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100.
사방을 비추는 새벽녘의 태양.
적에겐 무자비하게 뜨겁고, 아군에겐 너무나 따스한 기운.
루나와 로뮤의 코로 굉장히 친숙한 마나의 냄새가 들어왔다.
“솔라 오라버니!”
“로안!”
솔라시우스의 열사의 필드는 그 어느 때보다 진하고 뜨겁게 적을 불태웠다.
사방이 빠르게 빛과 불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끝없이 회복하고 부활했던 적도 재가 된 몸까지는 회복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척, 척, 척.
지상에 생성된 태양 속에서 금발, 금안의 방랑 기사가 걸어 나왔다.
크아아아악!
솔라시우스의 시선에 유독 극렬히 저항 중인 가오이가 잡혔다.
“늦었군.”
많은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
놈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눈앞의 전사에게 해방과 안식을 주기로 결정했다. 죽음으로.
!!
그는 가오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열사의 필드를 더욱 강하게 펼쳤다.
스킬 ‘열사의 필드’를 사용하는 그의 왼손 검지에는 태양샘 반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번쩍.
태양샘 반지가 붉은빛을 한 번 발했다.
쿠오오오오!
파괴왕 가오이의 몸에 붙은 불이 더욱 세게 타올랐다.
우오오오오.
녀석은 지지 않겠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버텼다.
파앗!
그러자 이번엔 솔라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였다.
화아아아아.
가오이의 몸을 뒤덮은 빛과 화염이 더욱 거세졌다.
크아아아!
다시 한번 파괴왕의 저항.
그럴 때마다 솔라는 손을 뻗어 열과 화염을 휘둘렀다.
쿵, 쿵, 쿵.
놈은 온몸이 녹고 불타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솔라를 향해 걸어갔다.
두 눈에는 오직 증오와 투쟁심만이 빛나고 있었다.
“…….”
이 또한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서의 가오이는 이렇게 폭주하지 않았다. 포악했지만 이성도 있었고 대화도 가능했다.
뭐, 11차원의 마왕이 직접 개입했으니 바뀌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화아앗!
솔라는 다시 한번 열사의 필드를 가오이에게 집중했다.
슬슬 마검 루시에 담긴 냉기가 걱정되었다.
다른 제국군과 수인족 전사들은 이미 전부 불타 재가 되었고,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놈들도 바닥을 기면서 고통에 발버둥 칠 뿐이다.
“이것이 세계수께서 그린 계획인가?”
“어찌 저게 단명종, 아니…… 필멸자의 힘이란 말인가!”
요정들은 넋 나간 표정으로 가오이를 태우고 있는 솔라를 볼 뿐이다. 다른 차원에서 온 용사의 무용은 오랜 세월을 사는 요정들에게도 경악 그 자체였다.
파아아아아앗.
모두의 경악 어린 경외를 받으며, 솔라는 다시 한번 태양 이능을 집중했다.
끄아아아아아…….
투웅!
가오이는 천천히 걷다가 30센티 거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릎 아래가 전부 녹고 타 버려, 더 이상 걷지도 서지도 못하게 됐다고 설명하는 게 정확할 거다.
다리를 잃었음에도 수인족 왕은 끝내 주먹을 들고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내지르려던 주먹도 진즉에 재가 되어 팔꿈치까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화아아아아.
그렇게 불타고 불타던 녀석의 전신은 얼마 안 가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 * *
승리를 향해 나아가던 저항군은 순식간에 무참히 추락했다.
오직 단 한 사람 때문에.
바로 암흑제국의 가장 끔찍한 무력, 도살자 대공 둠이다.
그는 단신으로 나타났고, 거대한 회색 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저항군을 쓸었다.
전세는 그렇게 역전됐다.
하늘은 깊은 새벽을 이불처럼 펼쳤고, 승리의 함성으로 풍요로웠던 요정 숲 들판은 겨울을 맞이한 평야처럼 조용하다.
들판에 무수한 시체가 가득하지만, 한낱 미물들도 저 지상에 서 있는 존재를 두려워한 모양인지 까마귀 한 마리조차 감히 땅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들은 까악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하늘을 배회할 뿐이다.
“이름.”
암흑대공의 입에서 똑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떨어진다.
“쿨럭…… 퉤! 솔라시우스.”
그러자 도살자 대공 앞에서 피투성이로 서 있던 남자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대꾸했다.
남자는 금발, 금안을 한 기사 복장의 청년이었는데, 본래 황금색이어야 했을 그의 머리 색은 머리카락에 묻은 피로 인해 로즈골드 색을 띠었다.
“이름.”
기사의 대답에 암흑대공 둠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지 다시 한번 질문을 반복했다.
“제국…… 허억…… 1황자…… 솔라시우스 디 미테일 룬 마하.”
금발, 금안의 피투성이 기사, 미나스트림은 끝까지 자신을 솔라시우스라고 주장한다.
그의 피로 젖은 두 눈이 주위를 훑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주위는 전부 아군이다.
그들은 심지어 무기를 들고서 눈앞의 적 암흑대공을 포위 중이었다.
하지만 포위만 할 뿐이지, 누구도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저 뒤에 가득한 아군의 시체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병사뿐만 아니라 기사와 마법사, 귀족도 마찬가지, 다들 차마 도망은 못 치고 벌벌 떨면서 애써 포위만 할 뿐이다.
‘인간이 맞는 건가……?’
이들 중 유일하게 둠에게 대드는 기사는 미나스뿐이었다.
그는 이미 다 틀렸음을 직감했음에도 검을 놓지 않았고, 둠의 반복되는 질문에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황족 중에 이런 놈도 있었군.”
그런 미나스가 둠은 마냥 싫지 않은 모양. 본래라면 진즉에 죽였어야 했지만 잠깐의 유흥을 위해 이렇게 가지고 놀고 있었다.
“너는 솔라시우스가 아니야.”
둠은 나직한 저음으로 미나스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아니! 내가 바로 제국의 1황자…… 솔라시우스다!”
미나스는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났는지, 다시 한번 빛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외쳤다.
“…….”
“…….”
그런 미나스의 행동에 병사와 기사, 귀족이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빌어먹을…… 저들도 날 믿지 않나 보군…….’
사방을 옥죄는 침묵. 대다수는 이미 그가 솔라시우스가 아니라고 인지한 모양.
설령 진짜 솔라시우스가 맞다고 해도 암흑대공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1황자는 없는 게 나았다.
‘난…… 솔라시우스로 죽는다!’
어차피 죽는 거,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죽을 수도 있을 법한데, 이상하게 미나스는 반항심이 생겼다.
몸은 패배했지만 정신만큼은 굽히기 싫어서 더욱 고집을 부렸다. 도살자 대공의 질문에 거짓으로 답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니까.
“그래, 그 투지만큼은 인정하마, 이름 모를 황족아.”
둠은 그런 미나스를 인정했다.
“……!”
암흑대공이 자신을 인정하자 미나스는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기쁘지는 않았다.
“슬슬 끝내야겠군.”
뒤이어 둠의 입에서 나온 혼잣말 때문이다.
우두둑, 우둑.
도살자 대공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무겁고 답답했던 공기가 따갑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이 의미 없는 유흥을 끝낼 시간이다.
바로 옆에서 공간 이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스스스슷.
잠시 후, 공간 이동 마법진과 함께 한 여인이 둠 옆에 나타났다.
“실패했나 보군.”
둠은 그렇게 나타난 여인을 보자마자 말했다.
“닥쳐…….”
옥타나는 피로와 짜증이 어우러진 어조로 대꾸했다.
세계수 속에 들어갔던 옥타나는 세계수에 의해 쫓겨나야만 했다. 그녀는 강제로 공간 이동을 당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한 위치를 골랐다. 바로 도살자 대공의 옆이다.
‘저 엘프는 누구지……?’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엘프 여인을 본 미나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피에 물들어 반쯤 감겼던 그의 눈이 번쩍 떠질 정도.
요염함과 색기만 따지면 전날 본 엘프 여왕 리리아보다 더 뛰어난 것 같다.
‘초상화로 본 아낙시아 님과 닮았어!’
어릴 적 몰래 보았던, 황궁 깊숙이 보관된 초대 황후의 초상화가 문득 떠올랐다.
“저 엘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흑발에 적안을 한 엘프는 매우 드물다고 하지 않았나?”
“아낙시아 님의 초상화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는 미나스 뒤에서 둠을 노려보고 있던 고위 귀족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미나스와 저항군들이 놀랄 일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오랜만이군, 옥타나.”
암흑대공의 입에서 이 엘프 여성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었다.
“옥, 옥타나?!”
“악황후라니? 저 엘프가?!”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둠과 옥타나를 번갈아 보았다.
둠은 눈앞의 버러지들이 뭐라 웅성거리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는 오직 옥타나에게만 집중하며 물었다.
“일단…… 하아, 데스모 공작령도 지금 개판이네? 일단 황궁으로 가야겠어.”
옥타나는 깊게 한숨 쉬면서 둠에게 말했다.
“이것들은?”
둠은 턱짓으로 미나스와 저항군을 가리켰다.
“마음대로 해. 난 먼저 황궁으로 갈 테니, 죽이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해.”
옥타나는 세계수에게 쫓겨난 후유증이 큰지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 슉 하고 사라졌다.
“…….”
“…….”
미나스와 저항군들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곤 벙찐 얼굴로 옥타나가 사라진 땅 위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 다 죽이고 가야겠어.”
그런 가축 같은 것들을 보며 둠은 도살자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히이익!”
“도, 도망쳐…….”
그제야 저항군들은 잠시나마 이탈했던 현실감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도살자 대공의 행동이 좀 더 빨랐다.
부우우우웅.
둠은 풍차 돌리듯 회색 마검을 크고 길게 만들어 휘둘렀고, 순식간에 두 자릿수의 병사들을 썰었다.
모두가 싸울 의지조차 잃고 도미노처럼 무기를 내던지고 적을 향해 등을 보인다.
부우우웅.
다시 한번 거대한 회색 단두대가 들어 올려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눈을 질끈 감고 엎드려 자신의 차례가 아니길 기도할 때.
“나는!”
한 청년이 힘껏 외치며 암흑대공의 회색 일격에 대항한다.
파아앗!
“나는! 제국 1황자!”
미나스는 얼마 남지 않은 빛의 힘을 검에 담고서 둠의 일격을 막았다.
쿠오오오옹.
철과 철, 마나와 마나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솔라시우스 디 미테일 룬 마하다!”
미나스는 그렇게 외치면서 둠의 공격을 막았다.
“그래, 그렇다고 해 주마.”
암흑대공은 눈앞의 이름 모를 황족을 기꺼이 여기며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부와아아아악.
다시 회색 마검을 휘둘렀다.
“와랏!”
미나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맞댔지만.
퍼어어엉.
“커억!!”
두 번째 공격은 차마 무리였는지, 그는 끝내 막지 못하고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우아아아악! 도망쳐!”
“저건 괴물, 괴물이야! 이길 수 없어!”
그나마 다행인 건, 미나스가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저항군들이 조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쯧.”
도살자 대공은 그런 저항군을 보며 혀를 찰 뿐이다.
그렇다고 죽이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생명을 베고 찌르고 죽이는 것은 그의 유일한 취미.
세상을 잿빛으로 보고 느껴야 하는 대공은 오직 살육을 통해서만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랬기에 살육할 기회가 온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다시 회색 풍차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가.
거대해진 회색 칼날이 빗자루처럼 들판을 쓸었다.
“!!”
잿빛 칼날에 덮쳐진 병사와 기사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이 절단나서 즉사했다.
“꺼흑…… 아윽…….”
저 멀리 날아간 미나스는 멍하니 누워서 암흑대공의 도살을 보았다.
“…….”
예술에 가까운 경지다. 살육도 많이 하다 보면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구나를 가장 잘 보여 준 예시 같았다.
‘이젠 몸도 안 움직이는군. 목소리도 안 나와.’
그러다가 완전히 아작난 자신의 몸을 보곤 해탈의 미소를 지었다.
온몸의 뼈가 완전히 부서져 움직이지 않았고, 내상으로 성대까지 다쳤는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쉬익, 쉬익, 쉬익.
가쁜 숨을 쉬면서 의식의 몽롱함을 느꼈다.
뭍에서 죽어 가는 생선 같은 눈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그의 숨이 점점 얕아질 때였다.
“……?”
문득, 해가 뜨는 게 느껴졌다.
‘벌써 해가 뜬다고?’
깊은 새벽이지만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미나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혈통과 어울리는 시간대에 죽는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으니.
“네가 날 사칭한다는 황족인가?”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미나스의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과 사지가 부러진 미나스는 움직이지 못해 듣기만 할 수 있었다.
‘설마?!’
하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네가 미나스트림, 배다른 내 동생이겠군.”
“!!”
남자의 말에 미나스는 죽어 가던 심장이 요동침을 느꼈다.
생기를 잃어 가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로 인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지. 잊었던 신체의 통증이 다시 느껴져 그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미나스는 아득한 정신 줄을 간신히 잡으며 로안 샬루트이자, 솔라시우스의 뒷모습을 보았다.
태양처럼 빛나는 광휘의 기사가 도살자 대공과 검을 겨뤘다.
파아앗!
도살자 대공은 미나스가 본 이후로 처음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새벽이 끝나고 해가 뜨는 것처럼 너무나 순리에 맞고 자연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