 존재다.
심지어 지금은 눈앞의 암흑군단과 수인족처럼 괴랄하게 강해졌을 터.
“……리리아.”
암담함을 느낀 로뮤가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보며 탄식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로뮤 오라버니!”
로뮤의 귀에 반가우면서도 들려선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리나?!”
바로 루나시르네였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검은색으로 변한 루나가 빗자루를 타고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전투가 치열했기에, 누구도 전장으로 날아오는 작은 소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제국군은 분노와 피에 미쳐서, 엘프들은 그런 제국군을 상대하느라.
“도우러 왔어!!”
루나는 빗자루에서 뛰어내리면서 로뮤 앞에 섰다.
“많이 다쳤잖아!”
그리고 상처 입고 지친 로뮤를 보며 목소리를 떨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암흑대공은?”
그런 루나를 향해 로뮤가 역으로 외쳤다.
“암흑대공?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
루나는 로뮤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도 인벤토리에서 꺼낸 포션을 빠르게 로뮤의 몸에 붓는다.
“엇갈렸나 보군…….”
로뮤는 루나의 반응을 보며 안도해야 할지 말지 헷갈렸다.
“일단 저 괴물부터 막아야 해.”
그렇다고 루나를 다시 숲 밖으로 보내는 것도 위험하다.
부디 숲 바깥의 인간들이 잘 버텨 주길 바라며, 로뮤는 치료된 몸으로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응! 내가 지켜 줄게!”
활을 조준하는 로뮤 옆에서 루나가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을 준비하며 루나시르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늠해 보았다.
‘역시 사령술과 음영술을 펼칠 수 없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여기까지 오면서 제국 마법사들이 사특한 주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도 가능할까 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제국 소속 마법사만 되는 모양이다.
‘내가! 사령술과 음영술만 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야!’
그럼에도 루나는 기죽지 않았다.
휘이이이이.
그녀의 몸에서 혈통에 새겨진 빛의 마나가 발동됐다.
‘마검 루시에게서 배운 마법을 써 볼 기회야!’
틈틈이 루시에게서 배웠던 마법을 캐스팅했다.
빛과 냉기가 은은한 아지랑이를 피우며 어린 마녀의 주위를 감쌌다.
번쩍.
제일 먼저 어두웠던 숲을 대낮처럼 밝혔고, 사방에 가득한 사특함을 억제한다.
적들의 회복 속도와 부활 속도가 눈에 띄게 주춤했다.
쏴아아아아.
냉기 마법을 펼쳐서 움직임 또한 둔하게 만들었다.
“직접적인 전투는 힘들지만…… 이런 건 할 수 있어!”
루나가 로뮤를 보며 웃으며 외쳤다. 마치 “나, 잘했지?”라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그래, 루나,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
로뮤는 진심을 담아 루나에게 말했고, 이윽고 움직임이 둔해진 가오이를 향해 다시 한번 정령 담긴 화살을 쏘았다.
퍼어억!
로뮤가 쏜 활이 가오이의 볼을 강타했다.
역시나, 도대체 무슨 마술을 쓴 것인지 녀석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루나의 마법 덕분일까? 이번에는 좀 타격이 컸는지 강하게 맞은 것처럼 주춤한다. 실제로 뇌진탕이라도 온 것인지 처음으로 놈이 휘청거렸다.
“레인저들이여! 파수꾼들이여! 저 수인족 왕을 집중 저격하라!”
로뮤가 쏜 화살에 가오이가 반응을 보이자, 다른 엘프 궁수들도 각자의 비기를 거대한 수인족 왕에게 집중했다.
쿠오오오!
“전진하라! 물러서지 마라!”
“황제 폐하 만세! 암흑이여, 영원하라!”
하지만 제국군도 지지 않겠다는 듯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포위가 숨 막힐 듯 조여 왔다.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하라!”
“우리의 영혼을 마계에 바치자!”
제국 마법사들도 마지막까지 숨겨 뒀던 비장의 주술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그러자 루나의 마법에 주춤했던 제국군이 포악함을 되찾았다.
크아아아아아!!
특히나 파괴왕 가오이의 폭주가 심상치 않다.
[죽.인.다!]
처음으로 수인족왕의 입에서 지성체의 언어가 피어처럼 쏘아졌다. 피어와 함께, 어느 때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로뮤와 루나를 향해 돌진했다.
쿵쿵쿵쿵!!
놈은 엘프들이 집중적으로 쏘는 화살 세례에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쿠오오오오.
그렇게 녀석은 순식간에 로뮤와 루나가 서 있는 바로 앞까지 도달했고.
부와아아악.
들고 있던 거대한 무기를 내리찍었다.
파아아앗.
투명한 방어막이 루나의 양손에서 펼쳐졌고, 수인족 왕의 거대한 공격을 막아 냈다.
“끄윽!”
하지만 워낙 거대한 물리력에 루나는 짧은 비명과 함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소녀의 귀와 코, 입에서 피가 흘렀다.
“리나!”
로뮤는 급히 활시위를 다시 당겨 가오이를 조준했다.
“키아아아악!”
“죽어라!”
하지만 양옆으로 살기가 감지되어 조준했던 화살 끝을 돌렸다.
수인족과 제국군이 루나가 펼친 방어막 틈새를 노리곤 달려든다.
근접전에 특화된 엘븐나이트와 엘프 전사가 있었지만, 다들 지치고 숫자도 얼마 없는 상황.
피슉.
로뮤는 호랑이 타입의 수인족 전사를 향해 활을 쏘았고, 오른쪽 이마를 맞췄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수인족 전사의 머리가 반쯤 터졌다.
하지만 달려드는 적은 여전히 많았다.
쓰러진 수인족 뒤로 곰 타입의 수인족과 제국의 암흑 기사가 나타났다.
원래라면 자리를 이탈해 활과 마법을 쏴야 하지만, 여기에는 루나가 있다. 루나가 로뮤 대신 가오이를 막고 있다.
스르르릉.
로뮤는 결국 리리아의 당부를 어기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서걱, 서거걱.
검을 휘두르고 베는 소리.
쿠웅, 쾅, 쾅.
방어막을 거침없이 때리는 소리가 묘하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몸서리칠 정도로 반복적인 고행이 시작되었다.
적도 아군도 서로 지쳤는지, 사방을 울리던 비명도 고함도 어느덧 들리지 않았고 그저 단말마의 숨넘어가는 소리, 베고 찌르고 터지는 소리, 거친 숨소리만이 숲속을 채웠다.
저물었던 하늘은 어느덧 깊은 새벽을 향해 잠기기 시작했다.
새벽은 깊었고, 요정들의 수목 도시 엘펜을 지키던 방어선이 결국에 뚫렸다.
“대피하라! 도시 중심부로 아이들을 피신시켜!”
한쪽 팔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엘븐나이트가 도시를 비틀비틀 돌아다니며 외쳤다.
엘프들은 뛰어나다. 하지만 모두가 전투에 특화되진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 엘프들은 비전투 계열이다.
처음으로 요정 도시가 뚫렸다. 믿을 수 없는 비극.
엘프들은 패닉에 빠졌다. 요정들도 정령들도 신수들도, 하나같이 벌벌 떨고 비명을 지르면서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세계수라면, 여왕님이라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런 티끌 같은 바람을 가지고서.
쿠오오오오.
키아아아아.
죽어도 계속해서 부활하는 끔찍한 적들이 그런 요정들의 뒤를 쫓았다.
“세계수를 범하라! 정령들을 더럽혀라!”
“요정들의 씨를 말리자!”
“황제 폐하 만세! 암흑이여, 영원하라!”
“마계의 어둠은 새벽을 영원히 닫으리!”
참혹한 외침이 파괴를 연주한다. 도시를 붉고 어둡게 물들인다.
“리나, 어서 도망쳐!”
혼란과 파괴, 절망의 물결 속에서 루나를 향한 로뮤의 외침이 애처롭다.
“싫어! 도망치려면 같이 가!”
그런 로뮤의 외침에 루나 또한 똑같은 성량으로 응답했다.
“너는 이 도시와 상관없잖아! 어서 도망쳐!”
“로뮤 오라버니가 이 도시와 상관있잖아! 게다가 여왕님한테서 보상도 못 받았어!”
둘은 서로 등을 맞대고서 버티고 있었다.
몰골은 각자 비슷하게 엉망이었다.
로뮤는 아까 루나가 준 포션으로 회복한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를 몸에 그렸다. 들고 있던 활과 검은 부러진 상태였고, 지금은 어디서 주운 것인지도 모를 단창을 하나 들고서 간신히 서 있었다.
루나는 피로 물들어 흰자 하나 안 보이는 눈동자, 코와 귀, 입가에서 흐르다가 굳은 피로 얼굴이 흉했다.
얼마나 마나를 많이 썼는지, 쫙 뻗은 양팔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떨었다.
쿠웅, 쿠웅, 쿠웅.
그런 두 사람을 수인족과 제국군이 우르르 포위한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포위 대형에서 보였다.
제일 선두에는 숨을 씩씩거리는 거대한 수인족 왕 가오이가 있었는데, 들고 있던 마차만 한 무기는 루나의 방어막을 치다가 망가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스치기만 해도 살과 뼈가 분리될 것 같은 거대하고 단단한 주먹이 있었다. 두 주먹은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얄미운 마녀와 하이엘프를 패 죽일 기세다.
“리나…….”
결국 루나를 설득하길 포기한 로뮤는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단창을 가오이를 향해 겨눴다.
“로뮤 오라버니.”
루나시르네 또한 후회 한 점 없다는 듯 지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남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죽음을 바로 앞에 둬서 그럴까?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저벅, 저벅, 저벅.
가오이가 홀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 나왔다.
네놈들의 목숨은 내가 직접 수거하겠다는 듯이.
꿀꺽, 로뮤와 루나는 동시에 침을 삼키곤 최후의 발악을 준비했다. 로뮤는 창 끝에 정령을 담았고 루나는 마지막 방어 마법을 준비했다.
가오이는 그런 둘을 가소롭다는 듯 하찮게 내려다보더니, 황소처럼 발을 구르면서 돌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파아아아앗.
“?!”
막 다리를 구르려던 가오이는 갑자기 찾아온 뜨거움에 놀라 몸을 움츠려야 했다.
화아아아앗.
느닷없이 전장 한복판에 깊은 새벽을 밝히는 눈부신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사악한 것들을 비췄다.
“끄아아아악!”
크아아아아.
햇빛에 노출된 모든 제국군이 전신이 불타는 고통에 비명 지르기 시작했다.
태양 이능 중 하나인 ‘열사의 필드’가 사방을 태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