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101.
절망과 구원은 또다시 교대를 이뤘다.
이번엔 1황녀 루나시르네가 아니다. 광휘의 기사, 대륙에 로안 샬루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황족 출신 방랑 기사다. 어쩌면 진짜 1황자 솔라시우스일지도 모르는.
-! -!! --!!
검과 검이 맞닿을 때마다 장렬하게 터지는 섬광, 맹렬히 번지는 광휘. 도살자 대공의 사악한 회색 단두대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미나스트림은 멍하니 앉아서 지금까지 자신이 사칭했던 존재를 응시했다.
“광휘의 기사!”
“아아…… 마하 대제의 재림이시여.”
미나스뿐만이 아니다. 귀족도, 마법사도, 기사도, 병사들도,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진정한 적통이 누구인지, 진정한 서약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령 솔라시우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저 광휘가, 저 태양검이 곧 새로운 여명이니까.
“이제는 알겠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나스의 귀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포션을 들이부었던 마녀였다. 흑발 흑안에 검은색 마녀 복장.
“리나 샬루트……?”
미나스는 소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
검은 마녀 리나 샬루트를 보던 미나스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자세히 보니까 목소리와 이목구비가 굉장히 낯이 익다.
머리 색과 눈동자 색 그리고 마녀 복장 때문에 확신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안정되고 눈앞의 마녀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자 점차 리나 샬루트의 진짜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루나시르네……?”
미나스는 조심스레 검은 마녀의 본명을 입에 담았다. 눈부신 금발 금안은 어디 갔는지, 그림자 같은 흑발 흑안을 한 1황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 다 맞아.”
미나스를 내려다보는 루나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래서, 황족 기사님? 진짜 이름이 뭐야?”
그녀는 미나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곤 속삭이듯 물었다.
“아까처럼 솔라 오라버니 이름을 씨불이면 죽여 버릴 거야.”
여차하면 진짜로 죽일 기세로 살벌하게.
“미나스트림…….”
이미 다 끝났음을 느낀 미나스는 한숨을 쉬면서 작게 말했다. 혹여나 주위에서 들을세라.
“미나스트림?”
미나스의 이름을 들은 루나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
그런 루나의 반응에 미나스는 씁쓸함을 느꼈다. 하긴, 당연하다. 그는 사생아였으니까.
‘하지만 솔라시우스 형님은 내 정체를 알고 계셨지.’
한편으론 아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솔라를 떠올리자 씁쓸함이 많이 희석된다. 감히 저분을 형님이라 부를 자격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강해졌군.”
솔라는 자신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 내는 둠을 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쪽도 더 강해진 것 같군. 마계에서 오면서 나름 자신 있었거늘.”
둠이 그런 솔라의 말에 대꾸한다.
재회하자마자 검을 맞댄 이후 처음 나눠 보는 대화다.
“그 반지 덕분인가?”
둠이 솔라의 손가락에 있는 태양샘 반지를 보며 물었다.
“난 강해진 게 아니야.”
암흑대공의 물음에 솔라는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지금 그는 태양샘 반지를 하나만 낀 상태다.
“본래 힘을 되찾은 거지.”
우우우웅.
그 말과 함께 태양 이능을 개방했다. 지구에서 마왕을 소멸시킬 때 사용했던 오리지널 태양 이능이다.
솔라시우스의 온몸이 빠르게 빛의 갑옷에 잠겼다.
‘빠르게 끝내야 해.’
오리지널 태양 이능을 사용 중인 솔라는 무심한 겉 표정과 다르게 속으론 초조했다.
‘마검 루시의 냉기가 거의 바닥이야.’
세계수 속에서 설원의 폭주를 가득 먹어 치웠던 윈테이라의 냉기는 어느덧 텅텅 비었다.
회색 대기실에서는 악황제와 옥타나를 상대해야 했고, 요정 숲 안에서는 가오이와 수인족, 제국군 정예를 상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암흑대공과 전력으로 전투 중이다. 연이어서 말이다.
단숨에 끝내야 한다!
솔라는 얼마 남지 않은 윈테이라의 냉기를 최대한 아끼면서 궁극기를 펼쳤다. 태양의 후예가 눈부시게 빛났고, 잠깐의 대화로 늘어졌던 긴장감이 돌아왔다.
“항복하지.”
그런 솔라를 본 암흑대공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누구 마음대로.”
슉-파아앗.
둠의 뜬금없는 말에 솔라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검을 휘둘렀다.
“…….”
어쩐 일인지 둠은 맞서지 않고 두 팔을 가만히 놀렸다.
서걱!
덕분에 솔라의 태양검이 깊숙이 들어왔다. 섬광과 함께 둠의 몸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본체가 아니었군?”
베었다는 느낌이 충분히 들었음에도 솔라는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크흐흐흐…… 마계에서 배워 온 잡술 중에 하나지.]
이에, 암흑대공의 몸이 점점 회색으로 물들더니 재로 흩어졌다.
[다음에는 본신으로 오도록 하지. 그때는 반지를 둘 다 껴야 할 것이야.]
“…….”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허탈하게 서 있는 솔라의 귓가로 흘렀다.
암흑대공이 사라지자, 솔라는 급히 이능을 거두고 태양샘 반지를 뺐다.
* * *
전투가 끝나고 전장 정리가 이어졌다.
산 사람은 죽은 자의 소지품을 적아 구분 없이 챙긴다. 금니부터 속옷까지 전부.
전리품을 얻기 위해 처참하게 뭉개지고 조각난 시체들까지 벗기기 시작한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이를 가능케 한다.
그렇게 벗겨 놓은 시체를 적과 아군으로 나눠 분류하고, 전리품 중에 갑옷과 무기는 군에 헌납하고 그 외의 것들은 병사들이 슬금슬금 챙긴다.
아군의 시체는 성직자를 불러 장례를 치러 준다.
전우의 시체와 영혼이 혹여나 사악한 주술로 악용되는 걸 막기 위해 장례는 필수다. 성직자들은 전투 때보다 더 바쁘게 전장을 뛰어다니며 추도문을 읊는다.
사제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고, 그들의 신성력과 체력도 무한하지 않다.
장례 순위에서 밀린 적의 사체는 작은 언덕처럼 쌓은 뒤 불태운다.
사방으로 튄 자잘한 살점들은 까마귀와 짐승들이 포식하게 놔둔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랐기에 작업에는 문제가 없었다.
지치고 힘들 법도 하지만, 틈틈이 배낭을 채우는 전리품이 병사들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투 때도 내지 않았던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병사들이 들판에서 전리품을 챙기고 시체를 정리하고 있을 때, 저항군의 귀족과 기사, 마법사는 요정 숲 바로 앞에 모여 있었다.
요정 숲 바로 앞에는 결계가 돔 모양으로 쳐져 있었고, 그 결계 안에는 다섯 사람이 있었다.
리리아, 솔라, 루나, 로뮤 그리고 미나스가 불투명한 결계 안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결계를 쳤기 때문에 바로 앞에 있음에도 허가받지 않은 자는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 안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듣지 못했다.
저항군의 귀족, 기사, 마법사는 멀뚱히 서서 이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저 안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갈지 각자의 망상을 속으로 펼치면서.
결계 안에서, 미나스는 마치 죄인이 된 듯한 심정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로뮤와 루나가 차가운 눈으로 미나스를 보았고, 리리아는 그저 무표정에 가까웠다.
솔라는 무심함보다는 계산적인 눈으로 어깨를 움츠린 미나스를 보았다.
‘원작에서도 솔라시우스를 사칭하던 자가 있었다고 했지.’
스크립트로 얼핏 본 기억이 있다. 원작의 솔라시우스가 세계수 묘목을 구하러 요정 숲으로 오기 전, 그를 사칭하는 자가 왔다 갔다고 했었다. 리리아와 로뮤의 대사 스크립트에 몇 번 언급됐었다.
거의 공기 같은 비중이라서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던 이것이, 리리아가 낭송했던 묘목 속 이야기에서 좀 더 자세히 언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다.
“미나스트림.”
솔라는 나직한 어조로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불렀다.
“예…… 1황자 전하.”
미나스가 이제 체념했다는 듯 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 난 1황자가 아니다. 그저 방랑 기사 로안 샬루트다.”
“……??”
그러다가 이어지는 솔라의 말에 멈칫하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솔라시우스라는 이름, 지금부터 네가 가져라. 힘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
“!!”
상상도 못 한 배다른 형의 선언.
미나스는 입을 떡하니 벌릴 뿐이다.
“솔라 오라버니……?”
“로안?”
루나와 로뮤 또한 미나스와 비슷한 반응이다.
“…….”
오직 리리아만이 그런 솔라의 행동을 묘한 미소로 볼 뿐이다.
“리리아.”
솔라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리리아를 불렀다.
“세계수와 나는 찬성하는 바야. 솔라시우스로 인정받은 상태에서 세계수의 인정까지 받게 되면~ 아무리 능력이 부족해도 큰 반발은 없을 거야.”
“?!”
가장 크게 반대할 것 같았던 리리아와 세계수까지 지지를 표하자 미나스는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단명종인 그대와의 혼인은 결코! 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에 덧붙여진 리리아의 단호한 말. 미나스는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도대체 이게 뭔 개소리……?”
“……?”
루나와 로뮤는 지금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루나는 애초에 사그라진 세계선에 관한 얘기를 하나도 듣지 못했다.
로뮤는 사그라진 세계선의 얘기는 들었지만, 지구와 태광휘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랬기에 둘은 미나스 못지않게 멍청한 얼굴을 했다.
“나는 쭉 로안 샬루트로 살 것이다. 제국의 황제 자리에는 관심 없어.”
셋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말든, 솔라는 미나스트림을 황제로 세우기로 결정했다.
“악황제도, 암흑대공도, 악황후도 내가 죽일 거다. 넌 내가 치운 옥좌에 나 대신 앉아서 대륙을 평화로 다스려라.”
마왕을 죽이고 그가 불쑥 지구로 떠나게 되면? 제국은 또다시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갈 때 가더라도 교통정리를 해 주고 가야 덜 찝찝할 터.
그런 솔라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납득이 되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자유가 좋아도 저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있나?
‘루시는 뭐 하는 거야? 자나?’
루나는 함께 솔라를 말려 줄 푸른색 마검을 쳐다봤다.
하지만 루시라는 이름의 마검은 깊은 잠이라도 자는 듯 잠잠했다.
“어째서……? 왜……?”
멍한 얼굴을 한 미나스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리리아와 솔라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말했다시피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어.”
믿기 힘들어하는 미나스에게 솔라는 어조에 마나까지 담아서 답했다. 무형의 강요가 미나스를 압박한다.
“솔라 오라버니!!”
그런 솔라에게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루나시르네뿐이다.
“미쳤어?! 아니, 왜 황제 자릴 포기하려고 해?”
루나가 솔라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니면 루나, 네가 여황제가 되어도 좋아.”
그런 루나를 향해 솔라가 무심한 눈으로 말했다.
“여…… 뭐어?!”
루나는 솔라의 무심한 눈과 자신에게 불쑥 내밀어진 황좌에 잠시 얼이 빠졌다.
‘여황제……? 여황제가 되면…….’
그녀는 솔라의 제안을 잠시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고, 황금 옥좌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황제가 되면 돈 걱정은 없겠지?’
이윽고 루나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헤벌쭉해졌다.